
▲ Google Gemini가 상상한 AI 세상
전 세계가 AI의 지배 아래 재편되고 있다. 학술, 과학, 산업 전반에 AI 기술이 깊숙이 스며들면서 다양한 AI 엔진과 아키텍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그 흐름에 편승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분야가 있다. 바로 하드디스크, HDD 시장이다. 한때 SSD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든 레거시 저장장치로 평가받았던 HDD는 학습형 AI가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를 장기 보관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수단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 고성능 GPU와 HBM을 확보하려는 전선 뒤편에서는, 생성형 AI의 끝없이 누적되는 데이터를 담아두기 위한 HDD 확보 경쟁이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 Google Gemini가 상상한 WD와 씨게이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글로벌 HDD 시장의 양대 산맥인 웨스턴디지털(WD)과 씨게이트는 최근 분기 매출이 모두 3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WD는 해당 분기 동안 출하된 HDD의 총 용량이 190EB(엑사바이트)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32% 늘었으며, 씨게이트 역시 출하 용량이 45%나 급증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과연 HDD 시장이 진정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일까? 다나와 리서치 데이터를 통해 이러한 흐름이 실제 소비자, 유통 시장에서도 감지되고 있는지 면밀히 들여다보자.

가장 기본적인 경제 원칙인 수요–공급 법칙에 따르면, 수요가 폭증하면 가격이 오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보고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2분기 기준 HDD 전체 평균 가격이 이미 10~20%가량 상승했다는 것이다. AI 아키텍처 구축이 증가함에 따라 HDD 수요가 늘어난 결과다. 다나와 리서치 데이터를 보면 상승 폭은 이보다 더 가파르다.
2024년 1월 대비 용도별 HDD 평균 가격을 살펴보면, PC용은 11만 9천 원대에서 19만 5천 원대로 약 63.4% 상승했고, NAS용은 36만 6천 원대에서 40만 8천 원대로 11.4% 올랐다. 기업용 HDD는 2년 새 가격 폭등과 폭락을 순차적으로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분위기 끝에 49만 4천 원 수준에서 58만 6천 원으로 약 19% 상승하며 가격 인상 흐름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은 AI 연산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기업, 기관들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일부 매체에 따르면 기업용 18TB 이상 고용량 HDD는 주문 후 납품까지의 리드타임이 기존 ‘수주 단위’에서 3~6개월로 대폭 늘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기업용 HDD 수요 급증이 PC용·NAS용 HDD 가격을 직접적으로 끌어올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장 전반의 심리를 자극하며 가격 상승세를 더욱 가속한 일종의 웨건 효과가 나타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제2의 황혼기’를 맞아 HDD 업계의 영원한 라이벌인 씨게이트와 WD의 경쟁 구도에도 변화가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NO다. 연도별 판매량 점유율을 보면, 2023년 말부터 2024년 사이에는 균형추가 다소 WD 쪽으로 기우는 듯했지만, 현재는 다시 60 대 40 수준으로 안정적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두 업체는 AI 전성기를 기회로 삼아, 기업용 제품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검승부’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 Computex 2025에서 선보인 씨게이트의 Mozaic 3+
씨게이트는 열 보조 자기 기록(HAMR) 기술을 적용한 ‘모자이크(Mozaic) 3+’ 라인업을 완성하며, 업계의 ‘마의 30TB 벽’을 넘어서는 기술력을 과시했다. 반면 WD는 대담한 기술 도약보다는 안정성과 시장 확장성을 택했다. B2B 납품 중심의 Ultrastar 라인업을 주력 생산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Gold 라인업을 일반 소비자 시장에도 공급하는 실리적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곧 다가올 2026년, AI 아키텍처 경쟁이 더욱 심화되면서 이 제조사별 점유율 그래프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HDD 시장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거인의 싸움이 이제 2막으로 접어든 셈이다.

기업용 고용량 제품이 시장을 주도하면서 전반적인 스펙의 상향 평준화도 두드러진다. 특히 버퍼 메모리 용량 변화가 뚜렷하다. PC용 HDD의 경우 256MB 버퍼 제품이 87.3%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512MB 제품은 4.54%에 불과하다. NAS용 역시 512MB 제품의 비중은 19.89% 수준에 머문다. 고속 연산보다는 단순 녹화가 주력인 CCTV용은 여전히 64MB 버퍼 제품이 36.11%로 판매량 점유율이 가장 높다.
반면, 기업용 HDD 시장에서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512MB 버퍼 제품의 비중이 35.06%까지 상승하며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18.75% 수준에 그쳤던 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해, 지난 11월에는 무려 46.59%를 기록하며 256MB 제품과 사실상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이러한 512MB 고용량 버퍼 메모리 제품군의 중심에는 씨게이트의 Exos X22 일부 모델과 X24, 그리고 WD의 Ultrastar H550이 존재한다. AI가 학습, 추론 과정에서 생산하는 데이터 규모는 앞으로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대용량 버퍼를 갖춘 HDD의 필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업용 HDD 시장에서 512MB 버퍼 제품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흐름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향후 AI 인프라 확장 속도에 따라 그 비중은 더 가파르게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이제 남은 화두는 용량이다. 다나와 리서치 데이터는 HDD 용량의 명확한 양극화를 보여준다. PC용 HDD는 10TB 이하 제품이 95.94%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개인 사용자가 단순 저장용으로 10TB 이상 고용량을 선택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NAS용 역시 개인 및 SOHO 비중이 높아, 10TB 이하 제품이 시장의 주류를 형성한다. 그러나 기업용 HDD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12~20TB급 제품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22TB 이상 초고용량 제품도 8.62%나 차지한다. AI가 학습하고 저장해야 할 데이터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더 많은 용량을 담을 수 있는 HDD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 느와르 풍으로 상상해본 AI의 미래 사회
AI 산업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IT 산업 곳곳에 순풍을 몰고 오다가, 결국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던 HDD 시장에도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켰다. 쇠퇴하던 시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긍정적인 효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는 PC용, NAS용 HDD 가격까지 덩달아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이미 AI 아키텍처들이 낸드 플래시 수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PC 시장 전반에 인플레이션이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동안 관심 밖에 있던 HDD마저 가격이 오르는 모습은 사실상 이례적이고 묘한 장면이다. 하루가 다르게 지형이 바뀌는 AI 시대. 이제는 소비자도, 업계도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더욱 냉철하게 대응하며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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