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사운드의 증인
가끔 각 오디오 메이커의 역사를 훑어보다 보면 현재의 모습과 그 당시의 모습. 그리고 당시 오디오 메이커들의 지형도 사이에서 각 메이커가 위치했던 지점들이 머릿속을 교차한다. 세월에 따라 오롯이 자신들의 위치를 견지했던 반면 어떤 메이커는 세월의 부침 속에서 사라졌고 또 어떤 브랜드는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옷을 걸치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거의 부침 없이 현재까지 설립자의 철학을 견고히 하고 있는 메이커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세월의 굴곡 속에서 현재 굳건한 메이커들이 꽤 있다는 건 그나마 우리 같은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특히 영국 메이커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가끔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데 각 메이커 자체의 역사는 또 다른 메이커들과 묘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왔다. BBC 라이센스 스피커들의 역사와 그 안에 속했던 주요 엔지니어들의 족적만 훑어봐도 현재 하이파이 역사의 커다란 한 줄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쿼드 같은 메이커는 BBC 방송국에 납품하던 액티브 스피커들에 내장되기도 하면서 스피커 메이커와 깊게 관계를 맺어간다. 하베스에 쿼드 앰프가 좋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특히 영국의 스피커 메이커들은 오랜 시간 각각 매우 독창적인 유닛과 인클로저 구조, 로딩 방식을 견고히 하면서 진화해왔다. 거대한 스케일과 신소재 투입을 통해 만들어진 미국의 고급스러운 하이엔드 스피커들이 주류를 이루기 이전 영국은 그들의 전통을 앞세워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HMV에서 데카에 이르는 레코드 업계의 태생과 황금기의 시대 탄노이는 여전히 그들의 독보적인 유닛과 인클로저로 시대를 이겨냈고 하베스와 스펜더 역시 건재하다.
그중 와피데일이라는 이름을 꺼내보는 건 왠지 어색하다. 꽤 고가의 하이파이 시장에서 전통을 강조하는 위 브랜드들에 비하면 와피데일의 다이아몬드 시리즈 등을 보았을 땐 그저 저렴한 가격대의 보다 대중적인 스피커 메이커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와피데일은 영국 스피커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메이커 중 하나로서 브리티시 사운드의 증인 중 하나다. 탄노이 설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30년대 설립되었으며 오픈 배플 스피커를 만들어 미국의 알텍과 비견될만한 기술을 갖춘 보기 드문 스피커 메이커였다. 지금은 IAG라는 글로벌 오디오 그룹에 쿼드, 오디오랩같은 브랜드와 함께 속해있으나 설립 초기 와피데일의 기술력과 패기는 대단했다.
와피데일 EVO 4.4
여러 부침 끝에 IAG에 둥지를 튼 와피데일은 과거 그들에게서 상상할 수 없었던 제품들을 다수 양산해냈다. 대체로 합리적인 가격대에 하이파이 그리고 홈 시어터 시스템에 어울리는 제품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설립자가 주창했던 합리적인 가격대의 고성능 스피커 제작이라는 모토는 지금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다이아몬드 시리즈는 굉장한 가격 대비 성능으로 히트를 기록했고 내 생각에도 와피데일을 빼놓고 입문형 스피커를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와피데일 EVO 4.4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스피커가 와피데일일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엘락 같은 스피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리본 트위터를 달고 있었고 그 아래로 늘어선 유닛은 나의 기억에 기존 와피데일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중한 몸매는 마치 ATC 같은 메이커의 스피커를 상상하게 했고 특히 중역은 프로악, PMC의 일부 스피커에서 보았던 유닛을 연상시켰다. 과연 와피데일 EVO 4.4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마도 와피데일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스피커를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VO라는 라인업 작명에서부터 이런 의도가 엿보이는데 이는 최근 와피데일의 행보를 볼 때 신/구의 조화를 꾀하려는 목적으로도 보인다. 예를 들어 1965년에 와피데일에서 출시한 린톤(Linton)이나 그 후 출시했던 덴톤(Denton)같은 역사적 스피커들을 2천 년대 들어 리바이벌하고 있는 모습과 EVO 같은 라인업은 뚜렷하게 대조된다.
후기 와피데일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시리즈의 리노베이션에 이어 이제 와피데일은 EVO를 통해 새로운 와피데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일단 트위터에 AMT, 즉 ‘Air Motion Transformer’ 트위터를 사용한 것부터 심상치 않다. 엘락 같은 메이커 또는 몇 년 전 문도르프의 MA30 같은 모델에서 볼 수 있으며 그리폰 같은 메이커도 즐겨 사용하는 트위터다.
EVO 4.4 설계 완성도의 관건은 아마도 유닛간의 이물감 제거였을 것이다. 초고역까지 쉽게 뻗어나가며 입체적인 사운드 스테이지를 펼쳐내는 특성을 가진 AMT의 채용은 와피데일의 기존 사운드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 케블라 진동판을 채용한 미드/베이스 유닛들이 AMT와 음색과 시간축 특성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는지가 관건이 될 듯하다.
전체적인 구성은 AMT 트위터 한 발에 2인치 미드레인지 한 발 그리고 6.5인치 베이스 우퍼 두 발로 이루어져 있다. 후방에 포트를 마련한 저음 반사형 타입으로 능률이 90dB 정도에 공칭 임피던스 4옴으로 저역 제어가 힘든 스피커는 아니라고 판단되며 실제 청음 결과도 다르지 않다. 외형을 보더라도 1미터가 약간 넘는 위풍당당한 체구에 개당 25.6KG 정도로 다부진 느낌을 준다. 마치 과거 루악의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를 약간 연상시키기도 하는 디자인이다.
셋업 & 리스닝 테스트
와피데일 EVO 4.4는 +/-3dB 기준 38Hz에서 24kHz까지 재생한다. 대략 중간 저역에서 높은 고역까지 재생하는 스피커로서 사이즈나 유닛을 감안하면 아주 낮은 딥 베이스까지 재생하지 못하는 건 약간 아쉽다. 하지만 제동은 쉬운 편이며 3웨이에 4스피커로 대역을 모두 나눈 점이 또 다른 기대를 하게 만든다. 참고로 이번 시청은 오디오 아날로그 푸치니 애니버서리와 브라이스턴 BDA-3 DAC 등을 사용해 시청했다. 참고로 앰프에 대한 포용력이 좋고 제동이 어렵지 않으며 동시에 매칭에 따른 소리의 변화도 큰 편이다.
Susan Wong - Vincent
Close to Me
일단 수산 웡의 ‘Vincent’같은 보컬 레코딩을 몇 곡 재생해보면 요즘 유럽이나 미국 쪽 하이엔드 스피커들의 사운드와는 매우 거리가 있다. 확실히 영국 메이커들의 통 울림이 약간 느껴져 포근하고 따스한 중역이 귀에 먼저 들어온다. 전체 대역 밸런스는 낮은 편이지만 AMT 트위터로 인해 무덤덤하거나 둔한 느낌은 들지 않고 실제 고역이 상쾌하게 뻗는다. 기타는 가지런하고 보컬은 정갈한 소리를 내 담백한 느낌을 준다. 한편 음상은 조금 큰 편이며 악기도 하나하나 큼지막하게 묘사하다보니 어떤 곡을 들어도 든든한 포만감이 충만하다.
Ottmar Liebert - Rain
slow
EVO 4.4는 AMT 트위터를 탑재하고 있어 고역이 가장 돋보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역시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중역 특성이 귀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예를 들어 오트마 리버트의 기타 연주곡 ‘Rain’을 들어보면 기타 피킹이 묵직한 힘이 실려 표현된다. 커다란 중역대 무게감과 풍부한 잔향 등 전통적인 브리티시 사운드를 연상케 하는 중역에 새로운 AMT 트위터의 고역이 약간 결이 다르면서도 시원하며 점도가 높다. 목제의 울림이 기저에 깔리는데 이런 부분이 전체적으로 굵고 호방한 느낌을 잃지 않게 한다.
Peter Gabriel - Solsbury hill
바닥을 구르는 저역은 묵직한 편이며 통 울림도 동반해 듣기 편안하면서도 나름의 한방이 있다. 예를 들어 피터 가브리엘의 ‘Solsbury hill’을 들어보면 피터의 목소리는 역시 와피데일 같은 스피커에서 듣는 맛이 남다르다. 울부짖는 보컬이 매우 호소력 짙은데 중역 유닛은 EVO 4.4에서 가장 빛나는 역할을 한다. AMT 트위터의 투입으로 기존의 와피데일과 상당히 다른 고역 음색을 펼쳐내는데 오히려 AMT보다는 중역의 표현력이 이 스피커를 살렸다. 오래간만에 피터 가브리엘의 1집을 재밌게 들었다.
Claudio Abbado, Berliner Philharmoniker
Dvorak: Symphony No. 9
EVO 4.4를 들으면서 마치 기존 와피데일이 엘락을 만난 것 같은 독특한 사운드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특성은 대편성 교향곡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어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작 9번 교향곡에서 나의 시선은 스피커 중앙 먼 곳을 향할 정도로 깊은 원근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각 악기들은 발 앞에 당도해 적극적으로 연주하며 각각의 음색을 어필했다. 마치 전통적인 목조식 건물 뒤로 보이는 지중해풍 에메랄드빛 바다 풍경 같은 이국적 이미지가 잠시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총평
여러 번의 인수, 합병을 거치며 현재는 IAG 그룹 안에 속해있지만 그들의 시작은 탄노이, 쿼드 등 영국 오디오 역사를 만들었던 쟁쟁한 하이파이 스피커 메이커였다. 이런 부침 속에서도 와피데일은 다이아몬드 시리즈 등을 통해 어떤 메이커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 대비 뛰어난 스피커를 만들어왔다. 하이파이 오디오의 대중화에 대한 기여는 설립자 길버트 브릭스의 철학에서 기인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혁신을 시작했다. EVO 4.4는 바로 그 명백한 증거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Specific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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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
3-way floorstanding speaker |
Enclosure Type |
bass reflex |
Bass Driver |
2x 6.5" (150mm) black woven Kevlar® cone |
Midrange Driver |
2" (50mm) soft dome |
Treble Driver |
55 x 80mm AMT |
Sensitivity (2.83V@1m) |
90 dB |
Recommended Amplifier Power |
30 - 200 W |
Peak SPL |
110 dB |
Nominal Impedance |
4Ω (compatible 8Ω) |
Minimum Impedance |
3.9Ω |
Frequency Response (+/- 3dB) |
38 Hz ~ 24 kHz |
Bass Extension (-6dB) |
35 Hz |
Wharfedale EVO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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