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AMD가 CES 2024에서 라이젠 8000G 시리즈를 공개했다. 내장 그래픽이 탑재된 데스크톱용 프로세서다. 7000번대 CPU와 일장일단이 나뉘는 새로운 선택지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AI 가속기를 탑재했다는 점인데, 아직 일반 소비자용 데스크톱으로 게임, 웹서핑, 문서 작업을 할 땐 "그런 게 있나?" 하면서 별로 체감되지 않는다. 향후 AI 관련 기능이 라이젠 마스터나 아드레날린에 추가된다면 기대해 볼 만할 듯. 이외에도 내장 그래픽이 상당히 뛰어나고 프로세서 자체 성능도 준수해, 그래픽카드 없이 저렴한 PC를 구성하려면 고려해 볼 만한 선택지로 급부상했다.
라이젠 8000G 시리즈는 8700G·8600G·8500G·8300G까지 네 종류로 나뉜다. 숫자가 클수록 성능이 높다. 이중 최상위 모델 '라이젠 7 8700G'를 써볼 기회가 생겼다. 분류상으로는 중급기에 속하는 '라이젠 7' 시리즈고, 기본 제공되는 쿨러도 LED 조명조차 안 들어간 레이스 스파이어다(라이젠 기쿨 5형제 중 아래에서 두 번째).
라이젠 AM5 소켓을 사용하는 CPU는 히트스프레더가 정사각형에서 퍼즐 모양으로 바뀌었다. 조립하면서 써멀구리스를 바를 때 매우 신경 쓰일 테다. 심지어 7000번대 CPU는 기판에 금속 부품이 보여 혹시라도 써멀이 닿을라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8000G 시리즈는 기판 부분이 텅 비어 써멀이 아래로 조금 새도 크게 불안하진 않았다.
8700G에 기본 제공 쿨러(레이스 스파이어), 클럭이나 팬 설정은 일절 건드리지 않은 기본값 그대로 실사용해 보면서 온도와 전력 소모량을 확인했다. 온도는 48~85℃로 꽤 높게 측정됐다. 8000G 시리즈의 오버클럭 잠재값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하니, 클럭을 올려 사용할 생각이라면 최소한 대장급 공랭 쿨러는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소모 전력은 스펙시트대로 최대 65W에 근접하게 측정됐다.
CPU-Z로 기본 사양을 확인하고 벤치마크를 실행해 봤다. 8코어 16스레드나 되다 보니 멀티 성능이 꽤 괜찮다. 전반적인 성능이 옆집에서 울트라 이름 달고 나온 중급 프로세서보다 약간 높다.
시네벤치 R23 테스트 결과 싱글코어 1752점, 멀티코어 15743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랭킹을 보면 슬슬 퇴역해야 할 국민 프로세서를 놓아주고 갈아탈 만한 제품을 고를 때 눈독 들일 만한 포지션이다.
라이젠 8700G에는 내장 그래픽이 있으므로 굳이 그래픽카드를 따로 살 필요가 없다. 고사양 게임을 고해상도 모니터로 플레이하려면 7000번대 고사양 프로세서와 그래픽카드를 사는 게 맞고, 8700G의 주 수요층은 내장 그래픽만 사용할 소비자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내장 그래픽을 사용하려면 아무래도 램(RAM)을 비롯한 일부 리소스를 그래픽 연산에 할당할 텐데, CPU 성능도 영향을 받을까? 8700G만 장착한 상태와 애즈락 라데온 RX 7600 XT 그래픽카드까지 장착한 상태로 각각 3D마크 CPU 프로파일 테스트를 진행해 봤다. 결과는 그래픽카드를 장착한 쪽이 소폭 높은 성능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지 벤치마크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쨌든 영향이 있긴 한 모양이다.
PCIe 5.0x4 슬롯 SSD 속도 테스트 결과(왼쪽 : 7500F, 오른쪽 : 8700G)
라이젠 8000G 시리즈는 모두 PCIe 4 버전까지만 지원한다. 메인보드가 PCIe 5.0 SSD를 지원하더라도 이론상 성능은 절반으로 떨어진다. 실제로 PCIe 5.0x4 SSD의 속도를 비교 테스트한 결과, PCIe 5 버전을 지원하는 라이젠 7500F를 장착한 상태에서는 SSD 최고 사양에 준하는 속도가 나온 반면 라이젠 8700G를 장착한 상태에서는 PCIe 4 최상급 모델 정도로 속도가 떨어졌다.
PCIe 4.0x4 슬롯 SSD 속도 테스트 결과(왼쪽 : 7500F, 오른쪽 : 8700G)
PCIe 4.0x2 슬롯 SSD 속도 테스트 결과(왼쪽 : 7500F, 오른쪽 : 8700G)
다행히 PCIe 4 SSD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따라서 PCIe 4.0x4 SSD를 메인 저장 장치로 사용한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아직 PCIe 5 SSD 가격이 비싸 선뜻 구매하기 어렵다는 점, PCIe 4 SSD 속도도 충분히 빨라 업그레이드 필요성이 비교적 떨어진다는 점도 8700G의 '면책 사항'으로 작용할 듯하다.
PCIe 4.0x8 그래픽카드 성능 테스트 결과(위 : 7500F, 아래 : 8700G)
내장 그래픽 성능이 준수한 대신일까. 8000G 시리즈는 그래픽카드와 함께 사용하기 부적합한 구조를 하고 있다. 8700G와 8600G는 외장 그래픽에 PCIe 레인을 8개만 할당할 수 있으며, 8500G와 8300G는 고작 4레인 밖에 할당하지 못한다. 즉, 8700G와 8600G는 PCIe 4.0x8 이하, 8500G와 8300G는 PCIe 4.0x4(레인) 이하 그래픽카드를 사용해야 성능 손실이 없다.
웬만한 중급 그래픽카드 중에도 8레인만 사용하는 제품이 많다 보니 8700G와 8600G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번에 리뷰한 애즈락 라데온 RX 7600 XT도 PCIe 4.0x8 그래픽카드라 성능 손실이 없었다. 오히려 8700G와 함께 사용했을 때 점수가 소폭 높게 나왔을 정도다. 단, 4레인 짜리 그래픽카드는 없거나 구형, 저사양 제품 위주이므로 8500G와 8300G에는 그래픽카드를 추가 장착할 생각을 접는 게 마음 편하다.
그렇다면 내장 그래픽 성능은 어떨까. 8700G에는 라데온 780M 그래픽이 탑재됐으며, WUQHD 144Hz 모니터에서 3D마크 타임 스파이(Time Spy) 벤치마크를 실행한 결과 3166점으로 집계됐다. AAA 게임을 QHD 이상 해상도로 플레이하긴 어렵지만, FHD 모니터에서는 주사율 방어가 수월한 수준이다. 내장 그래픽 치고 상당히 괜찮다.
라이젠 8000G 시리즈는 그래픽카드 없는 미니 PC나 미니타워 데스크톱을 구성하려는 소비자에게 적합한 CPU다. 고사양 게임도 FHD 게이밍 모니터까지는 무난히 버텨준다. 8700G나 8600G의 내장 그래픽 사양이 좀 아쉽다면 PCIe 4.0x8 그래픽카드를 하나 추가해 해결할 수 있다. 자체 성능이 준수하고 미래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는 프로세서다. 하지만 가격이 빌런이다. 프로세서 성능은 라이젠 7700과 엇비슷한데, 44만 원이라는 가격을 보면 열던 지갑도 다시 닫게 된다. 급한 게 아니라면, 일단 30만 원대 후반까지는 '존버'해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