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최됐던 컴퓨텍스 2016의 가장 큰 이슈는 VR이었다. HTC와 오큘러스가 각각 ‘바이브’와 ‘리프트’를 2016년 4월 정식 출시했고, PC 하드웨어 업체들은 저마다 두 HMD를 적게는 한두 대, 많게는 10여 대씩 부스에 구비하고 관람객을 맞이했다. VR 기기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았지만,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으로 관람객과 참가 기업 모두가 즐거웠다.
VR 출시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됐던 콘텐츠 부재의 문제는 올해 컴퓨텍스에서 슬그머니 부각됐다. 작년보다 많지는 않아도 대부분의 프로세서와 보드 제조사들은 VR 기기를 부스에 준비했다. 지난 박람회보다 향상된 PC 시스템 성능과 함께 자체 콘텐츠를 다양하게 준비했고,
결과적으로 2017년에는 작년보다 약 1% 증가한 41,378명의 해외 관람객이 타이페이를 방문했다. 대만무역협회가 자신있게 준비한 이노벡스 관에는 작년보다 36% 많은 14,977명이 방문했다. 이렇게 보면 개최 전까지도 나오던 ‘침체기’ 얘기는 쏙 들어갈 법도 한데, 기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TWTC와 난강 홀, 국제컨벤션센터를 이틀간 하루 3만 걸음씩 걸어다녔지만, 뭔가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년보다 VR 기기가 많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오히려 VR 관련 어트랙션은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모 부스의 모델은 폴댄스까지 선보이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데도 약간의 허전함은 돌아오는 항공기에 탑승할 때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데스크톱 프로세서 양대 산맥, 부스는 어디에
컴퓨텍스는 어쨌든 PC 산업 박람회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등장으로 모바일 산업에 그 파이를 많이 내주긴 했지만, 그래도 아시아 최대의 ICT 박람회다. CES가 2015년부터 아시아에서도 개최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규모 면에선 아직 컴퓨텍스가 우위다. 하지만 PC 하드웨어의 비중이 가장 큰 박람회인 만큼, 적어도 CPU 업체는 관람객들에게 성능 체험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두 기업 모두 컴퓨텍스에 부스를 마련할 생각은 없나보다.
5월 31일 e21 포럼의 인텔 세션에서 공개된 '스카이레이크-X'와 '카비레이크-X' 프로세서.
CPU 분야의 양대 산맥인 인텔과 AMD는, 올해에도 타이페이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았다. e21 포럼과 더불어 양사 모두 자체 신제품 발표회를 갖긴 했지만, 국제무역센터와 컨벤션센터 어디에도 별도로 부스를 차리지는 않았다. 인텔이 발표한 2개 제품 라인업 중 최고 성능을 가진 ‘i9-7980XE’는 무려 18코어 36스레드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정작 코어 당 동작 속도나 PCIe 레인, L3 캐시메모리 등의 자세한 스펙은 공개되지 않았고, 출시일 역시 2018년으로 밝혀졌다. 이는 경쟁사인 AMD의 고성능 라인업 ‘스레드리퍼’의 공개와 출시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인 것으로 보인다.
AMD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공개된 라이젠 모바일 시리즈와 스레드리퍼 시리즈. 특히 고성능 모델 스레드리퍼 시리즈는 프로세서의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AMD 역시 모 호텔에서 별도로 프레스 컨퍼런스를 진행하며 새로운 라이젠 모바일 시리즈 ‘레이븐리지’를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AMD 프로세서의 비중은 데스크톱은 물론 노트북에서도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라이젠 시리즈로 하여금 예전의 양강 구도를 재건하려 하는 AMD는, 라이젠 모바일 시리즈로 현재의 상승세를 더 가파르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데스크톱 프로세서의 상위 모델 ‘스레드리퍼’도 공개됐다. 예상을 깨고 ‘9’ 넘버링을 사용하지 않은 스레드리퍼는, 손바닥에 꽉 찰 만큼의 크기로 인텔의 익스트림 시리즈 CPU보다 크다. 최고 성능 제품은 16코어 32스레드로 구성된다고 알려졌다. 새로운 X399 칩셋 메인보드와의 조합을 현장에서 시연해볼 수 있었다면 아마 AMD가 올해 컴퓨텍스 최고의 부스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스레드리퍼 시리즈는 오는 여름에 4~6개 라인업으로 출시될 예정이다.
그나마 실물을 볼 수 있었던 X299/X399 칩셋 메인보드
인텔의 6, 7세대 X 시리즈 프로세서의 공개와 함께, 메인보드 제조사들은 일제히 해당 프로세서를 지원하는 LGA2066 칩셋의 메인보드, 그리고 AMD 스레드리퍼를 지원하는 X399 칩셋 메인보드를 공개했다. ‘차세대 라인업’이라 말할 만한 제품의 공개가 별로 없는 와중에 그나마 PC의 중심인 CPU 신제품이 양사 모두에서 발표된 것이 다행인 듯하다.
인텔의 두 X 시리즈는 핀이 55개 늘어난 정도로, 2011-V3와 비슷한 크기다. 하지만 AMD는 CPU의 면적만 봐도 2배 가까이 늘어, 메인보드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상당히 넓어졌다. 직접 장착을 해봐야 알겠지만, CPU 쿨러가 양쪽에 배치된 RAM 슬롯과 간섭이 있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손에 쥔 스레드리퍼의 크기를 봤을 때, 기존의 쿨러들은 모두 소용이 없고 스레드리퍼 전용 대형 쿨러가 필요해 보인다. 스레드리퍼가 출시될 즈음 써멀테이크, 쿨러마스터 등 CPU 쿨러 제조사들의 신제품 발표가 기대된다.
6, 7세대 X 시리즈 프로세서의 공개와 함께 메인보드 제조사의 X299 칩셋 메인보드도 볼 수 있었다.
함께 공개된 X399 시리즈 메인보드 신제품들. 아직 출시 전이라서 디자인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제품 공개와 출시 순서로 봤을 때 이것이 최종 디자인일 확률이 높다. 프로세서의 크기만큼 메인보드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많이 넓어졌다.
식은 GPU, GTX1080 Ti와 RX580
PC의 중요한 하드웨어 중 하나인 그래픽카드 역시 새로운 이슈가 없었다. 컴퓨텍스보다 빠른 4월에 엔비디아는 지포스 GTX1080 Ti를, AMD는 자사의 새 프로세서 라이젠 시리즈와 함께 RX500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미 전 세계에서 판매 중이었고, 아직 발표되지 않은 제품은 하위 라인업인 GTX 1030이나 라데온 RX540 정도였다.(각 라인업의 최상위 모델이 공개된 시점에서 하위 모델을 딱히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다) AMD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라데온 베가 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정보 공개를 숨기면서, 새로운 그래픽카드에 대한 기대가 약간의 실망으로 돌아온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이수스와 조텍의 VGA 도킹 스테이션이 그나마 그래픽카드를 좋아하는 기자에게 위안이 돼줬다. 두 제품 모두 단독 외장 VGA를 노트북에 연결해 성능 향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카드 도킹 스테이션이다. 노트북마다 이를 지원하는 환경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마 노트북의 성능이 더 가벼워지고, 집에서 사용할 때의 부족한 성능을 채워주는 보조 하드웨어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그래도 기자는 데스크톱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