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PC게임을 매우 좋아해서 틈만 나면 새로운 게임을 하기 바빴죠. 하지만 용돈이 넉넉하지 않아 다양하게 출시되는 게임을 전부 구매할 수 없어 매우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가게에서 판매하는 CD보다 가격이 절반 이상 저렴한 CD를 발견했습니다.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고 별도의 케이스도 없었지만, 게임 내용은 그림이 그려진 CD와 완전히 똑같아서 소년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내 그 CD에 깃든 무서운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 CD는 바로 게임업계의 눈물이 깃든, ‘백업CD’였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아…끼야야악-!
바야흐로 1998년, 국산 패키지게임의 춘추전국시대

▲ 1998년 6월 PC챔프의 표지는 '파이널 판타지 7'이 차지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떡졌군요 허허허 물론 다른 곳도 어색하지만
PC챔프 1998년 6월호는 반 이상이 광고 지면일 만큼 다양한 게임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 중 반 이상은 국내에서 개발한 PC 패키지게임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이름을 날리던 개발사들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소프트맥스나 손노리, 판타그램 등이 앞다투어 독자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가진 명작 IP들을 출시했습니다.
포가튼사가를 제작했던 판타그램은 해외 시장을 겨냥한 게임을 제작하고 있다. 현재 15%정도 제작된 이 게임은 판타그램이 시도하는 새로운 장르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킹덤 언더 파이어(Kingdom Under fire)’이다. 킹덤 언더 파이어는 국내 내수시장보다는 미국시장을 겨냥해 제작하고 있으며 오는 E3에 판타그램의 자체 부스를 통해 소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판타그램은 이번 E3에 킹덤 언더 파이어 외에도 포가튼사가, 바람의 유산 등 4개의 작품을 미국시장에 소개할 예정이며 이번 E3를 통해 유럽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 최대 게임쇼인 E3에 개별 부스를 낼 정도로 한국 패키지게임의 저력은 꽤 강한 편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게임도 소프트맥스의 ‘창세기전’ 시리즈였고, 손노리의 ‘화이트데이’는 한국 게임 사상 희대의 명작 공포게임으로 회자될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났습니다.
▲ 개발중인 기대작 리스트, 10개 중에 6개가 순수 국내 제작이라니!
▲ 아... 네...
▲ '이스' 자체는 일본 게임입니다만,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게임 CF라니.. 전성기였군요
‘어쩐지 저녁’과 ‘머털도사’ 등 인기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개발된 게임은 물론, 연애 시뮬레이션게임이나 RPG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가 바로, 국산 패키지게임의 춘추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네요. 심지어 독자인기순위에서도 국산게임인 ‘삼국지천명’이 당당히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순위 |
게임명 |
장르 |
제작사 |
득점 |
1위 |
삼국지천명 |
SS |
동서게임채널 |
780점 |
2위 |
서풍의 광시곡 |
RPG |
소프트맥스 |
530점 |
3위 |
스타크래프트 |
SS |
블리자드 |
502점 |
4위 |
장보고전 |
SS |
트리거소프트 |
293점 |
하지만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이죠. 통신 판매에 전문 퍼블리싱 회사까지 세울 정도로 파이가 커진 패키지게임업계는 순조롭던 항로에서 암초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름 하야, 바로 ‘불법복제’.
▲ 잡지 한면에 광고를 게재할 정도로 통신판매 시장도 컸었는데
왜! 나니! Why!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불법복제 게임
알록달록한 색으로 꾸며진 광고 지면들 사이에서 강렬한 흑백대비를 자랑하며 존재감을 빛낸 페이지가 있었으니, 바로 ‘사과문’입니다. 내용인즉, 정식 발매된 PC패키지 게임의 실행 파일이 무단으로 온라인(당시에는 하이텔, 새롬데이터맨 등) 게시판에 업로드 된 것을 제재하지 않아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네요.
▲ 블루스크린이 떠오르는 사과문이네요
▲ 6월호에만 2개가 게재됐으니, 실제로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폐사는 최근 전국 곳곳에서 게임소프트웨어가 백업CD라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만들어져 배포하거나 각종 통신망 등을 통해 제공하는 일부 악덕업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것을 약속드리며, 차후로는 절대로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
하지만 사과문 뿐이고, 실질적인 대응이나 피해보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 PC기반으로 출시된 패키지게임들은 CD 몇 장에 게임의 모든 콘텐츠가 들어 있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를 봐도 꽤 장편으로 불리는 패키지게임들도 CD 서너 장 정도에 모든 내용이 집약되어 있었고, 네트워크망을 이용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와 같은 온라인 콘텐츠들은 다소 비중이 적은 편이였죠.
▲ 독자 선물로도 등장한 모뎀
조금만 써도 무서운 고지서가 날아오는데 온라인 게임이 성행할 수가 없었겠죠
그러다 보니 게임 자체의 판매량이 떨어지는 것은 매출 하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개발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인기가 많은 게임일수록 불법복제 파일이 만연했고 게임을 해 본 유저의 수에 비해 판매량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상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태를 막고자 CD에 고유 코드를 부여하는 시리얼 넘버가 도입됐으나, 그것조차 국내 PC 패키지게임 업계의 쇠락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독자 Q&A 코너에 살풋 비치는 의견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듯 하네요.
Q: 국산 축구게임은 어느 정도이고 피파 98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까? A: 피파 98같은 게임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국내 게이머들이 정품만을 구입하고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에 의욕을 얻어 개발기술을 발전시키면 그렇게 되겠죠. |
‘불법복제’, 지우지 못한 상처
좋지 않은 곳을 스친 ‘불법복제’ 바람은 한국 패키지게임업계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겼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 개발된 패키지게임은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죠.
그 전설은 이후에도 이어져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게임’이나 ‘음악’과 같은 무형의 콘텐츠에 대한 재산권 보호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 무형 콘텐츠의 새로운 소비패턴을 제시한 '레진코믹스'(좌), 밸브의 스팀(우)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형 콘텐츠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습니다. 일례로 ‘레진코믹스’는 모바일 앱을 런칭했습니다. 해당 앱은 연재 웹툰을 유료로 구매하면 언제든지 해당 작품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데, 오픈 당시부터 정부 지원을 받아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더불어 온라인 게임 유통의 대부로 우뚝 선 밸브의 스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하지 않고서도 대형 게임업체부터 인디개발사의 게임까지 편리하게 즐길 수 있죠.
이런 모습들은 무형 콘텐츠를 대하는 자세가 변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생각의 전환이 세상을 바꾸듯, 작은 변화들이 과거 불법복제의 아픈 상처를 지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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