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의 대형 패밀리 SUV EV9 GT를 시승했다. 전기모터와 배터리 용량이 브랜드 최대다. 그런 만큼 성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내연기관 시대의 고성능보다는 릴렉스 시트 등으로 인해 안락성과 질감이 더 돋보인다. 당연히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개발한 모델이다. 그런 만큼 크기가 강조되어 있다. 특히 같은 크기의 차체에서 더 넓은 실내 공간을 만들어 내는 실력은 여전하다. 기아 EV9 GT의 시승 느낌을 적는다.
글 / 채영석 (글로벌오토뉴스 국장)
일본 자동차 애널리스트 나카니시 다카키는 그의 저서 ‘토요타 EV 전쟁’(2024년, 시크릿 하우스 간)에서 ‘아이오닉으로 토요타를 격침한 현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략을 극찬했다. E-GMP를 베이스로 현대차와 기아의 라인업을 확대하고, 더 나아가 차세대 통합 모듈러 아키텍처(IMA)로 차종별 전용 플랫폼도 개발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무엇보다 2023 뉴욕 국제오토쇼에서 일본차의 존재감이 약한 반면, 한국차는 넓은 면적을 제공했음에도 자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했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세계 올해의 차 7개 부문에서 5개 부문을 수상했다. 2022년에는 현대 아이오닉 5가, 2023년에는 아이오닉 6가, 2024년에는 기아 EV9 등이 현대차그룹 모델로 3년 연속 올해의 차에 선정되며 기세를 올렸다.

나카니시는 ‘일본만 모르는 현대의 실력’이라는 부제 아래, 2000년대 초반 상승세를 타다가 꺾였던 현대차가 이제는 일본차를 능가할 수 있는 존재로 부상했다고 강조했다.
그런 경쟁은 또 다른 업체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중국 BYD가 전체 판매 대수에서 테슬라를 능가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2003년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BYD가 이처럼 급상승하는 배경은 가솔린차보다 더 저렴한 배터리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차를 출시한 것이다.
BYD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3.0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술 DM-I, 블레이드 배터리 등을 통해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자회사 핀드림스를 통해 셀 투 바디 구조를 채택해 배터리 셀 탑재 공간 이용률을 기존 대비 50% 늘렸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테슬라와 마찬가지로 수직 통합 전략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타이어와 유리를 제외하고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한다는 전략이다. 1980년 자체 생산 부품 70%, 외부 조달 30%였던 크라이슬러의 조달 구조를 리 아이아코카가 30% 대 70%로 바꾼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전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BYD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에서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모터와 감속기, 인버터, 컨트롤러, 배터리 관리 시스템, DC-DC 컨버터, 충전기, 전선 단자 등 8개의 부품을 하나의 하우징에 통합한 ‘8-in-1 시스템(X in 1)’을 통해 공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그로 인해 보닛 아래쪽에 넉넉한 공간이 있지만 프렁크를 만들지 않은 것도 사고방식의 차이이다. 기아 EV3는 프렁크를 위한 공간이 없다. 즉, 중국의 낮은 인건비가 중국차 가격 경쟁력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화하고 있다. 기존에는 자동차의 본질이 달리고, 돌고, 멈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섀시와 파워트레인을 중심으로 한 성능이 중요했다. 하지만 BYD 등 중국 제조사들은 테슬라처럼 소프트웨어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다. 이제는 ‘생각하고 멈춘다’는 개념으로 본질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BYD와 한국차를 비교할 때 여전히 섀시를 중심에 둔다. 어느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고, 그에 따른 제품 평가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오늘 시승한 기아 EV9은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평가하면 분명 중국차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우수하다.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하고 있어, 당장 큰 차가 중심인 미국 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본다면 테슬라나 중국차에 앞선다고 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대세가 될 미래에는 이러한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인공지능은 전력 문제와 데이터 센터 등 여러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중국은 연구개발 비용을 정부가 감당한다는 점에서 선진국과 다르다. 이러한 요소도 중국차의 가격 경쟁력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한국은 오히려 연구개발을 등한시하는 분위기다. 이제는 제품 경쟁력을 개별 업체가 독자적으로 강화할 수 없는 시대다.
기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기차 포트폴리오를 적절하게 구축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는 EV5의 판매 호조로 2014년 정점이었던 시기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기아 EV9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한 기아의 두 번째 모델이다.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중대형 모델부터 시작했다. 새로운 플래그십 모델이자 양산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선보이고 있는 3열 대형 전기 SUV다. 플래그십 모델다운 외관 디자인과 품질을 강조하고 있다.
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패밀리카를 표방한다. 트럭의 나라 미국에서는 패밀리카가 적절한 포지션이다. 전면에서는 GT만의 그래픽을 채택했다. 여전히 램프 유닛이 사선의 주간 주행등과 함께 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램프 유닛의 처리는 내연기관차 모하비에서 처음 선보였던, 그릴 쪽으로 파고든 형상과 유사하다. 범퍼를 중심으로 에어 인테이크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기차 초기와 달리, 레거시 제조사들이 테슬라와는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측면에서는 21인치 휠 안쪽에 연두색 브레이크 캘리퍼로 포인트를 주고 있다. 후면에서는 전면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테일램프 덕분에 기아의 아이덴티티가 더욱 두드러진다.

인테리어는 3열 SUV라는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그러나 GT 전용 블랙 테마를 적용해 클러스터와 가상 변속 시스템 등에서 차별화했다. 스티어링 휠에는 연두색 바탕의 GT 로고와 림 위쪽의 엑센트가 돋보인다. 디지털 사이드 미러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정확한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시트도 풀 버킷 타입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스포츠 전용 모델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연두색 라인을 시트 가운데 새겨 엑센트로 사용하고 있다. 붉은색이 주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디지털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감성적인 면을 살려내는 아날로그식 차만들기의 고집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2열 시트는 원터치 릴렉션 기능과 마사지 기능이 기본이다. 이 시대 차만들기의 고민을 보여 준다. 뒤쪽에 무드램프를 채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EV9 GT는 100W 고속 충전 USB C타입 단자, 아이 페달(i-PEDAL) 3.0, 디지털 사이드•센터 미러, 증강현실 내비게이션, 빌트인캠 2, 기아 디지털 키 2 등이 채용되어 있다. 아이페달은 사용할수록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GT 전용 클러스터 테마, 퍼포먼스 타이머 등이 있다. 대형 SUV에 꼭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드는 장비다.

배터리는 축전용량 99.8kWh로 대형차라는 점을 과시하고 있다. 기아 전기차 라인업 중 가장 긴 501km의 1회 충전 주행거리가 특징이다. 기본모델의 트림을 에어와 어스 두 가지로 운영하며 각 트림에서 2WD와 4WD의 구동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시승차인 EV9 GT는 최대출력 374kW(509마력), 최대토크 740Nm(75.5 kgf·m)를 발휘한다.정지 상태에서 100km/h 도달 4.5초라는 수치로 이 차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1회 충전 시 408km로 약간 짧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정도의 고성능 모델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가공할 성능’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포츠 세단이라는 장르롤 들먹이며 칭송했었다. 그 성능을 프루빙 그라운드 등에서 즐기기도 했었다. 독일 아우토반에서 끝까지 달려 보며 흥분한 적도 아주 많다.

지금도 그런 차를 타면 그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그만큼 중독에 가까운 것이 자동차다. 20세기에 자동차회사들은 그렇게 자동차 사용자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그것이 수익성에서 꽃을 피운 것은 WTO 가입으로 인한 중국시장의 개방이었다.
그 중국이 20년 만에 자동차의 본질을 바꾸고 있다. 시작은 테슬라 등 미국이 먼저 했으나 지금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다. 그것을 스마트카라는 용어로 통칭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EV9은 앞선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레거시 업체들이 그렇듯이 성능을 우선하는 마케팅을 한다. 절대 수치를 강조하며 주행성을 강조한다.
EV6에서는 그것이 힘을 발했고 현대 아이오닉 시리즈와 함께 현대차그룹 전기차의 존재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아이 페달 3.0을 비롯해 디지털 사이드미러, 증강현실 내비게이션 등 디지털화를 통해 자동차의 본질을 바꾸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형 패밀리카에 고성능 버전을 라인업하고 있는 것이 현재 시장 상황을 말해준다.

워낙에 배터리 전기차들의 강력한 토크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한 중량 대비 출력, 토크 등으로 어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다. GT인데도 EV9은 그 고성능보다는 릴랙스 시트 등으로 프리미엄성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 안락성을 매끄러운 주행성과 조화하는 시대다. 최고속도가 한정된 전기차에서 느끼는 것은 그런 속도감보다는 사용자 경험이다. 다른 브랜드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점에서는 흔히 말하는 킬러 기능이 없다.
그럼에도 GT라인은 384마력, GT는 508마력으로 내연기관 방식의 서열 정리를 하고 있다.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ECS)을 채용해 승차감과 핸들링을 높이고 있다. 전자식 차동 제한장치(e-LSD)를 채용해 좌우 바퀴 구동력을 능동적으로 제어한 것도 처음으로 채용됐다. 이것을 체감하는 운전자들에게는 좋은 장비일 것이다.

최근 시승기를 쓰면서 느낀 것은 여전히 한국의 자동차 시승기들은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차이점을 확인하기도 한다. 다만 앞으로도 그런 흐름이 지속될지 궁금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용차 경험을 비롯해 소프트웨어 정의 자동차 등 실질적으로 사용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새로운 본질을 찾는데 시승기를 집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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