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90년대는 물론 심지어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어보다는 영어나 일본어로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것이 익숙했던 게이머들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아무래도 국내 게임 시장은 온라인 게임 중심의 시장이었기에 일부 마니아들이 즐기는 작은 콘솔 게임 시장에서 수익성을 기대하기 힘들어 비디오 게임 회사들도 현지화 작업에 비용을 투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한글화, 정확하게는 자막이나 음성의 한국어화는 비디오 게임의 세일즈 포인트가 됐습니다. 이번에 어떤 게임 자막이 한국어화 출시된다는 것이 게임 웹진들의 주요 기삿거리 되기도 했고, 이런 소식에 그 게임의 팬들은 열광하며 게임을 기다려 왔죠.
그런데 한국어화 소식으로 팬들을 잔뜩 기대하게 만들고, 막상 한국어는 쏙 빠져 국내 게이머들에게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게임들이 있었죠.
한국어화로 게이머들을 들뜨게 했다가, 게이머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대표 작품들을 함께 살펴보시죠.
때는 2006년, 국내에서 마블의 인기가 마블 유니버스 영화로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된 지금만은 못했던 시절입니다. 당시 스파이더맨 게임이나 엑스맨 게임 등을 선사했던 액티비전은 신작 '마블 얼티밋 얼라이언스'라는 게임을 준비했죠.

이 게임은 액션 RPG로, 당시 마블의 유명한 캐릭터가 다수 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 울버린, 토르, 고스트 라이더 등 거의 30명에 육박하는 사용 가능한 캐릭터와 다양한 코스튬을 준비했고, 팀 구성을 통한 전략적인 재미도 마련했죠. 마블 코믹스의 팬이라면 당연히 반길 만한 게임이었습니다.
당시 액티비전 코리아는 '마블 얼티밋 얼라이언스'를 현지화 작업을 진행해 플레이스테이션 3, 엑스박스 360 등 출시 예정인 모든 플랫폼에서 한국어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알렸죠. 하지만 게임은 발매가 지연되며, 2006년 연말 국내 시장에 출시되지 못했고 한국어도 빠지고 말았는데요.
한국어 미지원 관련해서는 게임에서 영어나 숫자를 표현하는 1바이트 문자와 달리, 한국어나 중국어 같은 2바이트 문자를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 이유로 알려졌습니다. 지금은 닌텐도 스위치로 출시된 3편을 한국어로 즐길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14년 10월 엑스박스 원으로 발매된 '프로젝트 스파크'는 이용자가 직접 게임 환경을 구성해 나가는 게임입니다. 이용자가 그림을 그리듯이 새로운 지형, 생명체, 소품 등을 창조하여 나만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구성된 어드벤처 게임이죠. 다른 게이머가 만든 스토리를 공유하고, 각색하여 즐길 수도 있는 독특한 상호 작용을 재미 요소로 삼았습니다.
게임은 코딩을 몰라도 나만의 게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작품이기에 게이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죠.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출시에 앞서 '프로젝트 스파크'를 한국어로 발매한다고 알리며 예약 판매를 진행했는데요. 막상 출시 당일에 영문 자막 버전으로 출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국어화를 믿고 구매한 이들은 황당한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한국 MS는 사전 예약 구매를 진행한 이용자들에게 게임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히면서 사건을 수습하려고 했는데요. '프로젝트 스파크'보다 약 한 달 전 출시된 엑스박스 진영의 대표작 '포르자 호라이즌 2'에서 한국어가 제외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이 보여 게이머들의 분노는 더 높아져만 갔죠.
당시 엑스박스 원 발매가 약 1년도 안 된 초기였기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해도 부족한 시점이었는데요. 당시 이용자들은 MS가 보여주는 모습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국어화 '통수'는 2025년에도 이어졌습니다. 2월 14일 얼리 액세스 론칭 이후 2월 19일 정식 출시될 예정이었던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신작 액션 RPG '어바우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엑스박스의 퍼스트파티 개발사이자 RPG 명가의 작품인 만큼 팬들의 기대를 받아왔죠.

그런데 자막 한국어 지원을 밝혔던 기존의 계획과 달리, 출시를 앞두고 단연 한국어 자막은 게임 출시 이후에나 지원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품질이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한국 게이머들은 하루아침에 한국어 자막을 잃어버렸고, 출시 이후 두 달이 다가오는 시점에도 한국어 자막 업데이트는 이뤄지지 않았죠.
옵시디언은 오는 8월에 한국어를 추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팬들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죠.
이외에도 황당한 이유로 한국어화가 불발된 일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슈퍼맨과 배트맨 등 DC 코믹스 캐릭터가 대결을 펼치는 워너 브라더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대전 격투 게임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입니다. 일본에서 유통되는 아시아 버전에는 한국어가 있지만, 막상 국내에서 정발된 버전은 한국어가 빠져버린 어이가 없는 사건이죠.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의 아시아 지역 버전 데모에서는 초반부 스토리의 한국어 자막과 스킬 소개 등도 한국어로 되어 있었는데요. 한국에 게임을 유통한 인플레이인터랙티브는 아시아 버전이 아니라 한국어가 없는 북미 버전을 들여와 정식 발매했습니다. 덕분에 한국 정발 버전에는 한국어가 쏙 빠졌죠.
당시 아시아 버전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 한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며 수습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배트맨: 아캄 시티' PC판 발매 시 한국어 데이터가 있음에도 폰트를 삭제해 비공식 패치를 해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던 경력이 있던 인플레이인터랙티브이기에 게이머들의 불만은 배가됐죠.

이 외에도 한국어 지원을 공식으로 밝혔지만, 게임 내용상의 문제로 정식 발매 하루 전에 발매 중단해 한국어는 물론 게임도 같이 날아간 '용과 같이 6'나, 한국어 지원을 밝혀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등급 분류 거부로 정식 발매가 무산되며 한국어화도 날아간 '뉴 단간론파 V3'와 같은 사례도 존재합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어화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많은 종사자의 노력과 성숙한 게이머들의 참여에 힘입어 국내 콘솔 게임 시장 규모도 1조 원을 넘는 등 만만치 않은 시장으로 성장했고, 영영 한국어화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슈퍼로봇대전' 시리즈나 '모모타로 전철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에서도 국룰!' 같은 게임도 한국어로 즐기고 있습니다. 새삼 시장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는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