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샌드폴엔터테인먼트의 신작 클레르 옵스큐르 : 33원정대(이하 33원정대)가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클래식한 일본식 턴제 전투 RPG이다보니, 요즘 트렌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게임이지만, 완성도가 너무 뛰어나다보니 GTA6가 내년으로 밀리면서 무주공산이 된 올해 GOTY의 강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습니다.
개발 인원이 많지 않은 프랑스 신생 개발사가, 요즘 트렌드가 아닌 클래식한 게임들 들고 나와서, 대형 게임사들의 신작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니, 정말 낭만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33원정대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매력적인 세계관과 캐릭터, 그리고 세계관을 아름답게 그려낸 매력적인 그래픽이 잘 조화를 이룬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시간 액션과 비교했을 때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던 턴제 전투에 회피와 패링 등을 더하면서 박진감있는 턴제 전투로 진화시킨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실제로 JRPG 턴제 전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퀘어에닉스의 파이널판타지조차도 최신작에서 실시간 액션으로 변경하는 모습을 보였다보니, 제대로 만든 턴제 전투에 목말라 있던 게이머들의 감성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지요. 턴제 전투 RPG라고 하면 실시간 액션이 버거운 아저씨들을 위한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제대로 만들면 실시간 액션 못지 않게 박진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결과라서 더욱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33원정대가 이용자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물을 선보인 덕분에, 일부 커뮤니티에서 기존의 턴제 RPG들은 반성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전에도 턴제 전투 RPG는 차근차근 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초반부만 해보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 한턴씩 공격을 주고 받는 지루한 장르라고 모든 게임을 싸잡아서 매도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어찌보면 여러 게임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차곡 차곡 쌓여서 33원정대라는 결과물이 나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초창기 게임들은 바둑, 장기, TRPG에서 시작됐고, 당시에는 실시간 전투를 구현할 정도로 기술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한턴씩 공격을 주고받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구현됐습니다. 초창기 드래곤퀘스트나 파이널판타지 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전투는 선공권을 가진 사람이 무조건 유리하고,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아질수록 전투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게임사들은 다양한 변수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의 뒤를 먼저 공격하면 백어택이 발생해서 우선 공격권을 가져가게 되거나, 캐릭터 능력치에 민첩성, 속도 등을 넣어서 능력치가 높은 캐릭터가 먼저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식입니다.
나중에는 한쪽 공격이 모두 완료된 후에 상대의 턴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군과 적의 턴이 동시에 진행되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다들 아시는 파이널판타지의 ATB. 즉 액티브 타임 배틀입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아군과 적의 턴이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아군의 행동 순서뿐만 아니라 적의 행동 순서까지 고려해서 공격 순서를 결정해야해서, 전략적인 재미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다음 행동을 앞두고 있는 적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적의 공격을 받지 않고, 아군의 공격 기회가 늘어날 수 있으니까요.

최근 리마스터가 출시돼 화제가 된 루나 실버 스토리나 영웅전설 가가브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턴제 전투와 실시간과 자동 전투를 섞는 시도를 선보여 화제가 됐습니다. 전투에 돌입했을 때 해야 할 행동들을 미리 지정해두면 전투에서 자동적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위기 상황일 때 캐릭터를 선택해서 지시를 내리면 해당 행동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죠.
당시에는 멍청한 AI 때문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난 2023년 GOTY 5관왕을 석권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발더스게이트3가 이 방식을 진화시킨 결과물이니, 헛된 시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소 정적일 수 밖에 없는 턴제 전투에 액션감을 넣으려는 시도도 꾸준히 있었습니다. 과거 마리오RPG의 경우에는 타이밍에 맞춰서 공격 버튼을 누르면 더 강력한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화제가 됐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과거 PS2로 나왔던 아루제의 쉐도우 하츠라는 게임은 타이밍에 맞춰서 버튼을 눌러야만 공격이 성공하는 저니먼트 링 시스템으로 관심을 모았습니다. 국내 팬들에게는 이 방식을 따라해서 만들었던 마그나카르타가 더 익숙할 것 같네요.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적의 턴을 가져오는 형태를 구현한 게임들도 있습니다. 페르소나 시리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여신전생 시리즈의 경우에는 상대의 약점이 되는 속성을 공격하면 무력화되면서 공격 기회를 날리게 되는 방식으로 전략적인 재미를 더했습니다. 무작정 한 대씩 주고 받으면 전투가 지루해질 수 밖에 없으니, 적이 아예 공격을 못하도록 만드는 전략적인 재미를 추구한 것이죠.

파이널판타지 시리즈 중에서 턴제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파이널판타지13의 경우에도 진화된 ATB 시스템이라고 해서, 턴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재미를 선보였습니다. 기존에는 ATB 게이지가 모두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5개로 세분화되어 있는 ATB 게이지에 맞춰서 여러 행동을 세팅해둔 후 상황에 따라 공격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ATB 게이지가 모두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라도, 코스트가 높지 않은 공격을 먼저 발동시켜 적의 공격을 끊거나, 동료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서 공격을 성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전투를 즐길 수 있으며, 적의 체인 게이지를 모두 채워 브레이크 상태를 만들면 적이 무력화되어 더 많은 대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펄스의 팔씨와 접촉하여 르씨가 되는 황당한 스토리 때문에 평가 절하됐지만, 전투 시스템의 완성도만큼은 재평가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스퀘어에닉스의 브레이블리 디폴트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도 인상적입니다. 일반적으로 턴제 전투 게임에서 아군 턴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으면 턴을 날리게 되지만, 이 게임은 자신의 턴을 저축해둘 수 있는 디폴트 시스템과 미리 턴을 당겨서 쓸 수 있는 브레이브 시스템을 통해 턴제 전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턴제 전투 RPG는 여러 개발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꾸준히 진화해왔습니다. 요즘 소울라이크로 대표되는 실시간 액션 게임들이 대세가 되다보니, 턴제 전투 RPG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많긴 하지만, 발더스게이트3나 33원정대를 보면 턴제 전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상한 결과물만 계속 나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33원정대가 턴제 전투 RPG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줬으니, 다음에 등장할 게임들은 어떤 식으로 진화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