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는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국제질병분류(ICD-11)에 등재하며, 게임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중독 행위일 수 있다는 인식을 전세계 의학계에 공표했다.
WHO의 질병 정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게임의 사용이 개인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고, 이러한 패턴이 최소 12개월 이상 지속되면 질병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가 통제 실패’, ‘우선순위 역전’, ‘부정적 결과 지속’ 등 크게 3가지 분류로 나누어 이를 설명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WHO의 ‘게임 이용 장애’로 규정한 조건과 딱 들어맞는 산업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e스포츠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리그오브레전드(LOL)의 e스포츠 리그인 ‘LCK’( LOL 챔피언십 코리아) 소속 선수들은 평균 10~12시간 이상을 장시간 연습에 투자한다.
또한, 이전 경기에 대한 피드백과 플레이 영상 분석 및 게임 내 숙련도 증가를 위한 추가 연습과 함께 다른 팀과 전략적으로 연습하는 ‘스크림’ 등을 포함하면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게임과 관련된 활동에 몰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는 프로게이머들뿐 아니라 프로 지망생과 연습생 등 e스포츠 대회 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당한다. 더 큰 무대와 꿈을 향해 연습에 매진하는 이들이 WHO 기준에 따라 ‘위험군’ 혹은 ‘진단 대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셈이다.
해외에서도 WHO의 결정에 e스포츠 관련 단체들은 일제히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국제 게임 개발자 협회(IGDA)는 WHO의 ‘게임 이용 장애’ 코드 등재에 대해 “사회문화적, 심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정의되었으며, 정책 오용의 위험이 크다.”라는 의견을 내놨고, 일본 게임산업협회는 “모든 몰입이 중독은 아니며, 과몰입은 원인 아닌 결과일 수 있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게임 이용장애’가 질병 코드로 등록되는 순간 e스포츠 산업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2024년 한국콘텐츠진흥원, ‘글로벌 게임 산업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e스포츠 산업의 한화 약 2,418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여기에 현재 한국 e스포츠 리그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LCK의 경우 ‘2024 LCK 서머’ 당시 320만에 달하는 뷰어 십(시청자 수)을 달성했고, 이 중 75%에 달하는 240만이 해외 시청자들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e스포츠는 단순히 게임으로 대회를 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산업군과 연계된 마케팅을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분류된다. 10~20대에게 여느 인기 프로 스포츠 못지않은 인지도를 가진 만큼 이 시장을 노리고,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하여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중이기도 하다.
e스포츠 시장 전문 인력 육성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고교, 대학의 e스포츠 교육 기관은 12곳 이상이며, 다양한 대학에서 e스포츠 관련 학과가 설립되는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산업군이 ‘게임 질병 코드’ 도입으로 단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e스포츠 산업의 근간은 게임이다. 독특한 e스포츠 대회도 존재하지만, 대다수 리그와 경기가 게임으로 구성되어 있고, e스포츠의 매출 구조 역시 스폰서십 및 광고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 ‘질병’으로 취급받게 되는 순간, 이 스폰서십과 광고는 단숨에 끊기게 된다. 담배, 술, 마약 제품에 광고를 넣는 기업이 없듯이 질병으로 취급받는 게임에 스폰서십과 광고를 하게 되면 해당 기업의 리스크가 너무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e스포츠 산업의 붕괴를 초래할 것은 뻔한 일이다.

실제로 정부의 강한 압박으로 e스포츠 산업이 퇴보를 겪은 실제 예도 있다. 바로 중국이다. 2021년 중국 정부는 18세 미만 청소년들이 금, 토, 일 3일 중에 1시간만 게임을 할 수 있게 하는 강도 높은 게임 규제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여성가족부가 주도했던 ‘셧다운제’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정책 이후 중국 e스포츠 산업은 크게 흔들렸고, 2020년 243억 달러(한화 약 25조 8천억 원)에 달했던 시장에 단 4년 만에 무려 38.8억 달러로 축소됐다.
정부의 영향력이 막강한 중국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한국에서 유난히 민감한 중독, 질병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게임 이용 장애’ 코드가 한국 e스포츠 시장에 중국과 같은 결과를 내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처럼 WHO의 ‘게임 이용 장애’는 단순히 게임을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산업군 전체를 몰락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부디 "친구의 이마에 앉은 파리를 도끼로 잡으려 하지 마라."(Il ne faut pas tuer une mouche sur le front de son ami avec une hache.)라는 프랑스의 속담처럼, 하나의 주제에 매몰되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르는 일이 일어나질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