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유럽 올해의 차. BMW 5시리즈를 제치고 이 영예를 차지한 모델이 르노 세닉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의외였다. 더욱이, MPV 이미지가 강했던 과거 세닉을 기억하는 소비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과연 이 차는 어떻게 유럽의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고, 또 한국 시장에서 어떤 인상을 남기고 있을까? 이번 시승기를 통해 르노 세닉 E-Tech 일렉트릭의 디자인, 실내 구성, 주행 성능, 전비 효율, 그리고 지속 가능성까지, 깊이 있게 조망하고자 한다.

세닉의 전면부 로장주(르노의 엠블럼)는 날렵한 헤드램프와 조화를 이루며 중심을 잡고 있고, 그릴과 범퍼의 디테일은 입체적이면서도 단정하다. 전체적으로 단단한 실루엣으로 날카로운 선의 흐림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측면 라인은 공력 효율을 염두에 둔 듯 유려하게 떨어지며, 후면부는 복잡하지 않되 수평선이 강조된 깔끔한 구성이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볼륨을 과시하지 않는 절제된 비례감이다. 무언가를 과하게 강조하거나 장식하는 대신, 패널 간의 정합성과 실루엣에서 오는 완성도를 택한 듯하다. 이는 최근 유럽에서 호평받는 전기 SUV 디자인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MPV에서 SUV로의 전환은 단순한 포지셔닝 변화가 아니라, 르노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전환을 시사하는 조형적 언어로 느껴진다.

실내로 들어서면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만들어낸 평평한 플로어, 그리고 새롭게 구성된 대시보드 디자인이 반긴다. 인상적인 부분은 가로형 계기판 디스플레이와 세로형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가 'ㄱ'자 형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 구성이 세련된 시각적 안정감을 주며, 조작 역시 직관적이다. 센터 디스플레이는 플로팅 타입이 아니라 대시보드와의 일체감을 살렸고, 반응성이나 그래픽의 질감에서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스티어링 휠 버튼은 터치 방식이지만 과도하게 민감하지 않고, 하단 주요 기능 버튼은 물리식으로 배치해 조작 편의성을 확보했다. 이처럼 '터치와 물리의 균형'을 고려한 설계는 최근 유럽 브랜드에서 강조되는 실용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앰비언트 라이트는 주행 모드에 따라 색상이 자동으로 바뀐다. 특히 조수석 앞 라인부터 도어 트림까지 이어지는 라인 조명은 실내에 생동감을 부여하며, 르노가 프리미엄 감성 강화를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느껴지게 한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AmpR Medium' 덕분에 실내 공간 활용성은 탁월하다. 특히 2열 공간은 무릎 공간, 머리 공간, 어깨 공간 모두에서 충분한 여유를 보이며, 평평한 바닥은 장시간 탑승에도 피로를 줄인다. 개방감 역시 파노라믹 글래스 루프 덕분에 뛰어나며, 이 루프는 가림막 없이 버튼 조작만으로 햇빛 투과량을 조절할 수 있다. 르노에 따르면 이 유리는 강한 햇볕에도 실내 온도를 효과적으로 차단해 준다고 한다.

트렁크 공간 역시 깊이감이 있어 실제 수납 성능이 우수하다. 2열 폴딩 시 평탄화가 완전하진 않지만, 실사용에서의 불편은 크지 않을 수준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일상적인 SUV 수요뿐 아니라, 가족 단위 장거리 여행에서도 높은 활용도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세닉의 주행 질감은 첫인상만큼이나 단단하면서도 섬세하다. 가장 먼저 체감되는 것은 스티어링 특성이다. 조향비는 12:1로 상당히 민첩하며, 스티어링 휠의 회전 수가 2.3회전에 불과해 조작이 직관적이다. 이러한 세팅은 도심 내 저속 구간에서 회전 반경을 줄이고, 고속 코너링 상황에서도 민첩하고 정확한 조향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세단급 민첩성과 SUV 특유의 안정감이 절묘하게 결합된 인상이다.
서스펜션은 유럽차 특유의 탄탄함을 유지하면서도 지나치게 딱딱하지 않다. 병렬 링크 방식의 멀티링크 리어 서스펜션은 급차선 변경이나 요철 통과 시 차체의 안정성을 확실히 지지해 준다. 특히 롤링 억제 성능이 뛰어나 코너링 시 탑승자의 몸이 쏠리는 현상이 적고, 전체적인 차체 거동이 평탄하게 유지된다. 이와 같은 구조적 세팅은 고속 주행뿐 아니라 와인딩 도로에서도 운전자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전기 모터는 최고 출력 160kW(218마력), 최대 토크 300Nm의 출력을 발휘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의 가속은 7.9초로, 뛰어난 수준은 아니지만 일상 주행에서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전기차 특유의 즉각적인 토크 전달과 가속 응답성은 도시 주행은 물론, 고속도로 주행에서도 일관된 여유를 제공한다.

전기차의 효율성은 배터리 용량이나 모터 출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감속 시 발생하는 운동 에너지를 얼마나 잘 회수하고, 이를 다시 주행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효율성의 핵심이다. 세닉의 E-Tech 시스템은 바로 이 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회생 제동은 총 5단계로 조절 가능하며, 스티어링 휠 뒤편의 패들 시프트를 통해 직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회생 제동의 강도를 직접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은 운전자의 주행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감속 특성을 맞춤 설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회생 제동 레벨을 가장 강하게 설정하면 ‘원 페달 드라이빙’이 가능해진다.
원 페달 드라이빙은 말 그대로 가속 페달 하나로 감속과 정지를 모두 조절하는 기능이다. 도심 주행처럼 브레이크 조작이 빈번한 상황에서 이 기능은 운전 피로도를 눈에 띄게 줄여준다. 더불어, 브레이크 마모를 줄이고 전반적인 유지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도 실용적인 장점이다.
실제 고속도로에서 완속 주행 이후 원 페달 주행으로 전환해 시내 구간에 진입했을 때, 감속 반응은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전통적인 브레이크 시스템에 익숙한 운전자라도 2단계 정도의 회생 제동 설정부터 시작하면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다. 이처럼 회생 제동 시스템은 단순히 전비 향상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운전의 직관성과 감성 품질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세닉 E-Tech는 잘 보여준다.

세닉은 국내 판매 기준으로 87kWh 용량의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이는 동급 차량 중에서도 상위 수준이며, LG에너지솔루션이 공급한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 모듈이 적용됐다. 르노는 이 배터리를 기반으로 WLTP 기준 최대 625km의 주행 가능 거리(국내 인증 기준 460km)를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실제 시승 환경에서도 90% 충전 시 500km 이상을 예측하는 주행 가능 거리 수치가 확인되었다.
실제 고속도로 구간에서 약 84km를 주행한 후에도 잔여 배터리 용량은 82%, 주행 가능 거리 예측은 470km 수준을 가리켰다. 이는 고속 주행만 감안한 수치임을 고려하면, 도심과 혼합 주행에서는 WLTP 수치의 80%에 유사한 전비 수치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충전 속도 역시 실용적인 수준이다. DC 급속 충전 기준 최대 130kW까지 지원되며, 20%에서 80%까지 충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4분이다. 여기에 히트 펌프 시스템이 기본 탑재되어 있어 겨울철 주행 거리 감소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며 계절에 관계없는 일관된 성능을 보장한다.
NCM 배터리는 12개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모듈은 개별 교체가 가능하다. 이는 단순 고장 시 전체 배터리를 교체해야 했던 과거 EV들의 단점을 극복한 설계다. 또한 배터리 해체 이후 코발트, 니켈, 리튬 등 주요 자원의 회수율은 65% 이상에 이르며, 한국 환경부의 재활용 등급 기준 1등급을 획득한 친환경 배터리 시스템으로 평가된다. 또한, 르노코리아는 세닉의 배터리에 대해 10년 또는 16만 km까지 보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전기차 구매자들의 가장 큰 불안 요소 중 하나인 배터리 성능 저하 문제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요소다.

세닉 E-Tech의 또 다른 핵심 포인트는 차량 전반에 걸쳐 ‘지속 가능성’을 실현했다는 점이다. 차량 전체 중량의 24% 이상에 재활용 소재가 사용되었고, 폐차 시 90%까지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차체에는 40kg 이상의 재활용 플라스틱, 37%의 재활용 강철, 최대 40%의 재활용 알루미늄이 적용되었다. 특히 알루미늄은 스탬핑 공정에서 발생한 자투리 금속을 수거해 다시 가공하는 방식으로,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도 줄였다.

실내 소재 또한 인상적이다. 대시보드 상단 커버는 친환경 식물 케나프(Kenaf) 섬유로 제작되었고, 하단은 폐산업 폐기물 기반의 폴리프로필렌을 80%까지 재활용해 사용했다. 도어 트림, 수납공간, 카펫 등에도 바이오 기반 소재와 재활용 직물이 다수 사용되었으며, 헤드라이너는 99.5%가 폐페트병 재활용 소재다.
주목할 점은 세닉은 ‘완전한 레더 프리’ 모델이라는 점이다. 시트와 스티어링 휠에는 합성 또는 바이오 소재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동물복지뿐 아니라 제조 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 감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단순히 재활용된 자재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량 전체가 순환형 모빌리티 생태계 안에 놓이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은, 르노가 단순한 완성차 브랜드를 넘어 환경을 고려한 제조업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르노 세닉은 르노의 브랜드 전환 전략, 암페어(Ampere) 플랫폼 기술력, 그리고 전동화 시대에 적합한 설계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전환점이자 상징적 모델이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정제된 응답성과 구조적 완성도가 뛰어나며, 공간 구성과 실내 디테일 역시 높은 수준의 상품성을 갖추고 있다. 배터리 성능과 효율, 충전 속도에서도 경쟁력 있으며, 특히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이만한 EV는 흔치 않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닌 르노가 이 정도 수준의 EV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국산 EV들이 양산성과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을 이끌고 있다면, 르노 세닉은 정서적 감성과 기술적 설계 완성도를 무기로 유럽식 전기차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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