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7일, 한국 증시는 45년 역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지난해 세계 주요 증시 중 최하위 수익률로 '수모'를 당했던 코스피가 불과 1년 만에 64% 넘게 급등하며 세계 1위 수익률을 기록하는 반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외국인 자금이 하반기에만 17조 원 넘게 유입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1000조 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축제 속에서 유독 한 산업만큼은 찬바람을 맞고 있다. 바로 자동차 산업이다. GDP의 절반을 책임지는 우리 경제의 핵심 축이었던 자동차 산업이 코스피 4000 시대의 주역에서 빠져 있다. 반도체와 조선, 방산이 증시를 이끄는 동안 현대차와 기아는 보합권에서 맴돌고 있다.
코스피 4000 돌파의 일등 공신은 단연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10만 원을 돌파하며 '10만전자' 신화를 썼고, SK하이닉스는 53만 원대에서 연일 신고가를 경신했다. 증권가 전문가들은 "반도체, 조선, 방산, 원자력이 연말까지 시장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제로 10월 한 달간 코스피가 15% 상승하는 동안 시가총액 증가분의 54%를 반도체가 차지했다. 나머지 업종은 오히려 실적 전망이 하향 조정됐다.
AI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은 온통 메모리 반도체에 쏠려 있다. HBM 수요 급증과 데이터센터 증설이 맞물리면서 반도체는 '황금 섹터'가 됐다. 조선은 한국 조선사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 상승과 미국 군함 건조 수주가 호재로 작용했고, 방산은 글로벌 국방비 증대로 200% 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코스피 4000을 달성한 10월 27일, 현대차는 고작 0.79% 상승에 그쳤고 기아는 오히려 -0.09% 하락 마감했다. 증시 대장주로 불리던 시절의 위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업종 쏠림 현상이 극심해지면서 "불장인데 내 계좌만 녹는다"는 개미 투자자들의 하소연이 SNS를 뜨겁게 달궜다.
자동차 산업의 주가 부진은 반도체에 밀렸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구조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첫 번째는 중국과의 경쟁이다. 2025년 상반기 현대차그룹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0.9%에 불과하다. 2016년만 해도 효자 시장이었던 중국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이다. 그 사이 BYD와 지리자동차가 급성장하며 시장을 장악했다.
더 심각한 건 이제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글로벌시장에 이어 한국 시장도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BYD는 2025년 1월 한국 시장에 정식 진출했고, 2000만 원대 후반의 공격적인 가격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은 한국을 선진국 시장 진출의 테스트베드로 삼고 있다"며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을 동시에 갖춘 중국 전기차가 본격적으로 밀려오면 국내 시장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두 번째는 전기차 전환의 딜레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성장하고 있지만 예상보다 더딘 속도를 보이고 있다. 충전 인프라 부족과 높은 차량 가격이 소비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미국은 트럼프 정부의 보조금 축소 시사로 불확실성이 커졌고, 유럽도 실제 판매는 정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와 기아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내연기관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세 번째는 수익성 악화 우려다. 2025년 상반기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7% 감소했다. 중국 시장 부진과 미국 현지 공장 가동에 따른 비용 증가가 수익성을 갉아먹었다. 관세 정책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투자자들은 자동차주에 대해 관망세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처럼 명확한 슈퍼 사이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증시의 판단이다.
정부 정책도 자동차 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자동차 판매의 절반을 무공해차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미달 시 한 대당 300만 원의 기여금을 부과한다. 하지만 충전 인프라는 부족하고 소비자 선호도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업계는 "내연기관 시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리한 목표"라며 "자칫 중국 전기차에 국내 시장을 내주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자동차 산업에 희망은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대차그룹은 여전히 글로벌 톱5 완성차 업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25 세계 최고기업'에서 현대차는 33위를 기록하며 도요타(48위)를 제쳤다. 인터브랜드의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도 30위에 올라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다.
제네시스 브랜드는 북미 시장에서 프리미엄 SUV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GV70과 GV80이 미국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전기차 분야에서도 아이오닉 시리즈가 유럽과 북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기아의 EV6와 EV9도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는 연간 3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췄고, IRA 혜택으로 미국 시장 공략에 유리하다. 관세 리스크도 줄일 수 있다. 하이브리드 시장도 기회다. 전기차 전환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하이브리드가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국내 하이브리드 판매는 전년 대비 19% 이상 증가했다. 중국 업체들이 전기차에 집중하는 사이 하이브리드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자율주행과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분야의 투자도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현대차는 모셔널과 협력해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기아는 PBV 사업으로 미래 모빌리티 시장을 준비하고 있다. 상용화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코스피는 4000을 넘어 5000을 바라보고 있다. 증권사들은 내년 상반기 4000 중후반, 2027년까지 5000도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여정이 반도체와 조선, 방산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업종 쏠림이 심화되면 시장의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실적이 뒷받침되는 새로운 업종이 나타나야 하고, 그 역할을 자동차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시가총액은 약 130조 원으로 코스피의 4%를 차지한다. 반도체 양대 기업의 30%와 비교하면 작지만, 자동차는 전후방 연관효과가 큰 산업이다. 부품, 소재, 물류, 금융까지 고려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자동차 산업이 다시 활력을 찾으면 증시뿐 아니라 실물경제에도 긍정적 파급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전략,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투트랙 전략의 명확화, 정부의 현실적인 정책 지원, 그리고 미래 기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가 그것이다. 코스피 4000 시대, 자동차 산업은 주역이 아니다. 하지만 조연도 아니다. 언제든 다시 중심 무대로 나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산업이다. 자동차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아니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질지는 앞으로 1~2년이 결정할 것이다. 변곡점은 이미 시작됐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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