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1월, 영국의 얼스 코트 모터사이클 쇼(Earls Court Motorcycle Show)에서 처음 대중에 공개된 불렛(Bullet). 250, 350, 500cc 3개 버전으로 출시됐으며 경사진 '슬로퍼' 엔진과 트윈-포트 실린더 헤드 그리고 고압축 피스톤을 장착했다. 불렛의 이 초기 디자인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출처:로열 엔필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자동차보다 역사는 짧지만 단 하나의 모델로 10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 온 모터사이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생산된 모터사이클’이라는 수식어는 단 하나의 이름 앞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로열엔필드 불렛(Royal Enfield Bullet).
총알처럼 빠르다는 의미로 탄생한 불렛은 1932년 첫 생산을 시작해 2025년 현재까지 무려 93년, 곧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오며 살아남은 유일한 모델이다. 로열엔필드는 불렛의 역사보다 길다. 1891년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해 1901년부터 모터가 달린 바이크 '모터사이클'을 만들었다.
1914년 처음으로 2행정 모터사이클을 처음 개발한 로열엔필드는 이후 다양한 형태의 모델을 지속해 출시했다. 전쟁과 불황, 기술 혁신과 디자인 유행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불렛은 단 한 번도 단종되지 않았다.
지금도 13종에 이르는 모델을 팔고 있지만 대부분이 초기의 외관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오히려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 브랜드 자체를 초월하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초기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며 1989년 해외 수출용으로 개발한 24bhp 500cc 불렛.(출처:로열 앤필드)
불렛의 초기 역사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1930년대 초반의 불렛은 지금의 클래식 이미지보다 훨씬 간결한 구조와 군용 활용 중심의 실용성을 갖춘 모델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전환점은 생산 거점을 인도로 옮긴 이후다.
인도의 도로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맞춰진 단순하고 튼튼한 구조, 정비가 쉽고 고장이 거의 없는 엔진 특성은 불렛을 ‘국가적 상징’으로 만들었다. 1950~60년대에는 군과 경찰의 순찰용 오토바이로 자리 잡았고 이후 수십 년간 인도의 일상 속 가장 대중적인 모빌리티로 존속했다.
흥미로운 점은 불렛이 ‘그대로인 듯 하면서도 계속 변화해 왔다’는 사실이다. 클래식한 실루엣은 1930년대 초창기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둥근 헤드램프, 길게 뻗은 연료탱크, 단순한 리프 프레임의 윤곽은 시대를 초월한 감성 자체다.
가장 최신의 불렛. 1932년 처음 등장한 초기 모델의 디자인과 큰 차이가 없으며 국내에서도 약 500만 원대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출처:로열 엔필드)
하지만 세부 기술은 시대 변화에 맞게 확실하게 업데이트됐다. EFI(전자식 연료분사) 적용, 강화된 브레이크 시스템, 충격 흡수장치 개선, 최근에는 배출가스 규제 대응을 위한 엔진 개량 등 긴 세월 동안 크고 작은 개편이 이어졌다. 덕분에 불렛은 특별한 변화없이 가장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오토바이로 인식되고 있다.
불렛에 대한 전 세계 라이더들의 정서적 애착은 단순한 복고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이 모델은 꾸미지 않은 단기통(싱글) 엔진의 맥동, 저회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토크, 금속이 전해주는 기계적인 질감까지 ‘오토바이를 타는 이유’를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제공한다.
고도화된 현대의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오히려 이런 단순함이 강력한 차별점이 됐다. 시속 100km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클래식한 주행 감각, 도시와 시골의 낮은 속도 환경에서 빛을 발하는 여유로운 성향은 불렛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로열 엔필드 인터셉터 650. 전설적인 병렬 2기통 엔진을 탑재하고 있으며 47마력, 최대 52Nm의 토크를 발휘하는 르드스터다. (출처:로열 엔필드)
불렛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오늘날까지 건재하다. 국가별로 가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2000달러대 초반부터 시작하는 접근성 높은 가격, 시대를 오가는 디자인의 매력, 그리고 전통적인 단기통 사운드가 더해져 젊은 세대까지 팬층을 넓혀가고 있다.
전기화·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모터사이클 산업에서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불릿이 계속해서 선택받는 이유는 결국 ‘진정성’이다. 불렛은 최신 기술보다 오래된 감성, 완벽한 매끈함보다 기계적 생동감에 가치를 두는 라이더들에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모터사이클, 로열엔필드 불렛. 1932년에 태어나 2025년 지금까지 여전히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이 전설은 앞으로 100년이라는 상징적 이정표를 향해 또 한 번 묵묵히 달리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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