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낯선 도시, 방콕. 이 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세 번째 눈이 필요하다. 도시에 정통한 휴민트, 메리어트 호텔리어들이 기꺼이 그 눈을 빌려 주었다.
방콕 여행을 위한 세 번째 눈
시작은 W 방콕(W Bangkok) 6층 수영장 (WET)의 벽면이었다. 어딘지 익숙한 캐릭터 ‘마디(Mardi)’를 발견했다. 태국 스트리트 아트의 거장 알렉스 페이스(Alex Face)가 딸아이를 바라보며 그렸다는 세 눈 박이 토끼 복장을 한 아이 그림이다. 뚱한 표정이지만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이마 위 눈동자가 이번 여행의 힌트였다. 방콕의 서사를 읽으려면 세 번째 눈이 필요하다는 암시. 세 번째 눈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방콕의 호캉스 여행이 이제 시작된다.
■W Bangkok
미래로 노를 저어 가는 100년의 에너지
전설이 아트가 되다
W 방콕의 유쾌한 스토리텔링
방콕 여행자의 호기심을 깨우는 천국이자, 품고 있는 스토리가 가득한 이야기 맛집인 W 방콕은 BTS 총논시(Chong Nonsi)역 인근에 자리한다. 현대적이고 힙한 비주얼을 자랑하면서도 태국 고대 신화와 로컬의 일상이 재치 있게 흐른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리셉션 벽화다. 태국 전통 신화 속 ‘히마판 서식지(Himmaphan Forest)’에 사는 불사조와 호랑이가 맹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장면인데, 촘촘히 박아 넣은 보석 디테일은 태국의 전통 타투인 ‘삭 얀(Sak Yant)’을 연상시킨다.
1층 엘리베이터 홀 벽면을 밝히는 방콕 나이츠(Bangkok Nights)는 툭툭에서 떼어 낸 800개의 전조등이다. 방콕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 사이를 유영하는 툭툭의 전조등을 위트 있게 포착해 낸 것. 올데이 다이닝을 제공하는 더 키친 테이블(The Kitchen Table)의 악어 패턴 아트월 사이에는 악어 사냥꾼과 악어 세 마리가 숨어 있다. 태국 전래 동화 속 영웅 크라이 통(Krai Thong)이 악마 악어인 ‘찰라완(Chalawan)’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디자인 모티브다. 피트니스 센터인 핏 짐(FIT Gym)의 유리창에는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이 바벨을 든 머슬맨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힌두 서사시 라마야나를 태국식으로 각색한 ‘라마키엔(Ramakien)’ 속 신성한 캐릭터가 W 방콕을 만나 유쾌해졌다.
호텔 곳곳 공간이 주는 경쾌한 에너지는 어슬렁한 휴식에 치중한 호캉스의 틀을 벗어나게 한다. 이른 아침에는 쿵쾅거리는 비트 속에서 수영장의 물줄기를 가르며 ‘아쿠아 사이클링’으로 몸을 깨운다. 낮에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전용 툭툭을 타고 방콕의 구도심과 오래된 골목을 돌파할 수도 있다. 피로를 단숨에 지우는 건 어웨이 스파(AWAY Spa)의 포근함. 요청한 대로 ‘조금 강한’ 압력으로 몽환의 세계를 다녀올 수 있었다.
안 되는 것 빼고 다 되는
왓에버 웬에버 & 에코 툭툭 저니
W 호텔에는 유용한 도움을 주는 24시간 시그니처 컨시어지가 있다. 안 되는 것 빼고는 다 해결해 준다. 일례로, 요즘 방콕 여행의 필수 기념품으로 꼽히는 하트 알갱이가 콕콕 박힌 한정판 콜게이트 치약은 현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도 품절 대란으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허탕을 몇 번 쳤다는 일행이 혹시나 하며 왓에버 웬에버(Whatever Whenever)에 문의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찾았습니다! 몇 개나 필요하세요?” 원하는 수량의 치약이 그날 오후 객실 문 앞으로 배달되었다고. 서비스는 무료, 치약값만 체크아웃시 정산하면 되는 영리한 특권이다.
W 방콕의 해결사 W 인사이더와 함께하는 툭툭 투어도 특별하다. 일단 친환경 전기 툭툭이라 소음과 매연이 없다. 엔진의 굉음이 없으니 이동 중에도 가이드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다. 시간과 에너지 낭비 없이 딸랏노이와 송왓의 예술적인 골목 구석구석을 쾌적하고 스타일리시하게 탐험할 수 있는 여행법이다.
과거의 노를 저어 미래로 가는
더 하우스 온 사톤
W 방콕이 품은 ‘더 하우스 온 사톤(The House on Sathorn)’은 독립성을 갖춘 여행지다. 헤리티지 공간이 초현대적인 빌딩 숲과 이루는 극적인 대비가 또 하나의 장관이다. 403개의 객실을 갖춘 W 방콕의 날렵한 31층 유리 타워와의 대조도 흥미롭지만, 고택의 정원에 서서 고개를 한껏 젖혀 올려다보면 태국 최고층 전망대인 ‘마하나콘 스카이워크(Mahanakhon Skywalk)’가 314m 상공에 아찔하게 걸려 있다. 안전을 위해 발걸음을 얼른 과거로 되돌렸다.
130년의 세월을 버텨 낸 노란색 콜로니얼 스타일의 저택은 한때 부유한 상인의 저택이자 러시아 대사관이었다. 문화재급 외관에는 손대지 않은 채, 내부는 W 브랜드 특유의 위트와 반전으로 감각적인 놀이터가 됐다.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를 한껏 올린 건 셰프 부아(Chef Bua)가 직접 시연하는 쿠킹 클래스였다. 새우 내장 기름의 녹진한 고소함이 제철 과일의 상큼함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통 샐러드 얌 만꿍(Yam ManKung), 태국 국왕이 사랑했다는 오렌지 향 가득한 왕실의 특제 커리. 짭조름하게 염지한 달걀노른자 소스로 맛을 낸 오징어 요리가 나왔다. 클래스보다는 태국 식재료의 다양한 색과 향과 맛에 푹 빠져들게 하는 파티에 가까웠다. 시식은 타이 시푸드 레스토랑 ‘파이(Paii, ‘노를 젓다’라는 뜻)’에서 거행됐다. 직접 요리한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흥분으로 침이 마를 정도. 길거리의 친숙한 맛이 파인다이닝으로 ‘노 저어 가는’ 과정을 음미할 수 있었다.
바(Bar)는 W 호텔 브랜드의 자존심이다. 중후한 코린트식 기둥과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로 꾸며진 ‘바 사톤(Bar Sathorn)’은 최근 아시아 50대 베스트 바(Asia’s 50 Best Bars)에 진입하며 방콕에서 가장 핫한 믹솔로지 성지가 되었다. 아가베와 베이컨을 인퓨징한 술에 꽝꽝 얼린 생토마토 한 알을 통째로 집어넣어 서서히 녹여 마시는 ‘방콕 브런치’가 시그니처 칵테일이다.
■The RITZ-CARLTON, Bangkok
룸피니의 전망을 품은 방콕 미식의 최전선
원 방콕과 룸피니라는 독보적인 자산
리츠칼튼 방콕(The Ritz-Carlton, Bangkok)은 방콕의 호텔 체급을 단숨에 바꿔 버린 상징적인 이정표다. 총사업비만 5조원이 넘게 투입된 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 도심 개발 프로젝트, ‘원 방콕(One Bangkok)’ 복합 단지 내에 들어설 5개의 하이엔드 호텔 중 가장 먼저 출사표를 던지고 문을 열었다. 도심에서 현대 미술과 대자연, 최고급 미식, 쇼핑까지 한번에 움켜쥐고 싶다면 다른 곳을 떠올리기 어렵다.
리츠칼튼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룸피니 공원(Lumpini Park)’의 독점적 전망이다. 260개의 우아한 객실과 스위트룸의 문을 열면 객실의 전면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빌딩 숲과 대비되는 거대한 녹지가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다. 룸피니 공원은 1920년대 왕실이 하사한 방콕 최초의 공공녹지로, 도심을 식혀 주는 거대한 허파다.
호텔의 공간은 공원의 자연과 호흡을 같이 한다. 호텔은 수련, 메리골드, 아마란스, 가드니아, 재스민 등 태국의 일상 의식과 자연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시그니처 꽃을 골라 객실의 이름과 인테리어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전설적인 신사 숙녀들이 동행하는 무결점 투어
리츠칼튼에는 상징적인 슬로건이 있다. ‘신사 숙녀를 모시는 신사 숙녀(Ladies and Gentlemen)’라는 종사자들의 자부심이다. 이런 마음은 사소한 로컬 취향을 마주할 때 더 빛을 발한다. ‘마음으로 걷는 길(Mind Over Mile)’은 이른 아침, 가이드와 함께 룸피니 공원을 약 1시간 동안 산책하는 호텔의 웰니스 프로그램이다. 이때 도착한 소식 하나. 요즘 룸피니 공원을 들썩이는 것으로,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지독한 줄서기와 품절 대란으로 악명 높은 100% 생착즙 ‘SBS 구아바 주스’가 있다는 것이다. 빡빡한 일정에 줄 설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리츠칼튼의 ‘신사 숙녀’들이 즉시 핸드폰을 들어 오토바이 배달을 수배했다. 다음날 아침, 객실로 배달된 구아바 주스는 오래 기억할 신선한 감동이었다.
원 방콕 아트 루프(One Bangkok Art Loop)는 원 방콕 단지를 걸으며 현대 미술 작품과 문화 공간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최첨단 미래도시만으로 보이는 원 방콕에도 과거가 있다. 1920년대 태국 최초의 무선 전신 기지국이 세워졌던 와이어리스 로드(Wireless Road)의 부지 위에 세워졌다. 과거 기지국을 복원한 헤리티지 센터 ‘하우스 오브 와이어리스(House of Wireless)’가 기억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토니 크래그(Tony Cragg)의 작품을 지나 알렉스 페이스의 ‘Fly’ 조형물과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쓱 손으로 이마를 문질러 보게 되었다. 방콕을 관찰하는 세 번째 눈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았다.
리츠칼튼의 프라이빗 투어는 원방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빡크렁 딸랏(Pak Khlong Talat) 꽃시장 한복판에서 전통 꽃잎 접기를 배우고, 펑키한 플라워 카페에서 숨을 고른 뒤, 나만의 향수나 전통 야돔(inhaler)을 커스텀하는 클래스까지 완벽하게 짜여 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방콕 특유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에 1시간 이상 갇혔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럭셔리 리무진 밴 좌석의 마사지 기능이 피로를 녹여내는 동안, 차창 밖 방콕의 소음은 완벽히 차단되었으니까.
뭉친 근육을 결대로 풀어내는 섬세한 작업은 스파 베드 위에서 완성되었다. 리츠칼튼의 스파 룸은 웰니스 테라피 브랜드 에스파(ESPA)의 제품과 트리트먼트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스파는 거대한 인공 오아시스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하고 밀도 높은 사치였다.
듀엣이라 가능한 현대 미식의 최전선
리츠칼튼 방콕의 미식은 매 순간이 반전이었다. 아침에는 레스토랑 ‘릴리스(Lily’s)’에서 큼직한 리버 프론이 올라간 팟타이(Phat Thai), 게살이 씹히는 진한 카오소이(Khaosoi) 크랩 커리 등 로컬 메뉴로 구성된 클래식 태국식 조식으로 활기차게 시작한다. 오후에도 루틴이 있다. 매일 석양 무렵 야외 테라스에서는 호텔 직원들이 태국 전통 악기 끌렁 야오(Klong Yao)에서 영감을 받은 엘리멘탈 앙상블 공연을 수줍게 시연한다.
이 모든 경험은 저녁 식탁으로 수렴됐다. 그 유명한 ‘듀엣 바이 데이비드 투탱(Duet by David Toutain)’이다. 파리에서 미쉐린 2스타를 거머쥔 셰프 데이비드 투탱의 독창적인 요리 철학과 셰프 발랑탱 푸아슈(Valentin Fouache)의 정교한 기술이 방콕이라는 로컬 무대 위에서 정교한 2인무를 추는 곳이다. 32석 규모의 프라이빗한 레스토랑은 온실을 연상시키는 글래스 하우스 형태로 설계되었다. 세이지 그린 톤의 보태니컬 인테리어와 야외 테라피 가든이 바깥의 룸피니 공원 녹음과 연결되어, 마치 자연 속에 앉아 식사하는 느낌이다.
재료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과감한 비주얼로 등장하는 요리들은 시각적인 선입견을 깨부수는 맛의 반전이다. 식재료 본연의 특성을 극대화해 맛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히는 강렬한 미식 체험이었다. 플레이트가 나올 때마다 재료의 원산지와 조리 팁이 담긴 카드가 제공되는데, 마지막 8번째 카드가 도착했을 땐 아쉬운 탄식이 터졌다.
■Experiences
전통의 향기가 있는 3가지 로컬 체험
책벌레 공주가 남긴 왕실의 품격
왕실 헤리티지 투어
The Athenee Hotel, a Luxury Collection Hotel, Bangkok
룸피니 지역의 울창한 대로변에 있는 아테네, 럭셔리 콜렉션 호텔, 방콕은 가장 존경받는 왕 중 한 명인 쭐랄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의 딸, 왈라야 알롱꼰(Valaya Alongkorn) 공주가 살던 칸다바스(Kandhavas) 궁전 터에 세워진 역사적인 호텔이다. 지독한 책벌레였던 공주는 태국 최초의 여학교와 여성 사범대학을 세우기 위해 토지를 기부한 선구자였고 유럽의 양식에 태국의 미를 정교하게 융합하는 인테리어와 꽃장식 감각을 지녔었다. 호텔 곳곳의 카펫 패턴, 패브릭, 가구 디테일에 공주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취미와 예술적 취향이 엿보인다.
이곳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 호텔이 지닌 왕실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40분간의 헤리티지 투어 ‘A Voyage to Our Royal Roots’가 진행된다. 스위트룸에서 태국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고 전시물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칸다바스 궁전의 옛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면 말과 행동에 품격이 갖춰진다. 투어 후에는 호텔이 자랑하는 ‘더 하우스 오브 스무스 커리(The House of Smooth Curry)’에서 태국 4개 지역의 정통 요리와 무궁무진한 커리의 스펙트럼을 확인했다. 부드럽고도 스파이시한 마무리였다.
꽃잎에 접어둔 삶의 지혜
빡크렁 딸랏 꽃시장 Pak Khlong Talat
빡크렁 딸랏 꽃시장은 짜오프라야(Chao Phraya) 강변에 있는 태국 최대 규모의 꽃도매 시장이다. 태국인들에게 꽃은 매일 아침 불단에 바치고 행운을 기원하는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삶의 필수품이다. 기억 속의 꽃시장은 24시간 오토바이가 뒤엉켜 발 디딜 틈 없던 곳이었는데 정부의 환경 정비를 통해 구획과 난전이 정리되면서 한결 분명하고 쾌적해졌다.
꽃시장 상인의 손은 한시도 쉬지 않는다. 연꽃잎을 한 장씩 안쪽으로 접어 주면 꽃이 순식간에 우아한 다이아몬드가 된다. 꽃집에서 연꽃을 구매하자마자 즉석에서 열린 ‘연꽃잎 접기(Lotus Folding)’ 클래스는 5분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완성도일 뿐. 비결은 욕심을 버리고 힘을 빼는 것이다.
이 시장 한복판, 오래된 숍의 2층에 ‘플로럴 카페 앳 나파손(Floral Cafe at Napasorn)’이 숨어 있다. 천장을 가득 메운 거친 드라이플라워와 빈티지 샹들리에가 연출하는 숲속의 서재 같은 공간이다. 이 카페의 명물은 길고양이 출신의 마스코트 ‘치치’다. 은은한 꽃향기와 알싸한 커피 향이 뒤섞인 앤티크 소파 위에서 낮잠을 청하는 치치의 일상을 쫓아 시원한 커피로 쉼표를 찍기에 좋은 곳이다.
나만의 향기
홈프룽 바이 바이호르
Homprung by Baihor
방콕 올드타운의 서쪽, 오랜 전통 한약방과 약재 무역상들이 모여 있는 자까왓(Jakkawat) 거리에 이르면 향부터 달라진다. 골목 끝에 백 년 전통의 제약 명가, 트라 바이호르(Tra Bai Hor)가 런칭한 라이프스타일 카페 ‘홈프룽 바이 바이호르(Homprung by Baihor)’가 있다. 태국·콜로니얼 양식의 유서 깊은 고택에 세련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입혀 반전을 노렸다. ‘좋은 향기가 사방으로 퍼진다’는 이름(홈프룽)처럼, 은은한 약재 향이 골목까지 배어 나온다.
이곳의 숨은 재미는 전통 약재 바에서 진행되는 DIY 야돔 체험이다. 하나하나 냄새를 맡아가며 상자에 담긴 약재를 조합해 지구상 하나뿐인 야돔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시간이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투박한 미니 절구에 계피, 정향, 유칼립투스 칩 등 정성스럽게 살균된 천연 약재들을 넣고 살짝만 빻아서 천연 오일과 배합하면 끝. 오래된 의학적 지혜를 요즘 세대의 세련된 놀이 문화와 웰니스 체험으로 승화한 2세대 기업인들의 활약을 생각하니 태국의 미래가 더 향기롭게 느껴진다.
■메리어트가 추천하는 방콕의 핫플들
방콕의 진면목은 대로가 아닌 골목에 있다. W 방콕과 리츠칼튼 방콕 호텔은 각자 게스트를 위한 큐레이팅 투어를 운영하고 있는데, 타깃 층이 전혀 다른 두 호텔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장소가 송왓(Song Wat)과 이웃 골목인 딸랏노이(Talat Noi)였다. 방콕의 가장 핫한 장소라는 말이다. 느낌을 거칠게 풀자면 문래동의 서사와 성수동의 인기가 공존하는 곳이다.
역사를 알고 가자. 송왓과 딸랏노이는 차이나타운(야오와랏)의 남쪽 변두리에서 짜오프라야 강줄기를 따라 평행하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곳이다. 200여 년 전 중국계 이주민들이 강변을 따라 정착했다는 역사적 뿌리는 같지만, 세월을 버텨 낸 생업의 방식이 달랐기에 진화한 모습도 사뭇 다르다.
송왓은 국왕(라마 5세)이 직접 길을 내고 큼직한 곡물, 향신료, 무역 도매상들을 입주시킨 거상들의 비즈니스 중심지였다. 대형 창고와 웅장한 중국식 고택(주택 겸 사무실)이 많아 비교적 골목이 넓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
딸랏노이는 송왓보다 조금 더 일찍 형성된, 이름 그대로의 ‘작은 시장’이었다. 송왓의 거상들이 들여온 무역선과 기계들을 정비하고 고치던 배후 단지이자, 낡은 엔진을 해체해 고철을 깎던 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과연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창고 거리의 세련된 부활
송왓 로드 Song Wat Road
과거 무역 중심지였던 송왓 로드는 세월의 때가 시커멓게 묻은 백 년 전의 건물 외벽을 그대로 둔 채, 지금 이곳은 방콕에서 가장 뜨거운 크리에이티브 허브로 부상했다. 넓고 튼튼한 옛 창고와 무역상 건물은 자본과 감각을 갖춘 기획자들에게 훌륭한 캔버스였던 것. FV나 플레이아트 하우스처럼 대형 공간을 세련되게 리노베이션한 갤러리, 하이엔드 카페, 트렌디한 내추럴 와인 바가 주를 이룬다. 불과 며칠 전 오픈했다는 아디다스 방콕 매장과 2층의 % 아라비카 카페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과거의 골목에서 트렌디한 로컬 문화를 소비하는 방콕식 뉴트로 서사가 써지는 현장이었다.
짧은 시간에 골목 구석구석을 스캔할 수 있었던 것은 방콕 ‘잘알러’ 리츠칼튼 컨시어지팀 덕분이었다. 아케이드몰과 골목길 곳곳에 숨겨진 편집숍들은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태국 전역에서 수집한 빛바랜 조명, 빈티지 가구, 손때 묻은 은식기 같은 앤티크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작동한다. 나만의 독특한 기념품을 고르는 재미는 쏠쏠하다. 그 옆에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방콕 로컬 디자이너들의 패션 의류, 수공예 향수, 친환경 리빙 소품을 파는 독창적인 브랜드 숍이 있다. 송왓을 여행하는 팁이라면 특정 카페나 숍에 집착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들어가 보라는 것이다. 핸드폰 지도 앱을 내려놓고 인파에 휩쓸려 골목 그 자체를 즐기는 재미가 크다. 그러다가도 혹시 ‘이거다!’ 싶은 것을 발견했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태국 로컬 브랜드 안경테인데 가격이 꽤 합리적이에요!”라는 말을 듣고도 과감히 지갑을 열지 못한 안경테가 지금도 아른거린다.
기름때 묻은 철공소 골목의 아우라
딸랏노이 Talat Noi
딸랏노이는 송왓과 비교해 날것의 느낌이 여전하다. 지금도 골목길에는 매캐한 쇠 깎는 냄새가 진동하고, 폐자동차 부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 투박한 일상 위로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감각적인 벽화를 그리고 오래된 가옥을 개조했다. 그래서 바깥의 모습으로는 내부가 짐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거와 현재의 기묘한 공존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골목길 한복판에 뜬금없이 서 있는 거대한 ‘트랜스포머’ 로봇이다. 철공소에서 버려진 고철과 낡은 자동차 엔진 부품을 용접해 만든 이 투박한 로봇은, 딸랏노이의 정비공들이 가진 손기술과 골목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예술품이다.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의족을 찬 코끼리 모샤(Mosha)의 그림과 조형물도 중요한 상징이다.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은 아기 코끼리 모샤에게 의족을 만들어 준 미담의 배경에는 아티스트 프로젝트 ‘엘리펀트 퍼레이드(Elephant Parade)’가 있다. 모샤는 스트리트 아티스트를 딸랏노이로 모은 구심점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알렉스 페이스의 ‘마디’를 만날 수 있다.
카페를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짜오프라야 강변에 있는 대형 복합 문화 카페 ‘홍시엥콩(Hong Sieng Kong)’을 추천한다. 200년 된 중국식 고택과 버려진 창고 건물을 개조하고, 고가구와 빈티지 오브제를 채워 넣었다. 딸랏노이의 과거와 현재를 한 잔의 커피에 집약해 놓은 박물관과 같다. 카페를 통과해 강변 마당으로 나가 보면 뿌리에 뒤엉킨 붉은 벽돌집이 강변의 바람을 잘 견디고 있었다. 오래된 지혜와 치열한 삶의 흔적을 당대의 문화로 번역해 낸, 가장 딸랏노이다운 순간이었다.
글·사진 천소현 에디터 남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