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최고의 화제작, 영화 〈호프〉의 흔적을 따라 해남을 걸었다.
스크린 속 ‘호포’와 현실의 남창리, 그 흥미로운 경계를 찾아서.
스크린을 넘어, 현실이 된 ‘호포’
“차가 수십 대씩 왔다 갔다 함서, 여그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당께.” 영화 <호프> 촬영 당시를 묻자, 한 주민이 기다렸다는 듯 ‘썰’을 풀기 시작했다. 배우와 스태프, 촬영 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조용했던 시골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고. “평생 그런 구경을 언제 또 해 보겄어.”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호프>는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여름 극장가를 달궜다. 그 수백만 관객을 긴장시킨 가상의 항구마을 ‘호포’가 바로 이곳, 해남 북평면 남창리다.
영화 초반 약 1시간을 채우는 ‘호포 시퀀스’는 작품의 강렬한 첫인상을 책임진다. 여기서 반전. 거대한 오픈세트인 줄만 알았던 영화 속 호포항은 알고 보니 주민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진짜 마을이었다. 제작진은 남창리의 오래된 상점과 주택, 골목과 터미널을 그대로 활용하고, 건물 앞에 목재와 슬레이트 가벽을 덧대 현대의 흔적을 지웠다. 간판까지 바꾸자 2020년대의 해남은 감쪽같이 1970~80년대의 호포로 변신했다. 2023년 가을부터 약 3개월, 그렇게 마을 전체가 거대한 영화 세트가 됐다.
영화가 끝난 지금, 호포는 다시 남창리로 돌아왔다. 영화 속 범석(황정민)이 필사적으로 뛰었던 거리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요하다. 주민들은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고 골목을 오간다. 그러나 영화의 자취는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바닥에는 외계 존재 ‘바미기르’의 발자국 그림이 이어지고, 낡은 경찰차와 호포 파출소, 영화 속 장면을 옮긴 벽화가 길마다 불쑥불쑥 등장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어? 여기 거긴데?” 하며 머릿속 장면과 눈앞의 풍경을 자꾸만 맞춰 보게 된다.
영화 속 그 구도를 직접 재현해 보고 싶어 드론을 띄웠다. 고도를 높이자 예상은 적중했다. 낮은 건물 사이로 길게 뻗은 도로와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상점들. 맹렬한 추격전이 펼쳐졌던 호포의 메인 거리가 영화 속 모습 그대로 한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바미기르가 골목에서 튀어나오고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내달릴 것만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다.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 한 분만이 그 길을 느릿느릿 산책 중이다. 스크린과 현실 사이의 이 유쾌한 온도 차야말로, 스크린 투어리즘의 진짜 묘미다.
마을 끝에는 바다가 기다린다. 해안산책로에 닿으면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추격전과 총성도 어느새 멀어진다. 짭짤한 바닷바람과 남해의 잔잔한 물결. 해월루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이름 그대로 ‘바다 위에 뜬 달’을 뜻하는 이곳은 오래전 배를 띄우기 전 물길과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던 자리다. 그 곁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세운 조선시대 수군진성인 달량진성도 남아 있다. 영화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이야기가 쌓였던 곳이 바로 남창리다.
한때 ‘난리도 아니었다’던 촬영은 끝났지만, 영화가 남창리에 남긴 여운은 이제부터다. 수많은 오해와 흥미를 안고 찾아올 낯선 발걸음들. 영화가 남긴 흔적 위로는 또 어떤 사람과 이야기가 쌓일까. <호프>의 엔딩 크레디트는 이미 올라갔지만, 남창리의 다음 씬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HOPO CHECKLIST!
남창리에서 발견한 <호프>의 흔적 7가지
01 외계 생명체 발자국
길쭉한 네 개의 발가락을 가진 바미기르의 거대한 발자국. 남창리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치는 이 낯선 발자국 그림은 <호프> 촬영지 여행의 포문을 연다.
02 스텔라 경찰차
영화 속 숨 막히는 추격전의 또 다른 주인공. 실제 촬영 차량은 아니지만, 해남의 한 수집가가 소장하던 같은 모델을 빌려 영화 속 경찰차의 모습으로 재현했다(실제 촬영 차량은 격렬한 액션 촬영을 거치며 크게 파손됐다고). 재밌는 디테일 하나, 차에 붙은 ‘호포38905’ 번호판은 실제 촬영에 사용됐던 소품이다.
03 남창리 메인 거리
영화에서 외계 존재가 등장하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던 남창리의 중심 거리. 추격과 사투가 이어졌던 곳이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흐르는 조용한 시골길로 돌아왔다.
04 금복정육점 식당
영화에서 범석이 외계인을 추적하다 오발 사고를 낸 정육점. 촬영 때문에 뚫었던 입구는 촬영 후 다시 막고, 지금은 그 위를 트릭아트로 꾸며 영화 속 모습을 재현했다.
05 북평 호포 쉼터
잠시 숨을 고르며 <호프>의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작은 쉼표 같은 공간. 영화 속에서도 등장했던 장소인 만큼 영화를 본 뒤 찾으면 익숙한 풍경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06 호포 파출소
범석이 출장소장으로 근무하던 호포의 중심 공간. 현재는 영화 속 분위기를 재현한 공간에서 레트로 전화기와 책상, 호포 지도, 소파와 촬영 소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배우들의 핸드프린팅도 놓치지 말 것.
07 골목 벽화들
남창리 골목 구석구석에는 <호프>의 주요 장면을 옮겨 그린 벽화가 숨어 있다. 배우들의 표정부터 영화 속 분위기까지 디테일하게 담아낸 것이 포인트! 훌륭한 포토존이니 인증숏 한 장 남기고 지나갈 것.
여행 Tip
기차 타고 떠나는 1박 2일 시네마 여행
영화 <호프>를 따라 해남을 여행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코레일관광개발의 ‘HOPE는 핑계GO! 오직 해남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시네마&별미 투어’에 주목하자. 북평면 영화 테마거리를 비롯해 땅끝마을, 흑석산 치유의숲, 우수영 관광지 등 해남의 명소를 둘러보고, 애호박 고추장 고기찌개와 닭 코스요리 등 로컬 미식까지 즐기는 알찬 1박 2일 코스다.
■HAENAM CHECKLIST!
해남까지 왔다면 꼭 들러야 할 3곳
01 천년고찰 미황사
달마산 기암괴석을 병풍처럼 두른 천년고찰. 대웅전에는 500년 가까운 세월을 품은 나무 기둥이 남아 있고, 주춧돌에는 거북이와 게 등 해양생물을 본뜬 문양이 숨어 있다. 불에 취약한 목조건물을 물의 기운으로 누르기 위한 해학적인 장치라고. 향문 스님과 차 한 잔 나누며 미황사의 숨은 이야기를 듣는 차담도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쉼이다.
02 대한민국 육지의 끝, 땅끝마을
해남의 바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땅끝마을에서 땅끝탑까지 이어지는 해안 데크길을 걸어 보자.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 잘 정비돼 있어 부담 없이 산책하기 좋다. 걷다 보면 바다 위로 41m나 불쑥 뻗은 땅끝 스카이워크와 마주한다. 투명한 강화유리 아래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여 제법 짜릿하다. 조금 더 걸으면 한반도 육지 최남단을 상징하는 땅끝탑이 기다린다. 남파랑길의 종점이자 서해랑길의 시작점. 말 그대로 ‘끝이 곧 시작’인 장소다.
03 울돌목을 건너, 진도타워까지
명량대첩의 역사와 풍경을 한 번에 훑기 좋은 알짜 동선 한 가지. 우수영관광지에서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을 둘러본 뒤, 명량해상케이블카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 진도타워까지 이어 가는 코스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바다, 울돌목에서는 거센 조류와 소용돌이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수에 따라 발생하는 수위 차가 약 3m에 이르며, 한쪽 방향 13대씩 운행하는 케이블카 캐빈은 명량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의 ‘13척’을 상징한다고. 진도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방금 건너온 울돌목과 진도대교, 해남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며 여정에 멋진 마침표를 찍는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