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은 웅장한 풍경으로 기억되고, 어떤 여행은 혀끝에 맴도는 맛으로 각인된다. 여기, 결이 다른 두 가지 이미지가 여행자를 기다린다. 구름을 뚫고 솟은 후지산 아래 그윽한 녹차 향이 머무는 곳, 시즈오카. 그리고 잔잔한 세토내해의 물결 너머 예술이 숨 쉬는 섬과 쫄깃한 우동의 온기가 반기는 다카마쓰. 고요한 산의 도시에서 마음을 비우고, 낭만적인 예술의 섬에서 영감을 채우는 시간이다.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향하는가.
시즈오카 SHIZUOKA
시즈오카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을 배경으로 웅장한 폭포, 드넓은 차밭이 펼쳐진 풍경을 자랑한다. 후지산과 아시타카산 등을 포함한 후지 화산대가 이즈반도까지 이어져 있어 풍부한 온천도 즐길 수 있다. 또 도쿄와 나고야의 중간에 위치해 시즈오카 도심에서 에도 시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데, 슨푸성, 칸바라 등이 대표적이다. 옛 모습과 자연 경치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여행지인 셈이다.
후지산이 빚은 풍경, 시라이토 폭포
후지산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공간이자 시즈오카 자연 전반에 영향을 준다. 후지산의 맑은 숨결이 빚어낸 시라이토 폭포도 그중 하나다. 시라이토 폭포는 높이 20m, 너비는 약 15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반적인 폭포와 달리, 이곳의 물은 강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후지산에 내린 눈과 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단단한 용암 벽의 틈새를 통해 다시 솟아오르는 복류수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물줄기가 절벽을 타고 섬세하게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하얀 명주실을 드리운 것 같다고 하여 시라이토(흰 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맑은 날에는 폭포수 위로 무지개가 걸리는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고, 폭포 웅덩이의 물빛은 보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 정도로 투명하다.
시라이토 폭포에서 도보로 약 3~5분 거리에는 또 하나의 물줄기, 오토도메 폭포(音止の滝)가 있다. 높이 26m에서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호쾌한 물소리를 자랑한다. 이 두 폭포는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완전히 대조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주차장에서 폭포로 향하는 산책로에는 다양한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들이 즐비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는데, 이곳에서 B급 구루메 그랑프리 우승에 빛나는 후지노미야 야키소바를 맛보는 즐거움도 놓치지 말자. 쫄깃한 면발, 양배추, 오징어, 그리고 독특한 식감의 니쿠카스가 더해진 별미다.
물 위에 뜬 거꾸로 된 산
후지노미야 시내 한복판, 물 위에 거꾸로 선 거대한 나무 산이 시선을 압도한다. 2017년 12월, 후지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문을 연 시즈오카현 후지산 세계유산센터(Mt. Fuji World Heritage Centre, Shizuoka)다.
세계적인 건축가 반 시게루가 설계한 이 건물은 거꾸로 뒤집힌 원뿔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앞 얕은 연못인 수반에는 후지산의 용출수를 사용했는데, 맑은 물에 건물의 반영이 비치면 비로소 완벽한 후지산의 모습이 완성된다. 내부는 단순히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1층부터 최상층까지 이어지는 193m 길이의 나선형 슬로프 ‘등반하는 후지’가 핵심이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벽면에 투사되는 타임랩스 영상을 통해 바다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고도에 따른 식생의 변화를 감상하며 실제 등산하는 듯한 가상 체험을 할 수 있다.
슬로프의 끝, 최상층 전망 홀에 다다르면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웅장한 진짜 후지산과 마주하게 된다. 건물 외벽을 정교하게 감싼 수많은 나무 격자는 모두 지역 특산물인 후지 히노키(편백나무)를 사용해 숲의 향기를 더했다. 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인 후지산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는 이곳은, 산을 오르지 않고도 그 높고 깊은 매력을 탐험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다.
후지산이 빛나는 기적의 호수
후지산의 웅장함을 가장 평화롭게 마주할 수 있는 장소다. 해발 650m에 자리한 타누키 호수는 맑은 공기와 잔잔한 수면 덕분에 호수에 비친 후지산을 감상하기 좋은데, 큐카무라 후지 앞에 있는 전망 데크가 최적이다. ‘더블 다이아몬드 후지’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매년 4월 20일과 8월 20일 전후, 후지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호수 면에 완벽하게 반사돼 마치 2개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또 호수 둘레 3.3km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거나 여유롭게 걷기에도 좋다. 봄에는 350여 그루의 벚꽃이, 초여름에는 북쪽 호반의 반딧불이가 여행자를 반기고, 보트와 캠핑 등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도 가능하다.
시즈오카의 맛있는 색, 초록
시즈오카의 미식은 색감으로 말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색은 찻잎의 초록색이다. 일본 전체 차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차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시즈오카 차의 역사는 1244년 쇼이치 고쿠시가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심은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가문의 무사들이 마키노하라 대지를 개간하며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됐다. 일본 내에서도 여전히 시즈오카산 차는 최고급 차로 통한다.
특히 2013년, 억새와 조릿대를 이용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전통 농법인 ‘차구사바 농법’이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시즈오카 전역에는 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하다. 시즈오카에서는 슨푸성 공원에 자리한 모미지야마 가든 티 룸과 모던한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고, 구입할 수 있는 차가마(Chagama) 등이 있다. 교외로 나가면 녹차 투어가 가능한 카도데 오이가와(KADODE OOIGAWA), 다도 체험과 말차 갈기 등 오감으로 차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후지노쿠니 차의 수도 뮤지엄(Fujinokuni Tea Museum)도 있다.
또 다른 선물은 와사비다.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시즈오카 물와사비는 맑은 용수가 솟아오르는 계단식 밭에서 비료 없이 물의 양분만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키운 와사비는 단순한 매운맛을 넘어 은은한 단맛과 향긋함을 자랑한다. 갓 갈아낸 생와사비를 밥 위에 얹어 간장을 살짝 뿌려 먹기만 해도 근사한 요리가 된다. 또 뿌리를 술지게미에 절인 와사비 절임은 시즈오카 대표 기념품 중 하나다.
초록빛 향연 외에도 시즈오카는 먹거리 창고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바다, 스루가만에서만 잡히는 벚꽃새우(사쿠라에비)는 달큼한 맛이 좋아 튀김이나 솥밥 재료로 활용되고, 검은 국물과 다시코(생선 분말을 섞어 만든 가루)가 특징인 시즈오카 오뎅, 아름다운 마블링을 품은 시즈오카 와규도 있다. 디저트로는 시즈오카 딸기 품종인 베니홋페와 아키히메를 활용한 파르페를 맛보고, 귤과 멜론도 여행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글 트래비, 사진 시즈오카현, 에디터 이성균 기자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