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가 브랜드 최초의 순수 전기 SUV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을 정식으로 공개했다. 2021년 개발 계획이 처음 발표된 이후 5년 만이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기존 가솔린,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모델과 동일한 차체와 비율을 유지하면서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배터리와 구동 모터, 열관리 시스템까지 자체 개발과 생산을 고수한 점도 눈에 띈다. 랜드로버 측은 외부 공급 대신 내재화를 택하면서 개발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고 밝혔다. 대신 완성도를 우선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344셀로 구성된 니켈망간코발트(NMC) 각형 배터리를 이중으로 쌓은 더블 스택 구조를 채택했다. 실사용 용량은 118.5kWh다. 셀은 일본 AESC에서 공급받으며, AESC는 현재 중국 엔비전그룹 소속이다.
주행거리는 WLTP 기준 최대 600km(372마일)를 확보했다. 미국 EPA 기준으로는 333마일 수준으로 예상된다.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이나 루시드 그래비티 등 400마일을 넘는 경쟁 모델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운 수치다.
마틴 림퍼트 레인지로버 총괄 디렉터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주행거리와 성능 사이의 균형을 강조했다. 배터리 용량을 더 키우면 무게가 늘어나 오프로드 주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 고객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완충 1회로 전체 고객 이동의 97%를 소화할 수 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됐다.
충전 속도는 준수한 편이다. 800V 아키텍처와 350kW 급속 충전을 지원해 10%에서 80%까지 22분이면 충전이 끝난다. 10분 충전으로 최대 220km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완속 충전은 11kW 기준 13시간, 7kW 기준 19시간이 소요된다.
파워트레인은 앞뒤 차축에 각각 260kW 영구자석 모터를 배치한 사륜구동 방식이다. 합산 출력은 550PS, 토크는 850Nm에 달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3초 만에 도달하며, 시속 80km에서 120km 구간 재가속도 2.7초 만에 마친다.
차체는 기존 가솔린,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모델과 동일한 MLA-플렉스 아키텍처를 공유한다. 다만 배터리와 전동 구동계 덕분에 비틀림 강성이 50% 향상됐다. 공차중량은 플러그인하이브리드 대비 75kg 늘어나는 데 그쳐, 순수 전기 SUV로서는 상당히 절제된 증가폭을 보였다.
오프로드 성능도 유지됐다. 트랙션 관리 시스템은 50밀리초 간격으로 모터 속도를 조정하며, 휠 슬립 제어 속도는 내연기관 대비 100배 빠르다. 원 페달 모드에서 33도 경사로를 오르고, 롤링 방식으로는 45도 경사까지 등반이 가능하다. 도강 가능 수심은 900mm에 달한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에는 영국 워릭 어쿠스틱스가 개발한 정전용량형(electrostatic) 스피커가 옵션으로 제공된다. 양산차에 탑재되는 세계 최초 사례로, 코일과 마그넷 없이 1밀리미터 두께의 진동막만으로 소리를 재현하는 구조다.
반응 속도는 기존 스피커 대비 1000배 빠르고, 에너지 소비는 90% 줄었다. 무게와 부피 역시 90% 가까이 감소했다. SV 울트라 트림에는 기본 탑재되며, 다른 트림에서는 1만2570달러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다. 배터리 100kWh 기준 최대 20마일의 주행거리를 절약하는 효과도 있다는 게 개발사의 설명이다.
미국 판매 가격은 13만8000달러(목적지 배송비 별도)부터 시작한다. 가솔린 기본 트림인 SE보다 약 2만5000달러 비싸다. 영국 가격은 15만4070파운드부터다.
국내 주문은 2026년 9월부터 접수되며, 공식 출시는 2027년 중순으로 예정돼 있다. 트림은 스탠다드 휠베이스 오토바이오그래피와 롱 휠베이스 SV로 구성되며, 국내 인증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정확한 주행거리와 가격이 확정될 전망이다.
생산은 1970년부터 레인지로버를 만들어 온 영국 솔리헐 공장에서 이뤄진다. 배터리와 전동 구동계는 울버햄튼 전기 파워트레인 생산센터에서 공급받으며, 레인지로버 일렉트릭 하나에만 300건에 달하는 특허가 출원됐다.
같은 시기 공개된 제네시스 플래그십 전기 SUV GV90과 비교하면 두 모델의 접근 방식 차이가 뚜렷하다. GV90은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통해 공개됐으며, 국내 인증 절차를 사실상 마무리한 상태다.
배터리 용량은 GV90이 123.5kWh로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의 118.5kWh보다 5kWh가량 크다. 출력 역시 GV90이 전륜 326마력, 후륜 340마력을 합산해 666마력을 낸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의 550PS(약 542마력)보다 100마력 이상 높은 수치다. 다만 공차중량도 GV90이 3030kg으로 더 무겁다.
주행거리는 인증 방식 차이로 단순 비교가 어렵다. GV90은 국내 인증 기준 복합 481km를 확보했고,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WLTP 기준 최대 600km를 내세운다. 시험 방식과 조건이 다른 만큼 실제 국내 인증 이후 수치로 다시 비교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 철학은 정반대에 가깝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기존 가솔린 모델과 외관을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며 충전구와 배기구 유무 정도로만 구분된다. 반면 GV90은 네오룬 콘셉트에서 이어진 환원주의 디자인을 앞세워, 최상위 트림에는 B필러를 없앤 코치도어를 적용했다.
가격대는 GV90이 1억3000만원대부터 최상위 트림 기준 3억원대까지 폭넓게 형성돼 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미국 기준 13만8000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1억9000만원대부터 시작해 진입 가격 자체는 GV90보다 높게 책정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출시가 예정된 2027년 중순 무렵에는 두 모델이 대형 럭셔리 전기 SUV 시장에서 직접적으로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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