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김예지 기자] 넷플릭스가 K-콘텐츠의 세계 확산을 뒷받침하는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를 ‘제2의 제작’으로 규정하고, 전문 인력과 제작 체계 구축에 힘을 싣고 있다. 넷플릭스는 인공지능(AI) 번역 기술의 성능이 높아지는 추세 속에서도 작품 고유의 감정과 맥락을 살리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콘진원)과 넷플릭스는 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글로벌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워크숍’과 연계한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 라운드테이블’을 공동 개최했다. 양사는 단순 번역을 넘어 국가별 서사가 지닌 정체성과 정서를 세계 시청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현지화 노력을 공유했다. 넷플릭스는 현지어 자막과 더빙, 화면 해설 등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전문 인력 및 제작 생태계가 갖는 가치에 주목했다.
현지화는 제2의 창작…넷플릭스, 파트너사 122곳과 협업
구경본 콘진원 콘텐츠기반본부장은 “현지화는 언어를 바꾸는 것을 넘어 작가의 창작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는 과정으로, 작품이 새로운 문화권에서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콘텐츠 제작의 연장선이자 ‘제2의 창작’”이라 설명했다. 캐서린 르타트 넷플릭스 글로벌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시니어 디렉터도 “현지화는 콘텐츠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고, 현지 문화에 맞게 각색하는 일련의 과정과 경험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며, “현지화는 더 이상 부차적인 후반 작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K-콘텐츠는 단일 작품의 흥행을 넘어 IP 포맷 수출과 리메이크 등 다각도로 확장되고 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글로벌 회원의 80%가 한국 콘텐츠를 시청한 경험이 있으며, 응답자의 64%는 한국 작품을 접한 뒤 한국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고 답했다. 글로벌 톱 10에 이름을 올린 한국 작품은 200편을 웃돈다.
이러한 흐름의 바탕에 현지화 전략이 있다. 넷플릭스는 현재 최대 36개 언어 더빙과 33개 언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흥행작 ‘오징어 게임’ 시즌3는 역대 한국 작품 중 최대 규모로 현지화가 추진됐다. 아울러 이창동 감독의 신작 영화 ‘가능한 사랑’ 역시 다음 달 6일 공개를 앞두고 자막 32개, 더빙 18개 언어로 현지화 작업을 마쳤다.
캐서린 르타트 디렉터에 따르면 이러한 자막과 더빙 작업에는 본 제작에 버금가는 막대한 인력이 투입된다. 단일 언어 더빙 한 편에 성우, 번역가, 각색가, 연출가, 음향 엔지니어, 품질 검수(QA) 담당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 약 50~60명의 전문가가 참여한다. 10개 언어 더빙 시 투입 인력은 500명을 넘어서며, 넷플릭스가 연간 선보이는 한국 작품 수(20여 편)를 고려하면 연간 1만 명 이상의 현지화 인력이 투입되는 셈이다. 현재 넷플릭스는 전 세계 4개 권역에서 122개 협력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엄격한 기술·창작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적·언어적 맥락 살리기가 핵심
이어진 패널 토크에서는 한국 고유의 표현과 문화적 뉘앙스를 외국어로 어떻게 변환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넷플릭스는 원작자의 창작 의도와 원작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번역 방식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영어 자막을 담당한 달시 파켓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는 동시에, 외국과 차별화되는 한국어만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감독 및 제작진과 오랜 논의를 거쳤다”고 밝혔다.
존 드미타 UCAN 글로벌 영어 프로덕션 시니어 매니저는 호칭과 맥락의 중요성을 짚었다. 그는 “’오빠’라는 단어는 가족, 연인, 아는 오빠 등 관계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 단일 영어 단어로 1대1 매칭이 불가능했다”며, “상황에 맞춰 단어를 고유어 그대로 살리거나 인물의 이름, 친근한 호칭으로 대체하고, 대사의 억양과 말투로 관계성을 보완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더빙 시 현지 배우와 작가는 물론 한국인 전문가의 자문을 고루 거쳐 문화적 균형을 조정하고 있다.
유머나 말장난처럼 직역이 불가능한 대목에서도 원작자의 의도를 최우선으로 파악한다. 웹툰이나 소설 원작 콘텐츠의 경우에는 원작자와 직접 소통을 거친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캔들’은 해외 시청자들이 대사뿐만 아니라 화면 내 텍스트 정보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몰입할 수 있도록 음악감독, 번안가, 성우가 함께 가사를 옮기고, 전용 서체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미국 내 한국 콘텐츠의 영어 더빙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넷플릭스는 신규 인재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스튜디오 파트너 네트워크를 지속해서 확장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현지화 네트워크 확장은 더 많은 배우와 번역가들에게 기회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또한 “콘진원 같은 전문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의 전문가들을 글로벌 제작진과 지속 연결하고 있다”며, “양방향 현지화 작업 모두에서 뛰어난 인재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AI는 도구, 예술은 사람의 몫
넷플릭스의 이러한 노력은 AI 시대 인상적인 행보다. 캐서린 르타트 디렉터는 “AI가 창작자와 인재를 돕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사람 전문가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특히 ‘가능한 사랑’과 같이 감정 선이 섬세한 작품의 더빙은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다. 현지화 작업은 예술의 한 영역인데, AI는 예술을 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업계 전문가들은 문장의 단순 직역은 AI로 충분할지 몰라도, 작품 속 존댓말과 세대별 말투, 인물 간 미묘한 갈등 구조까지 담아내기엔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문화적 맥락, 역사적 배경, 한국 특유의 정서와 유머는 AI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의 영역이라는 분석이다. AI 번역의 성능이 높아질수록 최종적인 문화적 해석과 언어적 완성도를 책임지는 사람 번역가 및 연출가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넷플릭스와 콘진원은 2024년부터 ‘프로덕션 아카데미’를 3년째 공동 운영하며 국내 방송영상 인력 3000여 명에게 글로벌 제작 노하우를 전수해 왔다. 이번 워크숍 역시 라이브 및 영상 팟캐스트 등 신규 포맷의 현지화 트렌드, 영어 자막·더빙 고도화 방안, 해외 시장별 성공 사례를 다루며 국내외 전문가 간 교류를 확대하는 장으로 마련됐다.
구경본 본부장은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가려면 창작 역량과 함께 문화적 장벽을 해소하는 전문 로컬라이제이션 생태계가 필수적”이라며, “콘진원은 국내 영상 제작 전문 인력의 역량 전문성을 높이고, 생태계 확장을 위해 넷플릭스와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IT동아 김예지 기자 (yj@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