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서스 ES가 풀모델체인지를 통해 국내 출시되었다. 섀시가 FF 베이스라는 점은 역대 모델과 동일하지만, 신형 모델에서는 차체 사이즈가 대폭 확대되었다. 한때 'LS' 기반의 6륜 미니밴 콘셉트가 등장했던 것처럼, 신형 ES는 향후 렉서스 세단 라인업의 중심이자 총대를 메는 역할을 맡게 된다. 렉서스 ES 500e와 350h를 직접 타보고 느낀 인상을 전한다.
2001년 국내 시장에 처음 도입되어 브랜드를 알린 렉서스 ES. 도입 시점으로만 보면 렉서스 역사상 가장 뿌리 깊은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2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ES는 7세대에 걸쳐 꾸준히 진화해 왔다. 렉서스 브랜드 전체의 판매량을 견인하는 '대들보'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현재는 그 역할을 'RX'나 'NX' 같은 SUV 라인업이 맡고 있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자가용의 표준 해답이 더 이상 세단이 아닌 SUV가 되면서, 각 제조사는 혼신의 힘을 다한 SUV 모델들을 투입해 시장은 그야말로 격전지가 되었다. 반면 세단 시장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S는 '렉서스 최선의 선택지'라는 자리를 성공적으로 이어받았다. 물론 과거만큼 폭발적인 판매량 신장을 기대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 세계시장에서 신뢰받아 온 렉서스로서는 세단을 포기하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전체 판매량 측면에서 보더라도 ES는 여전히 렉서스를 받치는 든든한 버팀목 중 하나다.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같은 이동 수단이라 할지라도 SUV가 아닌 '세단'만이 구현할 수 있는 독보적인 주행 감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자동차 개발 관계자들이 자주 말하는 "모든 기본은 세단에 있다"는 철학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운전대를 잡았을 때 피부로 와닿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이렇게 완성된 8세대 신형 ES. 이번 풀모델체인지의 가장 큰 핵심은 모든 선택지에서 완전 전동화를 달성했다는 점이다. 파워트레인은 하이브리드(HEV)와 순수 전기차(BEV) 두 가지 라인업으로 병행 판매된다.
트림명을 살펴보면 HEV 라인업은 '350h', BEV 라인업은 '350e'와 '500e'로 각각 구성된다. 참고로 일부 해외 시장 전용 모델로 300h도 존재한다. 350h 트림에서는 FF(전륜구동)와 4WD(사륜구동) 두 가지 구동 방식을 모두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BEV 트림의 경우, 350e는 전륜 1모터 기반의 FWD, 500e는 전·후륜 2모터 기반의 4WD 시스템이 탑재된다.
플랫폼은 이전 7세대 ES에서도 사용되었던 D-세그먼트 중심의 GA-K 플랫폼을 베이스로 하지만, BEV와 HEV 파워트레인을 함께 사용하기 위해 핵심 부위에 대대적인 구조 개선이 이뤄졌다. 지난 몇 년간 파워트레인 트렌드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브랜드 라인업이 다변화됨에 따라, '멀티 패스웨이(Multi-Pathway)' 전략을 내세우는 토요타 역시 플랫폼 전략을 지속적으로 수정·발전시키고 있다.
플랫폼 개발 측면의 복잡한 사정을 차치하더라도, 신형 ES는 세계 각지에서 렉서스 세단을 대표하는 총대이자 리더 역할을 맡겠다는 명확한 의지가 엿보인다. 전장은 현행 LS보다 약간 짧은 수준이지만, 바닥면이 높아져 전고가 1,550mm 안팎까지 높아졌다. 도로 위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볼륨감과 존재감만 놓고 보면 LS를 뛰어넘는 중압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외관 디자인에서 대형 차급 특유의 위압감이나 둔중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동화 전환에 따라 냉각 성능 확보를 위한 디자인적 제약이 줄어들면서, 렉서스의 시그니처인 '스핀들 그릴' 디자인을 차체 전체의 조형으로 승화시킨 RX의 수법이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참고로 HEV와 BEV의 외관상 차이는 프런트 페이스 선단부에 엔진 냉각을 위한 덕트(에어 인테이크)가 뚫려 있는지 여부로 손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인테리어는 대시보드 중심에 수평선이 시원하게 지나는 T자형 레이아웃을 취하고 있다. 계기판 클러스터 하우징을 없앤 앰비언트 액정 계기판 주변에는 고급스러운 질감을 연출함과 동시에 빛 반사를 억제하는 소재를 적용하는 등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최근 신차들에서 앰비언트 라이트 연출은 흔해졌지만, 신형 ES는 대나무 문양의 센터페시아를 은은하게 비추는 일루미네이션을 통해 절제미와 품격을 선사하며 렉서스다운 정체성을 살려냈다.
뒷좌석 공간은 단연 ES의 최고의 셀링 포인트다. GA-K 플랫폼의 구조적 이점을 극대화하면서 레그룸 공간은 물론, 꼼꼼하게 튜닝된 헤드룸 공간 역시 상급 FR(후륜구동) 기반 라이벌들이나 LS와 비교해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압도적인 개방감을 제공한다. 350e VIP 모델에는 리어 컴포트를 강조한 오토만 시크가 적용되어 있는데, 등받이를 슬라이딩하며 오토만을 펼칠 때 느껴지는 안락함은, 순수 좌석 감성만 놓고 보면 현행 LS 이그제큐티브 트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다만 '남이 운전해 주는 차(쇼퍼 드리븐)'로서의 선택지가 미니밴부터 대형 SUV까지 차고 넘치는 요즘 시대에, ES가 세단으로서 선택받기 위해서는 '오직 세단이어야만 하는 독자성'을 증명해야 한다.
새롭게 라인업에 합류한 BEV(순수 전기차) 모델은 차체 바닥에 74.7kWh 용량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했다. 1회 충전 주행거리는 1모터 사양인 350e가 478km, 2모터 사양인 500e가 435km.
시승 코스는 아스팔트 포장태가 시시각각 바뀌는 고속도로부터 곳곳에 포트홀이 방치된 노후 도심 도로까지, 다채롭고 가혹한 노면 환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차고가 낮고 노면 소음에 취약한 세단에게는 꽤나 혹독한 조건이었지만, 압도적인 정숙성을 자랑하는 BEV 버전 ES에게는 오히려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가 되었다. 안락하고 차분한 승차감이 더욱 또렷하게 부각되었다.
승차감 특성으로는 과속방지턱이나 맨홀 뚜껑 같은 직각 형태의 요철을 통과할 때 순간적으로 약간의 강한 리액션이 튀어나오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하지만 전반적인 도로의 잔진동이나 소음은 부드럽게 잘 걸러내며, 큰 굴곡을 만났을 때 휠 하우스 하부의 추종성과 차체 상부 스티어링의 수렴성 역시 매끄럽고 깔끔하게 정리해 낸다. 후륜 서스펜션은 BEV 전용 하부 구조에 맞춰 멀티링크 방식을 새롭게 설계했는데, 스트로크 세팅이나 지오메트리 밸런스 측면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주행 안정성과 핸들링의 균형점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다만, "이 차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결정적 한 방"이라는 측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가속 파워 측면에서 보면, 폭발적인 순발력을 자랑하는 일반적인 BEV들과 달리 동력 성능을 짐짓 겸손하고 차분하게 정제하여 제공한다. 0-100km/h 가속 성능은 350e가 8.2초, 500e가 5.5초다. 일상 주행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지만, 수치상의 자극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ES의 파워트레인은 훌륭하게 다듬어져 있어, 350h와 500e 모두 가속 페달 조작만으로 운전자가 의도한 속도까지 매끄럽고 순조롭게 차체를 밀어붙인다. BEV 기술 구조상 억지로 가속력을 끌어올려 차를 빠르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신형 ES에게 속도는 최우선 가치가 아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극상의 평온함과 안락함을 전달할 수 있는가'가 ES에 부여된 진짜 미션인 셈이다.
이러한 브랜드의 탁월한 견식과 철학을 더욱 강렬하게 실감하게 해주는 모델이 바로 HEV(하이브리드) 사양인 350h다. 토요타 그룹의 6세대 최신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탑재되었다. 모터, 변속기, 인버터 등을 일체형 구조로 설계하여 소음과 진동을 극적으로 줄였으며, 고성능 리튬이온 배터리 채용을 통해 전기 모터만으로 개입 및 주행할 수 있는 영역을 대폭 넓히는 등 동적 완성도의 향상이 눈부시다. 참고로 6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글로벌 시장에 적용된 것은 HEV 모델로서는 이번 신형 ES가 최초이며, PHEV(플러그인 하이브리드)까지 포함하더라도 RAV4에 이어 브랜드 두 번째 사례가 된다.
350h의 주행 감각은 저중심 구조에 기반한 단단한 안정감이 돋보이는 BEV 모델에 비해, 한층 경쾌하고 사뿐한 맛이 두드러진다. 모터의 개입 범주뿐만 아니라 가속 응답성 자체가 정교해져, 가속 시 모터가 보조해 주는 밀어주는 느낌은 때로 엔진 본연의 힘을 압도할 정도다. 탑재된 엔진은 기존과 동일한 형식이지만, 엔진 블록 및 스커트 형상을 정밀하게 리뉴얼하여 소음과 진동(NVH) 성능을 대폭 개선했다. 덕분에 과거 고속 연소 엔진 특유의 카랑카랑하고 거칠게 튀어 오르던 회전음도 매끄럽고 억제된 음색으로 다듬어졌다. 이 역시 극상의 정숙성을 만드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이에 더해 신형 ES는 HEV 모델에서도 모터식 사륜구동 시스템인 'E-Four'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험로나 눈이 많은 지역 운전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신형 ES를 타보면 물리적 한계를 정교하게 지워내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달리고 멈추는 행위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질감과 쾌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세단이란 존재가 증명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글, 영상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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