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는 물에 조금 예민한 편이다. 유럽을 여행할 때면 더욱 그렇다. 유럽의 유명 생수들은 한국에서 평소 마시던 물과 맛도,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도 미묘하게 다르다. 칼슘, 마그네슘 등 물의 성분과 경도 때문인지 어떤 물은 유독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유럽 여행을 떠날 때면 평소 즐겨 마시는 부드러운 생수를 일부러 챙겨갈 정도다.
그런데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호텔 객실에 무료 생수가 없었다. 복도에 정수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음용할 수 있다는 안내 스티커와 화장실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을 그대로 마시면 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평소 깔끔한 물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세면대 수돗물은 꽤 높은 장벽이었다. 세면대는 손을 씻고 양치하는 곳이지, 마실 물을 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식당에서 탭 워터(수돗물)를 내놓는 것에도 익숙하지만,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을 컵에 받아 마시는 행위는 다른 차원이다.
그래도 물맛이 궁금해 조심스레 마셔봤다. 수도꼭지를 가장 오른쪽으로 돌려 차가운 물을 컵에 받았는데, 미지근한 수돗물에서 나는 쇠맛이나 거슬리는 냄새가 덜했다. 하지만 세면대에서 물을 마시는 일이 낯설어 결국 마트에서 생수를 사 왔다.
염소 소독 없는 코펜하겐의 수돗물
조금 더 알아보니 코펜하겐에서는 생수를 구매하는 게 비용도 들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만큼 수돗물에 대한 신뢰가 높은 도시였다. 코펜하겐의 물은 무엇이 다를까. 우선 물의 근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코펜하겐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의 식수는 주로 지하수에서 얻는다. 강이나 호수의 물을 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하 깊은 곳에서 확보한 물을 정수 시설을 거쳐 각 가정에 공급한다.
코펜하겐의 상수도와 하수도, 지역난방 등을 담당하는 공기업 HOFOR에 따르면, 코펜하겐의 수돗물은 별도의 염소 소독 없이 마실 수 있다. 보호된 지하수원과 외부 오염을 차단하는 폐쇄형 정수 시설 덕분이다. 물에 염소를 첨가하지 않아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적다. 그렇다고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HOFOR는 코펜하겐을 포함한 수도권 공급 지역에서 매년 약 2만3,000건의 물 시료를 채취해 세균과 농약 성분, 중금속 등 다양한 항목을 검사한다고 한다.
이런 환경이라서 그런지 코펜하겐의 많은 호텔이 객실마다 생수를 비치하지 않고, 수돗물을 식수로 제공한다. 여행자에게는 낯선 세면대 수돗물이 현지인에게는 일상적인 식수인 셈이다. 참고로 코펜하겐 시내에는 무료로 물을 마시거나 물병을 채울 수 있는 공공 식수대도 60곳 이상 마련돼 있다.
다만, 깨끗한 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드러운 것은 아니다. 코펜하겐의 지하수는 석회질 성분이 많은 경수로도 알려져 있다. 수전이나 전기포트에 하얀 석회 자국이 남기도 한다. 현재 HOFOR는 수도권 곳곳에서 물의 경도를 낮추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항구가 수영장으로 변한 도시
코펜하겐의 물 이야기는 마시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도시를 걷다 보면 바다와 맞닿은 항구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별도의 수영장에 바닷물을 채운 것이 아니라 실제 항구의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소가 이슬란스 브뤼게(Islands Brygge)의 하버 배스와 노르하운의 산드카이(Sandkaj) 수영 구역이다. 코펜하겐 도심에 자리한 공공 수영 시설인데, 날씨가 좋은 5~8월이면 물에 뛰어들거나 수영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쌀쌀한 바람이 불고, 물이 차가워지는 10월에도 산드카이 수영 구역에 몸을 담그는 현지인들이 더러 있었다.
사실 코펜하겐의 항구가 처음부터 깨끗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산업 활동과 하수 유입으로 오염됐던 항구는 오랜 정비를 거쳐 시민들의 수영 공간으로 변했다. 시에서 빗물과 오수를 저장하는 시설을 확충하고 하수 처리 체계를 개선했고, 그 결과 2002년 이슬란스 브뤼게에 오늘날 코펜하겐 항구 수영 문화의 출발점이 된 시설이 문을 열었다.
마시는 물은 지하에서, 수영하는 물은 항구에서 왔지만 두 풍경 모두 물을 일상 가까이에 두고 살아가는 코펜하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코펜하겐에서도 생수를 주로 마셨지만, 물 한 잔 덕분에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더 생겼다. 호텔 세면대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수돗물의 비밀을 지나 시민들이 수영하는 항구까지 이어졌다. 낯선 도시의 사소한 일상이 뜻밖의 여행 소재가 된 셈이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sage@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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