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팔린 콘솔로 신작을 내놓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대형 RPG ‘드래곤 퀘스트’(이하 DQ). 그런데, 차세대기인 PS3, XBOX360, Wii 어느 하나 그렇게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고 보기 힘든 시기에 DQ의 신작이 발표되었다. 스펙에 열중하는 게임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온다면 Wii가 아닐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선택한 기종은 NDS.
거치형 기기로 이어져온 시리즈의 정규 신작이 휴대용으로 나온 케이스가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형 RPG 시리즈의 넘버링 신작이 휴대용 기기로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DQ는 비주얼을 전면에 내세운 시리즈는 아니었기 때문에, NDS로 나와도 DQ 특유의 감각을 느끼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PS2로 나왔던 DQ8에서 획기적인 비주얼 개선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픽 좋은 DQ란 것도 아주 좋은 감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였다. 그 덕분에, 그래픽을 전면에 내세우던 시리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에서는 보다 좋은 비주얼을 기대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기대감 때문에 NDS로의 신작 발표는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처음 DQ9를 공개했을 당시에도, 이미 NDS로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상황일 정도로 개발 진척도는 높았다. 하지만, NDS로 후속작을 내놓는다는 파격 보다 더욱 거대한 파격이었던 장르 전환까지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NDS로 후속작을 내놓는다는 것 보다 DQ의 정식 후속작이 액션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네트워크 플레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NDS로 발표하였고, 네트워크 플레이에 특화된 게임 디자인을 하다 보니 액션 게임 형태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Final Fantasy 시리즈의 변화에서 볼 수 있었던 파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정체된 시스템으로 일관하는 게임은 아니지만, FF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도를 걷는다는 인상이 강했던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파격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일까. 결국 DQ9은 게임을 다시 만들게 된다. 액션 기반의 전투 체제를 포기하고, 전통적인 형태의 커맨드 전투를 도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게임으로 바뀐 덕분에 발매는 상당 기간 연기될 수 밖에 없었고, 이제서야 신작이 나오게 되었다. 전통적이면서도 전통적이지 않은 DQ의 정통 최신작으로.
DQ 초기작은 그저 콘솔에서 게임패드로 RPG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되는 정도에 머물렀다. DQ2는 파티 플레이가 가능해져서 전투를 좀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새로운 요소였다. 그리고 DQ3에 와서는 캐릭터 메이킹을 도입하여, 스스로 원하는 구성으로 파티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것이 크게 어필하여 대단한 판매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원하는 직업들로 파티를 구성할 수 있는 위저드리 스타일의 이러한 구조는 ‘세계수의 미궁’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요즘 다시 각광받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DQ3 이후의 타이틀에서는 전반적으로 직업이 고정된 인물들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DQ9에서는 다시 캐릭터 메이킹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캐릭터 메이킹은 플레이어에게 많은 자유를 부여하게 되지만, 스토리 측면에서 볼 때는 각 파티원 사이의 이야기가 사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의 흐름 사이에 등장한 인물들이 아니라 갑자기 만들어진 인물들이라 스토리에 전혀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스토리의 흐름이 그리 입체적이지는 않다. 대신 그만큼 직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장단점이 있다.
이유 없이 복잡한 요즘 게임들의 스토리라인 보다는 DQ9 같은 스트레이트 한 이야기가 보다 강하게 어필 할 때도 있다. 수호천사인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대신 그만큼 확실하게 이야기를 보여줄 때가 많다. 용자의 모험과는 다른 감성이랄까. 전통적인 시리즈의 전형적인 스토리지만,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많다.
캐릭터 메이킹 외에 DQ8에서 선보였던 스킬 성장 체계도 존재한다. 직업별로 스킬 구조가 구분이 되는데, 각 직업별로도 원하는 방향으로 능력치를 분배해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같은 능력치의 전사를 만날 확률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캐릭터 메이킹과 스킬, 그리고 전직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전직은 DQ3에서도 가능했다. DQ3의 전직은 레벨은 유지하는 형태로 직업간 능력치만 바뀌는 형태였다. 그런데, DQ9의 전직은 ‘파이널 판타지 11’의 잡 체인지와 구조가 비슷하다. 전직을 하면 1레벨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 원래의 직업으로 전직을 하면 레벨 역시 원래대로의 레벨로 돌아가는 구조로, 직업별로 레벨을 따로 올리는 구조였다.
물론 고레벨 캐릭터가 포함된 파티로 전투를 할 경우 경험치는 레벨에 따라 차등 분배되는 구조라 ‘환상수호전’ 같은 놀라운 레벨 점프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게끔 밸런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직업 레벨은 1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지만, 올려둔 스킬은 공유하고 있다.
직업 특성에 의하여 생겨난 마법들은 전직을 하면 사용할 수 없지만, 스킬 포인트를 올려서 익힌 기술은 전직을 해도 사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전직을 활용하면 직업별로 공유하는 스킬 포인트는 빠르게 올릴 수도 있다. 어떻든, 전직을 하면 1레벨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플레이 타임은 원하는 만큼 계속 늘어나는 셈이다.
게다가 FF11과 마찬가지로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추가 직업들도 있다. 이 역시 전직을 하면 레벨 1부터 시작하기에 스토리 흐름이 단조로운 감은 있지만, 레벨링을 끝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바로 DQ9이다. 99레벨까지 키운 직업은 전생을 통해 스킬만 계승한 형태로 다시 1레벨부터 키울 수도 있어서, 모든 스킬을 다 얻을 때까지 끝없이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액션 기반에서 커맨드 선택 스타일로 돌아온 덕분에 당초 내세웠던 멀티플레이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멀티플레이가 wi-fi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MMORPG를 즐기는 듯한 감각도 아니고, 같은 세계에서 각각의 적을 잡아 나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발표 당시 멀티플레이를 강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록을 한 정도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대신 wi-fi를 통해 새로운 퀘스트를 받거나, 몇몇 아이템들을 구입할 수 있는 형태로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퀘스트의 경우 제법 긴 기간 동안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니, 지원을 종료할 때까지는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세운 것만큼 거창하지는 않지만, 1인 플레이 기반의 콘솔 RPG에서 이 정도의 네트워크 지원이라면 서비스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 플레이를 고려한 게임 디자인이었기에 이런저런 복장을 갈아입을 때 마다 화면에 바로 반영이 되는 것도 강점이다. MMORPG에서는 이러한 복장 반영이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콘솔 RPG에서는 그러한 케이스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반영되는 건 무기 외형 정도. 그런데 DQ9는 모든 복장의 변화가 바로 반영되기 때문에, 능력치가 다소 낮더라도 보기 좋은 장비를 선택하게 되기도 한다. 이모션 동작들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러한 동작들을 그저 멀티에서만 활용하도록 한 게 아니라, 게임 진행에도 종종 활용하도록 한 점이 재미있다.
멀티플레이를 고려한 게임 설계 덕분에 나오게 된 거대한 변화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바로 화면에 적이 보인다는 점. 랜덤 인카운트 전투의 대명사였던 DQ에서 드디어 화면에 적이 보이게 된 것이다. 이는 한 필드에 있는 적을 같이 잡아 나가기도 한다는 멀티플레이 컨셉 덕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원하는 적 위주로 전투를 한다던가, 던전을 진행할 때 적을 피해 다니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작들에 비해서는 난이도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보스들은 질기기 때문에, 레벨링은 필수가 된다. 그래서 적을 피해 다닐 수 있다고는 하지만, 열심히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은 여전하다. 화면에 적이 보이는 게임들은 대체로 적의 뒤를 노려서 접근하면 첫 턴을 보다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DQ9에서는 그런 식으로는 활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리하게 전투를 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습격을 당해 불리해지는 일도 없으니, 이 편이 부담은 덜하다. 화면에 적이 보이는 DQ9에서 재미있는 것은 메뉴를 열고 있는 동안에도 적들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메뉴가 열려있는 동안에는 바로 전투로 돌입하지는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필드에 가만히 캐릭터를 세워놓고만 있어도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전형적인 게임이란 인상이 강했던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이지만, 시리즈 별로 게임을 플레이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신선한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걸 느낄 때가 많은데, DQ9의 경우 전통의 답습이 아닌 신선한 조화를 느낄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 최신 스펙의 거치형 기기가 아니라 PS2 보다도 낮은 스펙인 NDS로 정식 후속작을 만나게 된 것이 아쉬울 수도 있지만, 끝없이 즐길 수 있는 사상 최대의 볼륨으로 등장한 정통 최신작임에는 틀림없다.
NDS 기준으로 볼 때는 가장 좋은 비주얼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음악 역시 곡 수는 그리 다양하지 않지만 NDS의 스펙을 아주 깔끔하게 활용하여 좋은 퀄리티를 보여 준다. NDS로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방대한 볼륨을 은근히 쾌적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의 기대에 어긋난 게임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정통 후속작이라는 인상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게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