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재단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필자는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6년간 기독교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대학교까지 포함하면 장장 10년이 된다. 매일 기도와 찬송으로 조회가 시작되었으며, 일주일에 한 번은 전용 강당에서 전교생의 예배시간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주말이면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다. 10대 시절 교회를 출입하던 필자의 관심사는 예배나 신앙심보다는 초등학교 졸업과 더불어 단절되었던 뽀얀 살결의 여학생들과 근거리에 있을 수 있다는 데 주로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런 교회와 예배 문화가 부지불식간에 필자에게 심어 놓은 기억은 꽤나 강렬할 때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예컨대 매주 듣게 되는 성가대의 합창은 여전히 아름다운 그리고 감동의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예배시간에 대해 필자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필자가 성가대의 찬송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한 학기에 한 번씩 열리는 교내 합창 경연대회는 10대 시절 필자의 감성 속에 마치 오랜 동안 발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있던 퇴적층처럼 필자의 감성 아카이브에 잘 보존되어 있다.
필자가 지금껏 합창, 미사곡에 자연 관심이 가거나 코러스 부분에 멈추어서 어줍지 않은 평가를 들이대곤 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 크게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금의 합창 녹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실제 예배시간의 처음을 알리는 포인트 중의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차임벨 소리이다. 목사님의 특별한 스킬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작은 종은 짧은 음 하나만으로 순간 넓은 회장을 정적으로 집중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마치 마술피리같은 이 신기한 물건을 예배가 끝나는 언젠가 용기를 내서 한 번 울려본 적이 있으나, ‘땡’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나이 많은 장로님의 따가운 눈총 속에 소스라치게 자리를 피했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필자가 그날 울려본 종소리는 예배시간에 뒷 자리에 앉아서 듣던 소리와는 많이 달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작은 종소리는 근거리에서는 크게 감지되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져서 들어야 제대로 그 울림이 전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세고비아가 세종문화회관 공연시에 들릴 듯 말 듯한 울림으로 공연장 뒷자리까지 또렷하게 들리게 연주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이해가 갈 듯 하다. 요컨대 어쿠스틱의 이해는 전문연주자나 오디오파일만의 관심사가 아니고 교회 목사님들에게도 부지불식간에 공유되어 있는 우리 생활과 근접해 있는 이슈인 것이다.
딱 필자가 아는 세수대야와 사이즈와 모양새가 비슷하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될 만큼의 용량과 디자인을 하고 있다. 제품의 정식 명칭은 PMR(Passive Multivocal Resonator), 전술한 예배시간에 쓰는 벨 제조용으로 사용하는 동(銅)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에 따라 같은 재질의 동과 주석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동일 부문 마이스터에 의해 교회 종을 만드는 주조기법으로 당연하게도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이런 약식 사출 방식으로 틀에 금속액체를 부어 제작되는 제품의 공통점으로서 공정에 따라 양산되는 제품과 달리 일종의 규격화되지 않은 투박함 마저 느껴진다.
그 밋밋한 삼점 지지 받침대만 해도 그렇다. 요즘 인테리어 소품 수준의 음향 액세서리가 얼마나 허다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 제품의 인상은 소리를 듣기 전과 후로 크게 대비가 된다. 스포일러 소리를 듣더라도 PMR을 설치한 채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면 서서히 시청자의 표정은 바뀌어 갈 거라는 걸 미리 알려주고 싶다.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오랜 동안 들어온 음악일 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이 투박한 모양새의 대야는 마치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잉카제국의 청동거울 마냥 신비로운 대상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분히 ‘흥미롭다’ 정도로 지나치기엔 꽤나 드라마틱하게 음악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다는 데 PMR의 문제가 있다.
제작사인 하이엔드 노범(Hiend Novum; ‘하이엔드의 신세계’)에 따르면 본 제품은 가청 주파수의 한계인 20KHz 이상의 고주파를 발생시키는 효과, 특히 200Hz~3KHz 부근에서 가장 밸런스가 뛰어난 배음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이들의 제작 방식은 물리적 측정 지표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지만 실제 청취를 통해 튜닝을 병행하는데 가청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나서, 물리적으로 측정되지 않는 일반 바이올린과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색의 차이를 분명히 보인다고 한다. 과연 어떤 변화가 있는 지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헤레베헤가 지휘하는 바하의
중 2곡 ‘Christe Eleison’은 어딘가 공기가 긴 잔향으로 뻗어가면서 공간 속에 소멸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음을 끝내고 사라지는 순간 마저 절도가 생겨나 있어서 공간의 크기가 좀더 크게 느껴지도록 명확하게 그려낸다. 연주가 조금 진행되면서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서 그렇지, 실은 음악을 듣는 기분은 상당히 편안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천연덕스럽다고 할까? 시청자를 좋은 의미로 릴랙스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약음에서 연속음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그 어느 때보다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첼로는 마치 윤활제라도 바른 것 마냥 윤기있게 글라이딩한다. 무엇보다 첼로와 보컬이 따로 움직이지 않고 운동의 템포가 거의 같게 느껴져서 흡사 보컬이 노래를 하면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보컬의 근육에서 언제 텐션이 줄어드는 지 음량이 얼마씩 늘어나는 지, 다음 순간이면 높이 올라갈 짧은 시간의 단위를 잘게 쪼개서 따라가고 있었다. 감미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풍성한 울림이다. 이 곡의 새로운 발견이다.
10곡 ‘Qui Sedes’는 이보다 높은 대역과 조금 다른 음색으로 집중력을 발휘한다. 현악기의 서포트가 없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배경이 원래보다 좀더 진하게 어두워져 있는 듯하다. 이로 인해 일반적인 시청에서보다 적막한 배경 위로 음상이 다소 분명하게 떠오르고 있어 보인다. 음상을 선으로 그려서 묘사한다고 했을 때 깊고 진하게 새긴 솔로 보컬의 윤곽이 각도를 변경할 때마다 순간 순간 입체적인 이미징을 잘 떠올려준다. 공명하는 인체의 내부와 그 바깥과의 대비가 잘 구분되어 보인다.
12곡 ‘Cum Sancto Spiritu’는 대역이라든가 정밀한 배음 등의 특성보다는 에너지가 집중되는 합주시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상들과 전후간 입체적으로 잘 정돈된 무대의 조망이 돋보인다. 얇게 중첩된 레이어들이 미세하게 전후간 거리를 감지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모호한 경계면을 남기는 경우를 찾아내기 힘들다. 앰프와 스피커가 효과적으로 결합되었을 때의 상황에 가까운 해상력도 일품이다. 주로 남성보컬이 시작되는 중역대 이상에서 이런 분해력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혼성합창시에도 뭔가 포근한 기운 속에서도 애매한 순간을 남기는 일이 거의 없다. 후반부 관악기의 선명한 울림도 설치 전후의 차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옥타브의 변화가 분명한 맺음을 마무리하고 이동하고 있다. 솔로 보컬시에 비견될 만한 얇고 포근한 배음이 빛을 내고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 특유의 유쾌한 포만감을 잘 부각시켜 준다. 마치 이 곡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 지 잘 알고있는 듯한 명쾌함으로 들려준다.
레핀과 아르헤리치의 <크로이처> 3악장은 의식하고 시청을 하게 할 만큼 무대가 넓어져 있다는 게 가장 눈에 뜨인다. 스피커나 앰프를 통해 무대가 넓어지는 경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은, 무대의 사이즈가 변경되었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배경 속에 피아노의 울림은 당연하게도 좀더 구체적으로 느껴져서 실제 피아노의 하모닉스에 좀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다이나믹스는 파워풀하고 투명함이 증가했다. 좀더 광채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배음에도 대비가 좀더 분명해져서 짧은 순간과 잔향이 있는 순간이 좀더 큰 폭으로 확장되어 있다. 바이올린은 확실히 유연해져 있다.
첼로에서의 느낌처럼 현에 윤활제를 칠한 듯 매끄럽게 글라이딩한다. 배음이 사라지는 순간에 거친 느낌을 남기지 않는다. 현의 울림의 폭이 늘었다기 보다는 같은 폭의 구간을 좀더 잘게 구분해서 보여주는 듯해서 보윙에 표정이 좀더 풍부해졌다는 인상을 준다.
제조사인 하이엔드 노범은 이렇게 얘기한다. 오리지널 음원이 갖고 있는 미세한 떨림과 진동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마치 디지털로 출력한 대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 동감이다. 제조사의 주장대로, 배음효과라는 건 오디오기기로 재생하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머지는 룸 어쿠스틱이 더 많이 해결해주어야 하는 영역으로 보인다. 본 기 Passive Multivocal Resonator (PMR)의 효과는 이렇게 원래 음원의 연주에는 살아 있었던 배음의 음색적 스펙트럼을 되살려주는 데 있다. 그 결과 더 자연스러운 녹음을 들려주며 좀더 넓은 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서로 다른 음색의 재생음은 좀더 또렷하게 구분이 되어 감성적인 시청경험을 준다.
오리지널 PMR은 본 버전 2와 용도와 구조가 사뭇 다르다. PMR mk2는 일반적인 디퓨저처럼 세로로 세워서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외부에서 동심원 내부 방향으로 6개의 굴곡 면을 갖는데 비해서 오리지널 PMR은 눕혀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굴곡이 없는 내부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PMR mk2는 가로와 세로의 폭이 조금 다르다. 스탠드는 그에 맞춰 설치하도록 세팅되어 있어서 잘못 설치할 일은 없지만, 완전 원형이 아니고 세로방향이 조금 더 길게 제작되어 있다. 동사에서는 구경이 정확히 절반으로 제작된 이니시움(Initium)이 있는데, 작은 공간 혹은 PMR mk2와 병행해서 사용하도록 제작되었다.
오디오파일들에게 있어서 룸 어쿠스틱에 대한 이해는 큰 전기를 마련하곤 한다. 특히 스피커 사이에 제거할 것과 설치해야 할 것을 구분하고 터득하는 시점을 경계로 해서 오디오력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분기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스피커 사이의 공간은 원치않는 음파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 난립하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방을 개조하고 붙이고 해야 하는 경우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적극’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보정, 그리고 보정을 넘어선 적극적 룸 어쿠스틱은 권장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간혹 신주 모시듯 주객전도의 모양새가 되는 오버가 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터득하기에 따라서는 하이파이 기변보다 더 큰 폭으로 사운드의 개선을 얻어내는 경우도 많다. 본 PMR mk2는 일반적인 오디오파일은 물론, 같은 곡을 익숙히 시청해 온 많은 음악애호가에게 많은 관심이 예상된다. 배치에 문제가 없다면 일반 음악감상자들의 시스템에서 더욱 변화의 폭이 클 지도 모르겠다. 모양이 어색하다고?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흔한 기념패를 치우고 그 자리에 대신 세워놓으면 더 잘 어울릴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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