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삼은 생긴 것만 독특한게 아닙니다. 주행 특성도 굉장히 독특하죠.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911의 껍데기를 씌운 레이싱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엔진과 미션에서 발생하는 온갖 잡음은 여과되지 않은채 실내로 그대로 파고듭니다. 별에 별 기계적 잡음이 다 나죠. 커피포트 끓는 소리, 욕조 물 내려가는 소리, 어렸을 적 엄마 배를 배고 누웠을 때 나는 우르륵 쾅쾅 소리...

서스펜션은 또 어찌나 딱딱한지 도로 위 모래 한알까지도 시트에 전달하려고 덤빕니다. 가변배기를 열어두면 3,500rpm에서 굉장히 웅장한 사운드가 뿜어져 나오는데 도저히 6기통 엔진이라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사운드가 호쾌합니다. 스티어링휠은 어찌나 예민한지, 롤이 아예 없으며 1mm를 돌리면 그에 따라 정확히 노즈를 움찔하는 기민함에 어찌 보증수리가 가능한 양산자동차가 이러한 주행특성을 품은채 판매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죠.

전 순수함이 좋습니다. 가공되지 않고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그러니깐!! 엔진과 미션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으면 잡음을 내도 좋고, 타이어가 접지를 하려고 끙끙 대면 모래를 차체에 사정 없이 튀겨도 좋습니다. 스티어링휠에서는 노면 정보가 다 전해졌으면 좋겠고, 하중이동 또한 엉덩이로 직관적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제 기준을 충족시키는 자동차는 많지 않습니다. 전 그 해답이 포르쉐 911 GT3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리삼을 출고하고 1,000km 넘게 타보며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업무를 다 보고 청담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청담동 모터쿼드 앞에 서 있는 낯선 녀석을 발견합니다.

평소 로터스를 좋아했던 저로서는 RED2 에 나온 신형 엑시지가 너무나 반갑고 멋져 보였는데,

제 이상형은 순수한 여자입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순수한 여자가 있을까? 싶어서 사귀었는데... 사귀기로 한 다음날 더 순수한 여자가 나타났을 때의 심정은? 제가 로터스 엑시지 S를 바라보는 심정은 이렇듯 복잡합니다.

제 선택은 엉덩이 부터 넣는 거였지만(지리삼 탈 때와 마찬가지로), 오답이었습니다. 둔턱이 너무 높아서 우선 오른발을 저 앞으로 뻗어야 원할한 탑승이 가능합니다. 그런다음 요가하듯 머리를 바짝 숙인채로 엉덩이를 해저삼만리에 쑤셔 넣는다는 느낌으로 밀어 넣은 뒤, 몸이 어딘가에 고정된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왼쪽 다리를 들어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 탑승이 완료됩니다.

가변 배기를 열어 6기통 엔진의 숨소리를 좀 더 가까이서 느껴봅니다. 지리삼이 아무리 거칠지언정, 일반차의 트렁크부근 저 뒷쪽에서 차체를 흔드는 것과는 달리, 로터스 엑시지의 6기통 엔진은 바로 등 뒤에서 재잘재잘 공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엔진의 스펙은 3,500cc VVT-i 엔진이며, 슈퍼차져가 맞물려 최고출력 350마력, 최대토크 약 41kg.m을 자랑합니다. 이 차의 핵심은 순수함을 잃지 않은 변속기 입니다. 6단 수동변속기만이 이차를 출발, 가속 시킬 수 있습니다.

911 GT3는 997까지 수동변속기만을 판매하다가, 이번 991 모델부터 PDK2 라는 듀얼클러치로 업종변경 하였습니다. 물론 그 덕에 제로백은 구형에 비해 무려 0.8초나 빨라졌지만 어찌되었건 순수함을 잃고 현실과 타협한 셈이죠.

출발할 때 오른손을 왼쪽으로, 그리고 위로 올려 1단에 고정하고, 왼발을 슬며시 떼며 클러치가 미트되는 타이밍에 엑셀을 살며시 밟아 차를 사뿐하게 출발시켰을 때의 즐거움은 이제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 합니다. 속도가 붙고 기어를 2단으로 올리고 점차점차 단수를 올리다가 코너에 진입할 땐 다시 내리고...

스포츠카에서 수동변속기가 점점 사라지는거... 정말 아쉽습니다! 반면 순수함을 잃지 않은 로터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수동변속기를 사용함에도 100km/h까지의 가속은 4초입니다. 997 GT3 보다 좋은 기록이며, 마지막에 4,000cc로 배기량을 키운 997 GT3 RS 4.0과 같은 기록입니다.

1단에서 2단으로 변속시 듀얼클러치보다 시간이 좀 더 소요되는 수동변속기 스펙으로는 거의 최고수준인 셈이죠. 비결은 무게에 있습니다. 중량이 1,176kg밖에 되지 않습니다. 너무 가볍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이 동반적으로 우수해 지는 셈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현시대의 차에선 전혀 만나볼 수 없는 논파워 스티어링이었습니다. 청담동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파워스티어링의 부재는 엄청난 팔힘을 요구했으며, 좀 더 원활하게 스티어링을 돌리고자 한다면 차를 미세하게 이동시켜야 했기에 손과 발이 참으로 바쁘고 혼잡스러웠습니다.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지리삼은 이 녀석에 비하면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순수한 기계적인 느낌으로 가득찬 엑시지 S 그 안에 타고 있으면 그러한 즐거움 덕분에 계속 싱글벙글 웃게 됩니다. 자동차라는 금속덩어리가 자동차 매니아들에게 전해주는 즐거움이 이렇게 퓨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굳이 빨리 달리며 속도감을 느끼기도 이전에 엑시지 S의 가치에 대해 감동하게 됩니다.

6기통 엔진 답게 엔진회전은 부드러웠고, 변속도 쉬웠습니다. 승차감은 역시 예상했던대로 딱딱했습니다. 허나 차의 무게가 가벼운 탓인지 노면의 요철이 기분나쁘게 전달되진 않았습니다. 그저 가볍고 사뿐사뿐 통통 튀는 느낌이랄까요?

놀라웠던건 바로 스티어링휠의 감각이었습니다. 맨홀뚜껑을 밟든, 과속 방지턱을 넘든, 충격을 지나든... 노면이 손으로 바로 전달됩니다. 논파워 스티어링 휠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모든 노면의 감각이 손바닥으로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은 요즘의 전자식 스티어링휠에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감성이죠. 심지어 991 GT3도 알칸타라로 스티어링휠을 멋지게 감쌌지만, 로터스가 전해주는 손맛에 비하면 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로터스의 스티어링휠이 맨손으로 하는 설거지라면, 991 GT3의 스티어링휠은 속장갑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하는 설거지입니다. 이렇듯 굉장한 감도의 스티어링휠은 코너를 앞두고 돌릴 때 그 진가가 느껴지는데요.

와인딩로드도 아닌, 일반 도로의 커브를 도는 과정조차 굉장히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땅짚고 헤엄치기가 아닌, 땅 짚으며 달리기? 땅 만져가며 달리기? 정도가 될까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감각이 아주 솔직하게 드라이버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한가지 확실한건 내가 아스팔트 바로 위에 앉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체가 낮다는 점입니다. 낮은 위치에 앉아 있으면 하중이동을 느끼기 좋습니다. 그만큼 순수함을 더욱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날이 풀리기만을 기다려야 겠습니다. 제 지리삼도, 엑시지S 도 말이죠.

샵 안엔 엘리제가 전시되어 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제가 1호 시승고객이 되었다 하여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셨습니다. 어쩜 차를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을까요?

제가 출고한 911 GT3는 옵션 포함가격이 2억 5천만원입니다. 하지만 순수함을 훨씬 더 간직하고 있는 로터스 엑시지 S는 1억 2,300만원에서 시작하는데, 위 시승차의 경우 리어 파킹센서, 프리미엄 페인트, 프리미엄 팩, 레이스 팩이 적용되어 최종 소비자가 1억 3,900만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다고 합니다.

재미와 순수함, 비현실적인 즐거움은 더 큰데, 가격은 훨씬 합리적입니다. 흠...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 줄 알았던 내 여자친구! 그리고 그보다 더 순수한 지금 이 여자아이. 복잡한 심경이 머릿속과 가슴속에 가득 차올라 넘치려고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의리 아니게씀니꺼?

자꾸만 지리삼 911 GT3를 생각하려 하지만, 엑시지 S를 만났을 때의 감동을 떠올리며 시승기를 작성하는 이 순간만큼은...

자꾸만 얘가 생각나는건 왜일까? 어서 날 풀리고 지리삼 몰래 이 아이와 함께 유명산이라도 다녀와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