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서의 오디오
오디오가 취미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적 편향이다. 월급의 몇 배 되는 돈을 모아 앰프에 투자했는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신 스스로 전원 사장을 탓하거나 아직 에이징이 안돼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공동구매로 꽤 비싼 제품을 구입하면 소리가 안 좋더라고 해도 누구 하나 정직하게 말을 꺼내지 않는다. 때로 이런 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패거리주의로 비판당하는데 그 안에서 이기적 편향의 사투가 펼쳐지곤 한다. 이런 현상은 때로 집단 이기가 되기도 하며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잃게 만든다.
오디오에서 이런 현상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함께 공유하되 자폐적 현상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초고가 오디오로 갈수록 이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태생적으로 금전과 밀접하게 엮여있는 것은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적극적 개입을 통해 음질적인 부분에 자유가 부여되면 단지 소유가 아니라 다양한 체험을 통해 특수성과 보편성 모두를 획득할 수 있다. 바로 진공관 앰프가 대표적이다.
하나의 앰프에서도 진공관 교체를 통해 얼마든지 앰프의 성능을 천차만별로 튜닝해 금액과 성능이라는 틀 안에 갇힌 오디오를 구원할 수 있다. 일본에서 ‘스테레오사운드’ 같은 하이엔드 오디오잡지 외에 ‘관구왕국’ 같은 잡지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다. 명성 높은 하이엔드 기기를 섭렵하다가 시큰둥해질 무렵 누구나 진공관 앰프로 눈을 돌려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때로 오디오 취미의 마지막이 진공관과 풀레인지로 귀결되는 것은 단지 취향 때문이 아니다. 이기적 편향과 자기도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결단일 수 있다.
하나의 앰프, 다양한 사운드
이유는 그 작동원리에 있다. 제조사에서 설계상 가장 적합한 증폭 소자 한 가지만 활용하는 트랜지스터 앰프에 비해 진공관 앰프는 여러 증폭 소자에 대응할 수 있다. 물론 과거 진공관 앰프는 한정된 진공관에 대응했으며 출력관을 바꿀 경우 바이어스를 일일이 테스트 장비로 조정해야했다. 그래서 일부 진공관 앰프는 테스트 장비를 애초에 제공하기도 했다. 만일 바이어스 등 아무런 조작 없이 KT88을 꼽았다가 KT120 또는 KT150을 꼽아서 사용하기도 하고 또는 EL34를 장착해 다양한 음질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프리마루나가 바로 그런 가능성을 무엇보다 편리하게 재현한 브랜드다.
뿐만 아니다.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프리마루나 DialoGue Premium HP는 3극(Triode) 모드와 5극(Ultra Linear) 모드를 모두 지원한다. 스피커 음압이 조금 낮아 넓은 공간에서 충분한 음량 확보가 안 되거나 저역 제동이 힘든 경우 5극 모드를, 작은 공간에서 능률이 평균 이상이라면 3극 모드를 선택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음악 장르나 녹음 특성에 따라서도 3극과 5극 모드를 변환해 사용하면 편리하다. 사용자가 할 일은 그저 리모컨에서 모드 전환 버튼을 누르는 일 뿐이다.
기능적으로 프리마루나는 굉장히 편리하며 이 모든 기능을 세련된 미니멀 디자인 안에 간결하게 구현해놓았다. 후면으로 트랜스포머가 장착되며 전면엔 출고시 기본관 EL34가 채널당 네 알씩 총 여덟 개가 도열해있다. 이 때 출력은 70와트, 만일 KT88을 장착하면 80와트, KT120을 장착하면 84와트, KT150을 장착하면 96와트 등 점층적인 출력 증강을 얻을 수 있다. 그 앞으로는 12AX7가 총 여섯 개 장착되어 있으며 모든 진공관은 본사에서 철저히 검수 후 선별해 장착한 프리미엄 진공관으로서 일반적으로 벌크 타입을 장착해주는 진공관앰프와 차별된다.
전면 좌측으로는 알프스 블루 벨벳을 사용한 볼륨 노브가 위치하며 중앙에는 전원 및 모드를 알려주는 인디게이터 불빛이 반짝인다. 그리고 맨 우측은 입력 셀렉터가 위치하고 있다. 후면으로 넘어가면 라인 레벨 입력단이 총 다섯 조 마련되어 있으며 홈시어터 리시버 등과 연동을 감안, 바이패스 기능을 하는 HT 입력단도 보인다. 스피커 출력단은 공히 4옴과 8옴에 모두 대응한다. 더불어 DiaLogue Premium HP의 리모컨은 하위 모델보다 더 큰 풀 사이즈로 더 많은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음질 중심 설계, 다양한 안전장치
DiaLogue Premium HP은 단지 위에 설명한 기능적 편의성 외에 음질 위주 설계가 돋보인다. 우선 진공관 앰프의 퍼포먼스를 좌우하는 트랜스포머에서도 남다른 정성과 규모를 보인다. 전원부에 쓰이는 트랜스포머부터 EI코어가 아닌 특주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사용해 노이즈를 최소화했다. 프리마루나 같은 경우 여러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 메이커처럼 전기적, 물리적 노이즈 등에 있어 EI코어보다 토로이달 트랜스포마가 훨씬 더 우수하다는 입장이다.
다음은 출력 트랜스 부분이다. 대역폭과 전체 주파수 특성에 있어서 출력 트랜스는 음질적인 부분에 매우 크게 관여한다는 것은 진공관 앰프에서 상식이다. 우선 프리마루나는 트랜스포머를 모두 특주 형태로 설계한 후 인하우스 시스템에서 한땀 한땀 감는다. DiaLogue Premium HP 는 프리마루나가 만든 출력 트랜스 중에서 최상급의 광대역 특성을 갖는다. 내부 신호 경로는 기판을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Point to Point’방식으로 설계했다. 배선재는 하위 제품과 차별해 스위스제 은도금 OCC 선제로 신호 전송 구간에서 왜곡과 손실을 줄여 순도를 최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외에 입력단에도 노이즈의 원인이 되곤 하는 스위치 방식이 아니라 밀폐형 릴레이 설계를 택했다. 기본적인 구성과 기능은 하위 모델 Prologue Premium 과 유사하지만 그 출력 규모는 물론 타크만 저항, SCR 커패시터 등 내부 부품들이 프리마루나 최상위 등급으로 적용되어 있는 모습이다. DiaLogue Premium HP의 HP 이니셜은 다름 아닌 헤드폰단 탑재를 의미한다. 단독 헤드폰앰프로 출시했다면 상당한 가격표를 달만한 순수 진공관 앰프다.
프리마루나는 모든 제품에서 안정적인 작동과 내구성, 편의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애초에 진공관의 수명을 최대한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설계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쓸데없이 출력을 높이지 않았다. 때로 진공관 특성이 저하되면 BTI서킷이 이를 알려주며 파워 트랜스포머가 과열될 경우엔 전원을 차단해주는 PTP 서킷은 음악 이전에 안전 문제 등에 대해 안심하게 해준다. 또한 중요 소자인 출력 트랜스가 손상될 위험에 처했을 경우 이를 미리 막아주는 OTP 서킷도 사용자 입장에서는 두 손 들어 반길만한 부분들이다. 더불어 AC 오프셋 킬러 설계를 통해 트랜스포머 노이즈를 거의 정적에 가깝게 최소화하고 있어 음악을 듣는 내내 어떤 걱정에 휩싸이거나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오직 음악감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셋업 & 사운드
마이텍 맨하탄 II DAC 와 토템 어쿠스틱스 Signature One을 사용해 들어본 DiaLogue Premium HP는 기존에 테스트했던 Prologue Premium과는 음색적으로 유사한 것 외에 많은 부분에서 그레이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음색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EL34 출력관의 잔향감이 매력적이며 여타 진공관 앰프와도 확연히 구분시켜주는 부분이다.
황병기 - 침향무 2장
침향무
예를 들어 얼마 전 타계한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 2장을 들어보면 가야금 연주가 매우 정갈하며 잔향이 풍부하다. 진공관 앰프를 대부분 묘한 착색과 다소 부풀어 있는 중역대에 이끌려 서브 시스템으로 듣고 있는 오디오파일이 꽤 있다. 하지만 DiaLogue Premium HP은 메인시스템에서 충분히 군림할 수 있는 소리다. 출력과 관계없이 EL34 여덟 발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는 가야금 사운드에 탄력과 밀도 힘의 강, 약 표현까지도 힘 있게 표현한다. 특히 중고역의 산뜻하고 정갈한 배음이 침향무를 계속 반복하게 만들만큼 중독 적이다.
정경화 - "J.S.Bach" Chaconne
Tokyo Suntory Hall Live 26th April 1998
음색 적으로 특히 바이올린 같은 악기 표현은 처음 듣는 악기처럼 남다른 표현력이 느껴진다. 특히 중역과 고역 사이를 자주 오가는 악기들에서 나타나는데 트랜지스터 앰프에서는 느끼기 힘든 배음이 화사하다 못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한번 1998년 4월 도쿄 산토리홀에서 연주한 정경화의 바흐 ‘샤콘느’를 들어보자. LP를 DSD128로 녹음해 종종 마이텍 맨하탄 II로 들어보곤 하는데 이번은 내가 들어보았던 어떤 시스템보다 독특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악기 소리를 변형시킬 만큼 착색은 아니지만 훨씬 더 비싼 트랜지스터 앰프로 들었을 때보다 감정이입이 더 깊게 이어지며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 선연하다.
Jheena Lodwick - It's now or never
All My Loving......
새삼 하위 모델 Prologue Premium 인티앰프와 차이점이 저역에서 크게 드러난다. 음색적인 표정은 유사하지만 음의 외곽이 좀 더 에지가 있고 중저역이 풍부하며 음상도 좀 더 앞으로 전진해 호소록 짙게 표현된다. 지나 로드윅의 ‘It’s now or never’ 같은 곡에서 초반 퍼커션 사운드는 꽤 웅장하고 당당하게 바닥을 적신다. 보컬 자체는 따스하고 달콤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무는 듯하다. 긴박한 페시지를 빠르고 정교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몰고가는 트랜지스터 앰프를 듣다 DiaLogue Premium HP로 듣는 소리는 긴장을 완화시키면서도 묵직한 액센트로 진한 여운을 남긴다.
Theodor Currentzis - Tchaikovsky Symphony N.6 (Pathetique) Mov.1
MusicAeterna
교향곡 등 다중악기가 등장하는 대편성 레코딩에서 DiaLogue Premium HP는 왠만한 분리형 진공관 앰프의 그것과 비견할만하다. 과거 들어보았던 오디오리서치나 앤틱사운드랩 모노블럭 앰프에 비할 바는 아니나 어중간한 구형 분리형 앰프를 넘어선다. 쿠렌치스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1악장 중후반부에서 보여주는 다이내믹스와 고전적인 진공관 앰프의 그것을 훌쩍 넘어선다. 내가 들어본 EL34 진공관 인티앰프 중 그 음색에 있어 매력적인 앰프는 많았으나 이런 다이내믹스 폭과 심도를 보여준 앰프는 없었다.
총평
DiaLogue Premium HP 이 처음 나의 리스닝 룸으로 들어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 동안 리뷰를 위한 북셀프가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특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토템 스피커와 많이 들었고 토템의 약간 서늘한 중고역을 DiaLogue Premium HP는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따스하고 촘촘하게 메워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저 재미삼아 매칭해본 다인오디오 C4에서도 룸 특성 때문인지 약간 저역 부스트가 있는 것 빼고는 에소타 중고역의 색채를 더욱 더 화려하게 북돋아주었다.
시종일관 찰랑거리는 따스한 중고역에 더해 대편성 음악도 당당히 소화해줄 정도로 DiaLogue Premium HP의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DiaLogue Premium HP의 다양하고 손쉬운 출력관 교체다. 그리고 진공관 헤드폰 앰프와 뛰어난 성능의 3극/5극 전환 모드도 매력적이다. 변변한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간단한 조작만으로 음질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이 제품은 소자의 속박을 벗어나 그 성격을 무수히 확장시킨다. 취미로서의 오디오, 한정적인 제품 특성을 한껏 뛰어넘어 다양한 음질을 이처럼 뛰어난 퀄리티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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