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모든 사물들이 내가 알던 그것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친숙한 개의 실루엣만이 형체를 알려주지만 그것이 내가 키우던 개인지 아니면 해질녘을 틈타 내려온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은 내가 알던 것들이 뭔가 낯설고 때론 섬뜩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전망 좋은 호숫가의 낙조(落照)를 어렴풋이 바라본 적이 있다면 그 시간이 꼭 낯설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시간은 그리운 정감으로 가득한 기억을 소환한다. 그 시간부터 우리의 감성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르며 고이 잠자고 있던 상상력이 뉘엿뉘엿 지는 해를 품은 듯 솟아난다. 경계와 공포가 아닌 포용과 화해 그리고 그리움이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FM 라디오
이 시간부터 음악을 듣기 가장 좋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밥숟가락을 부딪히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면 세상은 조용해졌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자신만의 시간이 많지 않은 현대인에게 이런 시간은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저녁 무렵부터 이어지는 자유시간은 독서 혹은 음악 감상으로 채워지곤 했다. 특히 FM 라디오 감상과 독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이 두 가지 행위는 서로가 서로를 독려했다.
시작은 그저 조그만 미니 컴포넌트에 내장된 튜너로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도 방송 중인 ‘배철수의 음악캠프’부터 새벽녘의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을 줄창 들었다. 때로 엘피나 시디를 구하기 힘든 것은 음악들이 나올라치며 번개같이 달려가 미리 꽂아놓은 공테이프를 향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녹음해서 들은 테이프만 해도 라면 박스 하나는 족히 되었던 것 같다.
추억의 튜너들 그리고 매킨토시
FM 방송은 집중해서 음악을 듣지 않는 시간에도 알아서 공간을 음악으로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새벽까지 FM 방송에선 정말 좋은 음악들이 많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음악 대신 연예인들의 수다가 많아져 별로 듣지 않지만 2천 년대 전후까지만 해도 뮤지션이라 부를 만한 디제이가 록부터 팝, 클래식, 재즈 등 전 세계 음악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전용 튜너를 구입하게 된 것은 한참 지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오디오를 구비하면서부터다. 마란츠나 나카미치 또는 켄우드, 매킨토시 등의 튜너를 좋아했다. 깊은 밤 튜너에서 들려오는 디제이의 목소리는 그윽했고 그때그때 신보를 무료로 즐길 수 있었다.
매킨토시는 그중에서도 꽤 고가에 속했는데 MR78 같은 튜너는 그들의 상징적 색상인 푸른 불빛이 새어 나오면서 음악 감상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여러 녹턴형 튜너나 리시버들이 지금도 빈티지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그 당시 출시되었던 매킨토시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매킨토시 튜너와 조우했다.
MR87
튜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모두 오래된 추억에 불과하다. 언제부턴가 디지털 음원을 즐기고 FM은 인터넷 라디오로 즐긴다.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KBS 콩 라디오로 황덕호의 ‘재즈수첩’을 듣고 있다. 그런데 매킨토시 튜너와 만나면서 홀연히 되살아난 추억과 시간의 덧없음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감흥을 선사했다. 아니, 지금도 이런 아날로그 튜너를 만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선 놀라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MR87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튜너다. 매킨토시의 MR 시리즈 튜너는 MX 시리즈 튜너와 함께 시대를 풍미했으며 가장 롱런한 튜너 시리즈 중 하나다. 최초의 MR 시리즈 튜너가 MR55였고 발매 연도인 1957년은 모노 시절이었다. 이후 수년에 한 번씩 새로운 모델을 출시했으며 1990년대 MR7084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매킨토시의 튜너를 볼 수 없었다.
MR87은 그 당시 MR 시리즈 튜너를 세기를 건너 디지털 시대에 소환했다. 인터넷 라디오도 아니고 이런 튜너를 의기양양하게 소개한 것은 단지 매킨토시의 자신감일까? 이런 나의 의구심은 실제 MR87과 마주하자 연기처럼 사그라들었다. 예스러운 매킨토시 특유의 디자인이 빛나는 노브와 각종 버튼들 그리고 그 위에 켜지는 녹색 불빛이 마음을 앗아가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우선 중앙을 가로지르는 주파수 표시창은 위, 아래로 각각 AM과 FM 주파수가 표기되어 있고 파란빛을 띠는 전자식 포인터가 주파수를 가리켜주고 있다. 그 아래로는 선택된 주파수를 숫자로 알려주며 스테레오 수신 감도를 표기해 준다. 전면 좌측엔 프리셋/메뉴 노브가 있어 주파수를 저장해 들을 수 있다. 자동으로 AM, FM 방송을 스캔해 저장할 수 있는데 ‘Sencitivity’를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수신 감도에 따라 알맞은 조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셋업 메뉴에 들어가면 여러 편의 기능이 보인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최근 라디오 채널의 수신 감도나 스테레오 분리도 등을 배려한 설계다. 예를 들어 ‘Streo Blend’같은 기능은 노이즈가 많이 섞여 나올 때 적용하면 좌/우 스테레오 분리도는 낮아지되 배경 노이즈를 줄여줄 수 있다. 반대로 노이즈가 섞이더라도 분리도를 향상시켜 들을 수도 있다. 더불어 고역 볼륨을 부스팅 시켜주는 ‘Preemphasis’ 또는 고역 볼륨을 낮추어주는 ‘Deemphasis’ 기능도 탑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다이얼 밝기를 조절한다던가 또는 디스플레이의 밝기를 조절하는 것 또한 가능하며 디스플레이가 자동으로 꺼지게 셋업 할 수도 있다. 튜너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과 달리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현재,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최대한 편리한 사용 패턴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후면에도 이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RCA 및 XLR 출력을 모두 지원하고 있으며 디지털 출력까지 마련해놓았다. 출력 종류는 동축과 광 두 가지로서 만일 별도의 DAC를 사용해 듣고 싶다면 이 단자를 사용해 좀 더 나은 사운드로 라디오 방송을 즐길 수도 있다.
노래의 날개 위에
오후 네시경 들른 상수동 로이코 빌딩에서 FM 라디오를 듣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때마침 흐린 날씨는 분명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비라도 내린다면 더 분위기가 더 좋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휴일 오후 FM 방송을 틀어놓고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것만큼 아늑하고 평안한 시간도 없으니까. 우선 평소 자주 듣는 KBS 클래식 FM을 찾았다. 수신 감도는 중, 상 정도. 마침 ‘노래의 날개 위에’가 방송되고 있어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참고로 이 날 MR87 튜너는 모두 매킨토시 제품들과 엮어 테스트했다. 프리앰프로 매킨토시 C1100을 사용했고 파워앰프로는 MC1.25KW를 사용했다. 둘 다 분리형 모델로 이들의 최상위 제품들이다. 더불어 스피커는 익히 많은 리뷰에 사용해 익숙한 B&W 800D3를 사용했다. 댄다고스티노 앰프들과 자주 들었는데 풀 매킨토시 조합에선 또 다른 소리를 내주었다.
Bernarda Fink
Nuits d’ete op.7 Vilanelle, L’ile Inconnie
Nuits D'été
도종환의 시에 김지윤이 곡을 붙이 ‘바람이 오면’을 지나 베를리오즈의 연가곡 ‘여름밤’이 마치 여름을 재촉하고 있는 듯 들렸다. 독일 베를린 교향악단의 연주는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좀 더 감성적으로 들렸다. 매킨토시의 과거 튜너들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해상도나 윤곽, 무대는 표현 능력을 더 좋아졌지만 역시 매킨토시의 음결 특성은 그대로다.
Edith Mathis - Mozart: Le nozze di Figaro, K. 492 / Act 3 - "Sull’aria ... Che soave zeffiretto"
The Art Of Edith Mathis
청취자의 신청곡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이중창 ‘산들바람이 부드럽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듣는 소리와 동일선상에서 볼 수 없다. 방송이라는 특수한 방식의 송, 수신 방식을 통해 듣는 것이기 때문. 아날로그 튜너에선 확실히 아날로그 사운드가 나온다. 그래서 중역이 두텁고 따뜻한 온기가 충만하다.
Salvatore Accardo
Diabolus in Musica
몇 곡을 더 듣다가 같은 아날로그 소스기기인 턴테이블에 눈이 가 한번 엘피를 들어보기로 했다. 매킨토시가 출시한 MT5라는 턴테이블이 그 주인공으로 아카르도의 연주로 파가니니의 ‘Diablolus in Musica’를 집어 들었다. 클리어오디오에서 발매한 버전의 엘피인데 수미코 Blue Point No.2 카트리지를 사용해 들었다. 확실히 튜너와 비교하면 에지 있고 또렷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무대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바이올린의 중, 고역이 마치 빙판을 유유히 유영하는 무희를 연상케한다.
다시 튜너의 세계로
다시 튜너로 돌아오자 커다란 공연장의 스케일이나 입체감보다는 안온한 집안에서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며 음악을 듣는 듯한 분위기 전환이 일어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의 날개 위에’는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고 피셔 디카우의 브람스 ‘여름 저녁’과 ‘달빛’을 연이어 방송했다. 뭔가 섬뜩하고 낯선 시간으로서의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닌 따스한 정감이 물씬 풍기는 해질녘의 정다움이 가득하다.
실컷 들었다. 89.1Mhz, 91.9Mhz, 93.1Mzh 등 하나하나 주파수의 숫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모두 기억났다. 이 날처럼 흐린 날 또는 비 오는 날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밤, 차창 밖으로 보이던 풍경과 몰래 읽던 편지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라디오의 추억이 방울방울 맺혔다. 매킨토시는 그때나 지금이 건재하다는 것이 어쩌면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해도 매킨토시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대견했다. MR87이 디지털 프로세서를 탑재한 디지털 튜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Specific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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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GENERAL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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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Tuning Range | 87.5MHz - 108.0MHz (Europe) 87.9MHz - 107.9MHz (USA) 76MHz - 90MHz (Japan) |
FM Channel Spacing | 50kHz, 100kHz or 200kHz |
FM Antenna Input | 75 ohms, Type “F” Coax connector |
FM ANALOG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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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able Sensitivity | 2.2uV (18.1dBf) |
50dB Quieting Sensitivity | 1.5uV (14.8dBf) |
Signal To Noise Ratio | Mono: 70dB Stereo: 68dB |
Frequency Response | ±1dB 20Hz to 15,000Hz |
Total Harmonic Distortion | Mono: 0.4% Stereo: 0.8% |
Channel Selectivity | 60dB Adjacent Channel 66dB Alternate Channel |
Stereo Separation | 38dB |
AM GENERAL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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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Tuning Range | 522kHz - 1602kHz (Europe) 530kHz - 1710kHz (USA) 522kHz - 1611kHz (Japan) |
AM Channel Spacing | 10kHz |
AM Antenna Input | Balanced, RJ45 connector (for use only with supplied McIntosh RAA2 Remote AM Antenna) |
AM ANALOG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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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itivity | 350uV/m |
Signal To Noise Ratio | 50dB |
Frequency Response | 0dB, -6dB 50Hz to 3,000Hz |
Total Harmonic Distortion | 0.5% |
Selectivity | 45dB Adjacent Channel |
DIGITAL AUDIO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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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Coaxial Output | 0.5V p-p/75 ohm |
Digital Optical Output | -15dbm to -21dbm |
Sampling Frequency | 48kHz |
CONNECTIVI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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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puts Unbalanced | 1 Stereo |
Outputs Balanced | 1 Stereo |
Digital Coaxial Output | 1 |
Digital Optical Output | 1 |
AM Antenna Input | 1 |
FM Antenna Input | 1 |
XM Antenna Input | 0 |
Service Port | Yes |
CONTRO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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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r Panel Data Input | Yes |
Rear Panel IR Sensor Input | Yes |
Power Control Input | Yes |
Power Control Output | Yes |
RS232 Control Input | Yes |
GENERAL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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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s | AM/FM |
Rated Output | 1Vms Unbalanced 2Vms Balanced |
Output Impedance | 100 ohms Unbalanced or Balanced |
Standby Power Requirement | <0.5 watt |
WEIGHTS & DIMENS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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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s (W x H x D) | 17-1/2" (44.45cm) x 6" (15.24cm) x 18" (45.72cm) |
Weight | 25.5 lbs (11.6 kg) |
Shipping Weight | 40 lbs (18.1 kg) |
McIntosh MR87 AM/FM Tun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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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사 | 로이코 |
수입사 홈페이지 | www.royco.co.kr |
구매문의 | 02-582-9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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