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 generated image @Google Gemini 3 Pro
응답하라 19XX 세대에게 건전지는 교과서보다 더 많이 들고 다니던 생활 필수품이었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다니던 소니 워크맨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원이 바로 건전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즘은 건전지를 쓸 일이 거의 없다. TV나 에어컨 리모컨, 주방의 후추 그라인더, 대문의 도어락 정도에나 들어갈 뿐,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이제 충전기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건전지가 지구 환경에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차라리 충전식 기기에 의존하는 지금이 더 미래지향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어락이 건전지가 부족하다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우리는 다시 건전지 브랜드를 선택하고 구매해야 하는 어려운 미션 앞에 서게 된다. 그동안 잊고 지낸 사이, 건전지 브랜드 판도에 변화가 있었을까? 의외로, 그 유명한 듀라셀과 에너자이저의 유치하지만 치열한 라이벌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라이벌 열전에서는 한때 ‘핑크 토끼 전쟁’이라 불리며 소비자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던 두 브랜드의 경쟁사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꽤 오랫동안 먼 길을 걸어온 건전지 시장

▲ 1965년 잡지에 게재된 듀라셀의 광고
<이미지 출처 : ebay.com>
구리빛 머리로 유명한 듀라셀의 뿌리는 1920년대 초, 발명가 사뮤엘 루벤과 텅스텐 필라멘트 제조업자 필립 로저 말로리가 만나 설립한 P.R. Mallory & Co(매트슨)에서 시작된다. 당시 매트슨은 의료기기와 산업용 배터리를 전문으로 하던 업체였다.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며 내구성을 뜻하는 Durable과 전지를 의미하는 Cell을 결합해 지금의 브랜드명 듀라셀(Duracell)이 탄생했다.

이후 듀라셀은 세계 최초로 단일 규격 알카라인 건전지를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 계획에 참여한 유일한 건전지 브랜드로 이름을 올리며, ‘달에 간 첫 번째 건전지’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어 소형 카메라와 라디오, 소니 워크맨 등 배터리 기반 휴대용 전자기기들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 듀라셀의 성장은 한층 가속화됐다.

하지만 순풍만 불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듀라셀의 모태였던 매트슨 그룹이 해체되면서, 듀라셀은 면도기로 유명한 질레트에 인수되는 변화를 맞는다. 이후 2005년에는 질레트가 P&G에 다시 인수되었고, 2016년에는 워렌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가 듀라셀을 사들이며, 듀라셀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긴 여정을 거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라셀은 ‘건전지 회사’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프리미엄 배터리 브랜드로 자리하고 있다.

반면 은색의 에너자이저는 1896년 콘래드 휴버가 Eveready Battery Company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초기에는 손전등과 그에 들어가는 전지를 개발하는 회사였으며, 의외로 세계 최초 표준형 원통 배터리(AA·AAA)를 만든 곳도 듀라셀이 아닌 에너자이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가장 보편적인 규격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에버레디(Eveready). 검은 고양이 마스코트로 유명했던 바로 그 브랜드가 곧 에너자이저의 전신이다.

1957년, 에버레디는 고성능 배터리 라인업에 ‘Energizer’라는 브랜드명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프리미엄 건전지 시장에 뛰어든다. 이후 듀라셀처럼 여러 차례 인수·합병을 겪었는데, 놀랍게도 한때 강아지 사료 브랜드 ‘랄스톤 퓨리나(Ralston Purina)’가 에너자이저를 인수했던 적도 있다. 사료와 건전지가 한 지붕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다소 코믹하지만, 마트 사료 유통망을 배터리와 공유할 수 있다는 이점만큼은 분명했다. 현재 에너자이저는 배터리 사업부가 독립해 듀라셀과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양강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치열한 라이벌전의 상징, 토끼 전쟁(?)
▲ 핑크색 토끼를 기억하는가? 시작은 듀라셀이었다!
듀라셀과 에너자이저, 이 두 라이벌의 가장 치열했던 전쟁은 다름 아닌 토끼가 주인공이었다. 북을 치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핑크색 토끼 광고,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느 회사 광고인지 떠올려보면, 많은 사람들이 듀라셀인지 에너자이저인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원조는 바로 듀라셀이다. 1973년, 다른 장난감들이 하나둘 멈춰 서도 혼자 북을 치며 계속 움직이는 토끼를 등장시킨 광고가 대히트를 기록하며, 듀라셀의 장수명 이미지를 단번에 각인시켰다.
▲ 누가 봐도 듀라셀과 똑같은(?) 에너자이저 광고
이런 대히트의 꿀맛을 맛본 뒤라서일까? 듀라셀은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토끼 광고의 상표권 갱신을 깜빡한 사이, 에너자이저가 1989년 선글라스를 낀 ‘짝퉁 토끼’를 내세워 “Keeps Going!”이라고 도발한 것이다. 우리나라였으면 명예훼손이니 저작권 침해니 하며 즉각 소송이 벌어졌을 법하지만, 무대는 미국이었다.

▲ 누가 봐도 듀라셀이 억울한 부분이 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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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희대의 ‘상표권 알박기’ 사건의 결과, 북미권 즉,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에너자이저가 핑크 토끼의 공식 주인이 되었고, 그 외 지역인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만 여전히 듀라셀의 토끼가 원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남의 마스코트를 대놓고 패러디해 자신들 얼굴로 만들어버린 에너자이저의 뻔뻔함도, 정작 그 권리를 지켜내지 못한 듀라셀의 허술함도 참 재미있는 전쟁인 것 같다. 멸망전으로 치닫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으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저 흥미로운 팝콘각일뿐. 개인적으로는 선글라스를 끼고 항상 거만한 자세로 등장하는 에너자이저의 토끼에게 더 호감이 간다.
알카라인 vs 리튬으로 대변되는 두 라이벌의 현재

▲ 듀라셀 울트라 알카라인 AAA (4알)<4,440원>
세기의 라이벌답게 두 회사가 지향하는 기술적 방향도 미묘하게 갈린다. 우선 듀라셀은 스스로를 ‘알카라인의 제왕’이라 부를 만큼 알카라인 배터리에 강한 자신감을 보인다. 알카라인이란 말 그대로 염기성(Alkaline) 전해질을 사용하는 건전지를 의미하며, 주로 수산화칼륨(KOH)이 활용된다. 듀라셀은 이 알카라인 배터리의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내부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고밀도 코어(High Density Core)’ 기술에 집중하며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듀라셀의 최상위 라인업인 듀라셀 옵티멈(Optimum)은 한 번에 강한 출력을 요구하는 기기에서는 더 강력한 파워를, 장난감처럼 장시간 구동해야 하는 기기에서는 더 긴 수명을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성능을 내세운다. 국내에서는 아직 ULTRA 라인업이 최상위 제품으로 판매되고 있으나, 해외에서는 점차 옵티멈이 이를 대체하는 추세다. 또한 밀봉 기술을 강화해 개봉하지 않은 상태라면 최대 10년간 전력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재난 대비용 비상 물품으로도 적합하다. 아이들이 실수로 삼키는 사고를 막기 위해 쓴맛 코팅을 입혔다는 점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에너자이저가 주력하는 리튬 전지 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아 대량 구매 후 장기 보관하기에 유리하다는 점이 강점이다. 한 단계 아래의 기본 라인업은 잘 알려진 듀라셀 디럭스(Deluxe)다.

▲ 에너자이저 맥스플러스 알카라인 AA (4알)<4,610원>
듀라셀이 알카라인이라는 기본기에 충실한 전략을 유지한 반면, 에너자이저는 알카라인 제품을 꾸준히 출시하면서도 ‘리튬’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워 일회용 건전지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AA 리튬 건전지를 상용화한 브랜드라는 이력에서 비롯된 자신감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리튬 전지는 우리가 흔히 충전해서 쓰는 리튬-이온(Li-ion)과는 전혀 다른 종류로, 일회용 1차 리튬 전지(Primary Lithium Battery)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리튬 전지는 알카라인 대비 약 33% 더 가볍고, 무게 민감도가 높은 무선 게이밍 마우스나 캠핑용 헤드램프 같은 장비에서 특히 유용하다. 여기에 알카라인보다 7~9배 더 오래가는 수명, 그리고 영하의 혹한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내구성까지 갖췄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가격이 알카라인 대비 2~4배 이상 비싸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막 써버리는 용도보다는 특정 상황이나 목적에 맞춰 그때그때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에너자이저 얼티메이트 리튬 AA (4알)<11,960원>
에너자이저의 라인업은 듀라셀보다 훨씬 화려한 편이다. 최상위 라인업인 에너자이저 얼티밋 리튬(Ultimate Lithium)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가는 AA 건전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성능을 자랑한다. 겉면이 흰색이라 일반 에너자이저 제품과 쉽게 구별되며, 가격 역시 최상위급이다. 그 바로 아래 단계가 에너자이저 맥스 플러스(Max Plus)로, 리튬 전지는 부담스럽지만 일반 알카라인보다 오래가는 제품을 찾는 소비자에게 적합한 라인업이다. 가장 기본 모델은 에너자이저 맥스(Max)로, 이름이 비슷해 맥스 플러스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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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도어락, 리모컨, 시계 등 일상생활의 붙박이나 장기간 사용하는 기기에는 알카라인에 장점이 있는 듀라셀을, 카메라, 게이밍 마우스, 캠핑 장비 등 취미나 전문 영역의 목적으로 사용하기엔 리튬 전지의 에너자이저를 추천한다.
국뽕 한 숟갈 추가! 벡셀과 로케트를 잊지 말아줘요~

글로벌 건전지 전쟁 한가운데에 국뽕 한 스푼을 더하자면, 우리나라 토종 배터리 생산업체인 벡셀과 추억의 로케트 배터리를 빼놓을 수 없다. 벡셀의 역사는 1978년 (주)서통이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썬파워’라는 브랜드로 국산화를 이뤄냈고, 1990년대 말 지금의 벡셀(Bexel)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IMF와 워크아웃을 거치며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는 다이소에서 불티나게 판매되는 NEO 건전지를 납품하는 등 국내 시장에서는 듀라셀·에너자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뚝이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추억의 이름 ‘로케트 배터리’는 이야기가 다소 안타깝다. 로케트는 1946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건전지 기업으로, 한때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IMF 이후 경영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상표권과 영업권을 P&G에 인수된 질레트에 헐값으로 넘기는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만다. 이후 로케트 전기는 자체 브랜드 사업을 잃고 하청 생산만 하는 신세가 되었고, 경영진의 횡령·배임, 무리한 사업 확장 등이 겹치며 2015년 결국 상장 폐지와 함께 회사가 공중분해됐다. 현재 편의점에서 가끔 보이는 ‘로케트’ 건전지는, 사실상 이름만 남은 껍데기 브랜드일 가능성이 크다.
이제 환경을 생각하는 건전지로 변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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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건전지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이라는 인식과, 환경을 오염시키는 유해 물질이라는 낙인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까지 적극적으로 친환경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건전지 업계 역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에너자이저는 폐배터리를 재활용한 소재를 건전지에 혼합해 기술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듀라셀은 뜯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주던 플라스틱 포장재를 100% 종이로 전환해 ‘착한 기업’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인류가 전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두 거인의 경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 속에서 또 어떤 혁신이 건전지라는 작은 금속 캔 속에 담겨 나올지 궁금해진다.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c) 비교하고 잘 사는, 다나와 www.danawa.com



















































![듀라셀 울트라 알카라인 AA[20알] (20알)](http://img.danawa.com/prod_img/500000/620/146/img/1146620_1.jpg?shrink=360:3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