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진흙길을 거침없이 돌파하는 오프로더. 험로를 짓누르는 사륜구동의 듬직함과 탁 트인 시야는 세단이 결코 줄 수 없는 SUV만의 마초적 매력까지 더해지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주류가 됐다.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지면에서 껑충하게 솟아오른 차고, 각진 휠 아치를 가득 채운 두툼한 올 터레인 타이어,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앉는 순간 탁 트이게 펼쳐지는 전방 시야. 뿐만 아니라 가파른 비탈길이나 패인 웅덩이를 만나도 하부 긁힘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높은 시트 포지션 덕분에 세단에서는 만나기 힘든 개방감을 자랑한다.
여기에 묵직한 사륜구동(4WD) 트랜스퍼 케이스와 탄탄한 서스펜션이 노면을 짓누르며 험로를 주파할 때 전해지는 듬직한 승차감은 세단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마초적 감성을 여과 없이 전해준다.
스포츠 유틸리티 비히클(SUV, Sport Utility Vehicle) 이야기다. 거친 비포장도로와 야외 레저 활동을 위해 탄생한 SUV는 20세기 전장의 야전 수송차에서 출발해 오늘날 전 세계 신차 판매의 절반 이상을 휩쓸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절대 표준으로 군림하고 있다.
전장의 흙먼지에서 태어난 윌리스 지프와 랜드로버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미군의 다목적 사륜구동차 '1940 윌리스 쿼드(Willys Quad)'. 험로 주파력을 앞세운 전장의 야전차는 오늘날 SUV의 뼈대가 됐다.(JEEP)
기아는 1993년 양산을 시작한 '스포티지(Sportage)'가 세계 최초의 도심형 SUV라고 주장하지만 SUV의 뿌리는가장 처절했던 전장에서 시작한다.
1940년 윌리스-오버랜드(Willys-Overland)가 미 육군의 작전 요구 사양에 맞춰 개발한 사륜구동 프로토타입 '윌리스 쿼드(Willys Quad)'를 거쳐 1941년 실전에 투입된 군용 양산차 ‘윌리스 MB(Willys MB)’, 즉 전설적인 ‘지프(Jeep)’가 그 시초다."
사다리꼴 프레임에 사륜구동 시스템을 얹고 포탄이 쏟아지는 진흙탕을 거침없이 돌파하던 군용 소형 사륜구동차 윌리스는 뛰어난 기동성과 함께 승용과 화물, 정찰을 모두 아우르는 다목적성으로 2차 세계 대전의 전세를 뒤바꿨다.
종전 후 군용 지프는 민수용 'CJ(Civilian Jeep)' 시리즈로 옷을 갈아입고 농장과 건설 현장, 레저 시장으로 번져나갔다. 영국 역시 1948년 황폐해진 전후 농업과 산업 재건을 위해 지프의 구조를 벤치마킹한 ‘랜드로버 시리즈 1(Series I)’을 선보였다.
초기 사륜구동차는 이렇게 승차감이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오직 내구성과 험로 탈출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순수한 '작업용 특장차'였다.
‘레저’와 ‘럭셔리’의 이식, 체로키와 레인지로버가 튼 물꼬
투박한 작업차에 코일 스프링 서스펜션과 고급 내장재를 더해 '사막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며 럭셔리 SUV의 장을 연 1970년형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JLR)
거칠고 투박한 상용차에 불과했던 사륜구동차에 ‘레저’와 ‘가족’이라는 개념이 결합되면서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SUV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63년 등장한 지프 ‘왜고니어(Wagoneer)’는 승용 감각의 실내 인테리어와 자동변속기를 탑재해 '패밀리 사륜구동차'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스포츠 유틸리티(Sport Utility)'라는 문구는 1974년 2도어 모델로 출시된 지프 ‘체로키(Cherokee)’의 브로슈어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부터 체로키와 유사한 SUV가 미국을 중심으로 쏱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SUV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으면서 유럽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유럽 SUV의 원조는 영국 로버 그룹이다. 로버는 1970년 ‘레인지로버(Range Rover)’를 내놓으며 또 한 번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끌었다.
레인지로버는 뛰어난 험로 주파력과 함께 고급 세단 수준의 코일 스프링 서스펜션과 호화로운 가죽 내장재로 귀족과 상류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사륜구동차가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작업차에서 품격 있는 럭셔리카로 신분 상승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도심형 소형 SUV의 서막, 기아 스포티지가 던진 파격
1993년 등장해 투박한 프레임 바디 일색이던 시장에 '도심형 콤팩트 온로드 SUV'라는 혁신적 청사진을 세계 최초로 제시한 기아 1세대 스포티지. (기아)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SUV는 픽업트럭의 뼈대인 견고한 '바디 온 프레임(Body-on-frame)' 방식을 고수하며 각진 오프로더의 형태에 머물러 있었다. 1990년 출시돼 북미 왜건 시장을 단숨에 초토화시킨 포드 익스플로러(Explorer) 역시 트럭 기반의 거친 프레임 바디였다.
이 단단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 주인공이 기아였다. 기아는 1991년 10월 도쿄모터쇼에서 곡선형 유선형 차체와 승용 감각의 실내를 갖춘 콘셉트카를 선보인 뒤 1993년 7월 1세대 ‘스포티지(NB-7)’를 공식 양산했다.
기아 스포티지는 각진 군용차 스타일 일색이던 사륜구동 시장에 '도심 출퇴근과 주말 레저를 아우르는 콤팩트 온로드 SUV'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세계 최초로 제시하고 상용화했다. 다만, 스포티지는 승용 섀시를 응용한 독자 프레임 바디 구조였다.
이 때문에 이듬해(1994년) 세단 완전 일체형 모노코크를 적용하고 나온 토요타 RAV4를 ‘글로벌 도심형 CUV 원조’로 보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도심형 소형 SUV라는 세그먼트의 씨앗을 뿌리고 세계 자동차 시장에 크로스오버의 미래 청사진을 가장 먼저 던진 선구자가 스포티지였다는 점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도심형 SUV 시장은 급물살을 탔다. 토요타 RAV4와 혼다 CR-V가 모노코크 기반의 승차감과 연비를 앞세워 북미와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99년에는 BMW가 세단 못지않은 초고속 코너링을 과시하는 'X5'를 선보이며 SAV(Sports Activity Vehicle)의 문을 열었다.
스포츠카와 럭셔리카의 콧대마저 꺾은 SUV 광풍
람보르기니 '우루스(Urus)'. 슈퍼카 브랜드는 SUV를 만들지 않는다'는 굳건한 금기를 깨고 브랜드 최다 판매 기록을 갈아치웠다. (람보르기니)
글로벌 시장에서 거세게 몰아친 SUV 열풍은 "자동차가 품격과 순수함을 지키려면 낮게 깔린 3박스 세단이나 2도어 스포츠카여야 한다"며 콧대를 세우던 전통 프리미엄·슈퍼카 브랜드들의 고집까지 무너뜨렸다.
그 포문을 연 것이 포르쉐였지만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2년 브랜드 최초의 5인승 SUV ‘카이엔(Cayenne)’을 내놨을 때,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은 "포르쉐가 영혼을 팔았다"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브랜드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며 파산 직전이던 포르쉐를 구원한 일등 공신이 됐다.
포르쉐의 성공은 도미노 현상을 불렀다. "절대 SUV는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하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차례로 백기 투항했다. 람보르기니는 슈퍼 SUV '우루스(Urus)'를 선보이며 브랜드 역사상 최다 판매 기록을 갈아치웠다.
애스턴 마틴은 'DBX', 롤스로이스는 '컬리넌(Cullinan)', 벤틀리는 '벤테이가(Bentayga)'를 내놓으며 초호화 럭셔리의 무대를 SUV로 옮겨왔다. 심지어 맹렬한 배기음과 레이스 헤리티지를 고집하던 페라리마저 4도어 4인승 모델 '푸로산게(Purosangue)'를 내놨다.
한국 시장을 지배한 '지프차'의 유산과 국민차 등극
한국형 SUV의 험난한 역사를 개척한 거화 시절의 코란도. 오리지널 지프의 형태를 간직한 채 오랫동안 국내에서 '지프차'라는 대명사로 통용됐다. (KG 모빌리티)
한국 시장에서 SUV의 역사는 각별하다. 1955년 미군 폐차 부품을 모아 드럼통을 펴서 만든 ‘시발(始發) 자동차’도 외관과 기능적 측면에서 SUV로 분류한다. 이후 신진 지프, 거화 코란도로 이어진 초기 역사 속에서 사륜구동차는 오랫동안 ‘지프차’라는 고유명사로 불렸다.
1993년 등장한 쌍용차 무쏘와 기아 스포티지는 한국형 도심형 SUV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어 2000년대 들어 현대 싼타페와 투싼, 기아 쏘렌토와 스포티지 등이 승용 모노코크 플랫폼과 디젤 엔진의 경제성을 결합해 패밀리카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들 모델에 에너지 효율성을 높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탑재되면서 넓은 실내 공간과 뛰어난 시야, 주말 레저 활동에 최적화한 공간 효율성으로 전통적인 3박스 세단 선호도가 높았던 소비자들의 마음을 SUV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전기차 시대의 패권 경쟁과 넥스트 스텝
벤틀리가 크루 공장 역사상 첫 순수 전기차로 낙점한 도심형 럭셔리 SUV '토르칼(Torcal)'. 전기차 시대를 맞아 SUV는 친환경 첨단 테크놀로지의 집약체로 진화하고 있다. (오토헤럴드 DB)
지구촌 도로를 점령한 SUV는 이제 전동화(EV) 전환의 최전선에 서 있다. 높은 차고 덕분에 바닥면에 거대한 대용량 배터리 팩을 배치하기 유리하다는 구조적 이점은 전기차 초기 설계에 최적의 플랫폼을 제공했다.
현대차 아이오닉 5와 기아 EV9, 테슬라 모델 Y 등 전용 전기차 라인업의 중심축은 일찌감치 SUV와 CUV가 꿰찼다. 최근에는 메르세데스-AMG가 1000마력이 넘는 초고성능 순수 전기 SUV 개발을 가속화하고 벤틀리가 브랜드 80년 크루 공장의 역사상 첫 순수 전기차로 도심형 럭셔리 SUV ‘토르칼(Torcal)’을 낙점하는 등 럭셔리와 퍼포먼스 영역의 전동화 경쟁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물론 전면 투영 면적이 넓어 고속 주행 시 전비(배터리 효율)가 세단이나 왜건에 비해 불리하다는 과제는 남아 있다. 그러나 공기저항을 극도로 억제한 쿠페형 SUV 디자인, 가벼운 알루미늄 복합 소재, 그리고 초고속 충전 기술과 고효율 모터 시스템의 결합을 통해 그 한계를 빠르게 지워내고 있다.
군용 흙바닥을 헤치던 야전차에서 시작해 도심의 승차감을 품고, 이제는 친환경 첨단 테크놀로지의 집약체로 거듭난 SUV. 시야의 높이만큼이나 끊임없이 쓰임새의 지평을 넓혀온 SUV의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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