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2024 WRC 포럼8 랠리 저팬'에서 드라이버 챔피언에 오른 티에리 누빌(사진 중앙 앞줄 오른쪽)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사진 우측 아래)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철수냐 잔류냐. 현대자동차가 월드랠리챔피언십(WRC) 무대에서 쌓아 올린 13년의 영광을 여기서 멈출지, 더 앞으로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현대차는 지난 1998년 티뷰론(Tiburon)으로 WRC F2 클래스에 첫발을 디딘 후 2012년 독일 알체나우(Alzenau)에 현대 모터스포츠(HMSG) 법인을 설립하며 2014년 최상위 클래스에 전격 복귀했다.
이후 2019년과 2020년 2년 연속 제조사 부문 월드 챔피언에 오르고 2024년에는 간판 드라이버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이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모터스포츠 강자로 우뚝 섰다.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레이스를 거치며 축적한 내구성과 서스펜션 기술은 아반떼 N과 아이오닉 5 N 등 양산형 고성능 'N' 브랜드의 모태가 되며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WRC가 현대차의 고성능 시대를 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현대차가 WRC 무대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현대차는 2027년부터 도입될 차세대 기술 규정에 맞춘 완전한 신규 랠리카 개발 계획을 공식적으로 배제한 상태다.
2026 시즌 최종전인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inia) 랠리 직후 팀 핵심 인사들의 현대차를 떠날 것이라는 소식 그리고 유럽과 서울 본사 소식통을 통해서도 현행 팩토리 워크스(직영 공장팀) 체제의 정리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쏟아져 나오면서 현대차의 WRC 철수는 기정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현대차가 WRC 철수를 고심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국제자동차연맹(FIA)의 급작스러운 차량 규정 변경에 있다. 현대차는 그동안 연간 1000억 원 이상을 투입해 2022년 도입된 하이브리드 엔진(Rally1) 기술 실증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FIA가 비용 절감 등을 내세워 하이브리드 유닛을 조기 퇴출하기로 선회하면서 현대차가 지향하는 친환경·전동화 로드맵과 엇박자가 났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이 럭셔리 고성능 브랜드 확장을 위해 출범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GMR)으로 무게중심이 쏠리고 2028년 수소 프로토타입 클래스 진입이 점쳐지는 세계 내구 선수권 대회(WEC)에 집중하기로 한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단순한 전면 철수가 아닌 '잠재적 대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현장 지휘봉을 쥐고 있는 시릴 아비테불(Cyril Abiteboul) 현대 모터스포츠 총괄은 최근 인터뷰에서 "내년(2027년)에 현대차 레이스카가 달릴 것인가? 대체로 그렇다(More or less, yes)"라며 "다만 어떤 형태와 어떤 챔피언십일지는 FIA와 새 프로모터의 결정에 달려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매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기존 풀 워크스(Full-Works) 직영 체제 대신 비용과 리스크를 줄인 유연한 방식의 참가를 뜻한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현대차가 이미 경쟁력을 검증받은 'i20 N Rally2' 머신을 기반으로 FIA가 제공하는 성능 업그레이드 전용 키트를 장착해 최상위 클래스에 나서는 방안이다.
과거 포드가 취했던 전략처럼 전문 레이싱팀이나 티에리 누빌의 위탁 팀에 차량과 기술을 지원하는 '세미 워크스(Semi-Works)' 형태 또는 순수 프라이비터 팀에 차량을 판매하고 지원하는 고객 레이싱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카드 역시 열려 있다.
현대차의 공식적인 향후 거취는 오는 10월 15일 열리는 FIA 세계 모터스포츠 평의회(WMSC)에서 최종 경기 및 스포츠 규정이 확정된 직후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현대차가 10여 년간 쌓아 올린 랠리 헤리티지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고 대안적 방식으로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 전 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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