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에서 19일 열린 '‘2026 현대차·기아 아이디어 페스티벌'에서 차량개발1담당 이재규 전무(왼쪽에서 3번째)가 대상을 수상한 'MSV2 팀'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화성시 남양] "파리모터쇼를 다녀오고 솔직히 절망을 느꼈다. 조만간 유럽에 있는 회사들은 다 망하겠구나, 심지어 현대차그룹도 결국 중국에 먹힐 수밖에 없는 구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9일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2026 현대차·기아 아이디어 페스티벌(제17회)’ 현장. 무대에 오른 차량개발1담당 이재규 전무는 최근 글로벌 시장을 뒤흔드는 중국 OEM들의 파상공세에 대한 위기감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이 전무는 "중국차들은 디자인이 뛰어난 데다 우리보다 만 달러나 더 저렴한 가격표를 붙이고 나왔다"며 모터쇼 현장에서 느낀 암담했던 심정을 회고했다. 기술과 디자인은 물론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까지 갖춘 중국의 공세 앞에서 현대차그룹 역시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이 전무는 이날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연구원들의 결과물을 지켜보며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 없이 도전과 실패, 혁신을 이야기해왔지만 17회째 이 페스티벌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가능성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며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봤던 스스로를 깊이 반성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 전무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엿보았듯, 이날 최종 결선에 오른 6개 팀의 아이디어는 거창한 과시형 기술이 아닌 철저히 '사람'과 '이동의 가치'를 향해 있었다. 인간을 향한 기술로 결선에 오른 6팀의 디테일부터 살펴본다.
# '트라이폴드 러기지 보드' (대상 / MSV2 팀)
트렁크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대상을 수상한 'MSV2'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영예의 대상을 거머쥔 '트라이폴드 러기지 보드(Trifold Luggage Board)'는 트렁크 바닥에 숨어있는 거대한 하부 공간을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활용하도록 설계한 기구 혁신이다. 보드를 따로 떼어낼 필요 없이 한 손으로 밀기만 하면 3단으로 가볍게 접혀 시트 뒤편에 밀착 고정된다.
덕분에 유모차나 화분처럼 높이가 있는 짐도 통째로 실을 수 있다. 여기에 허리 부담을 줄여주는 '아웃 슬라이딩' 기능과 야외 휴식을 위한 '티 테이블' 기능까지 결합했다. 복잡한 전자장치나 고가의 모터 없이 순수 기구 설계를 단순화해 높은 내구성과 원가 경쟁력까지 확보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을 이끌어냈다.
# "멀미 Zero' (최우수상 / 컴포트 드라이브 팀)
엠비언트 라이트와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멀미를 줄일 수 있는 아이디어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컴포트 드라이브'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EV와 자율주행 시대의 난제로 꼽히는 멀미 문제를 하드웨어 추가 없이 순수 소프트웨어 제어로 해결했다. 뇌가 인지하는 감각 충돌(시각과 전정기관의 불일치)을 완화하기 위해 실내 앰비언트 라이트와 후석 모니터 테두리를 활용했다.
차량의 급가속, 제동, 선회 방향에 맞춰 조명과 UI를 직관적으로 움직여 승객 주변 시야에 차의 움직임을 미리 전달하는 원리다. 계기판에는 운전자의 주행 습관을 보정해 주는 3단계 가이드 인디케이터도 적용됐다. 실제 48명을 대상으로 한 가혹 주행 테스트에서 40명의 멀미가 크게 완화됐고 뇌파와 심전도 등 생체 신호 안정화 효과까지 검증받아 핵심 특허 3건을 출원했다.
# '아이-브릿지' (최우수상 / T4B 팀)
낮은 비용과 첨단 기술로 시각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 안경 아이디어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T4B'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시각장애인의 보행 안내를 돕기 위해 현대차 로보틱스의 자율주행 인지 기술을 안경에 집약한 아이-브릿지((Eye-Bridge)는 RGBD 카메라(오트리프로)와 뎁스·IR·IMU 센서가 주변 보행자와 장애물, 계단 단차 등을 입체적으로 인식해 고저차 지형도(Elevation Map)를 형성한다.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안전 경로를 연산한 뒤, 안경다리에 내장된 골전도 이어폰으로 보행자에게 방향과 위험 요소를 음성으로 명확히 전달한다. 안내견이나 가이드 없이도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는 기술로, 추후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를 통해 현대차의 SDV 및 휴머노이드 로봇 생태계와 연동될 수 있도록 설계됐다.
# '늘봄' (우수상 / 늘봄 팀)
후석에 탑승한 영유아를 운전에 집중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우수상을 수상한 '늘봄'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대상을 기대했지만 아쉽게 우수상에 그친 '늘봄'은 차량 실내부터 유모차까지 아이의 안전을 연속적으로 책임지는 탈부착식 온디바이스 AI 모니터링 허브다. 손바닥만 한 모니터링 팟을 B필러 전용 도크에 꽂으면 차량 내부 카메라로 작동해 자율주행 드라이버 모니터링(DMS) 기술로 뒷좌석 영유아의 눈 깜빡임과 고개 기울임, 비정상 자세를 실시간 감지한다.
유모차에 옮겨 달면 자동으로 모드가 전환돼 전방의 자전거나 킥보드, 차도 이탈 위험을 즉각 부모 스마트폰으로 경고한다. 기존 양산차의 카메라 및 제어기 하드웨어를 그대로 공유할 수 있어 추가 원가 부담 없이 구현 가능한 실용성이 돋보였다.
# '히어로 레코더' (우수상 / 아이캔두디스올데이 팀)
대형 화물차 등 상용차 운전자의 하루를 담을 수 있는 AI 영상 편집 아이디어로 우수상을 수상한 '아이캔두디스올데이'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히어로 레코더(Hero Recorder))는 장시간 도로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상용차 운전자를 위한 정서 케어형 AI 서비스다. 기존 차량 내 카메라가 '졸지 마라', '앞을 봐라'라는 차가운 경고만 던졌다면 히어로 레코더는 운전자의 하루를 따뜻하게 기억하고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
8초마다 운전자의 표정을 분석하는 FER 기술과 장면을 해석하는 VLM을 결합해 의미 있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7개 역할을 수행하는 멀티 에이전트 AI가 하루의 고단함과 자부심을 담은 1분 요약 영상으로 엮어 가족에게 전한다. 장시간 운전자를 위로하고 가족과의 유대를 잇는 감성 테크다.
# '핀 프린트 시트' (우수상 / 바디가드 팀)
체형에 맞춰 표면 형상을 바꿀 수 있는 시트로 우수상을 수상한 '바디가드'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핀- 프린트 시트(Pin-Print Seat)는 핀 아트 원리를 응용해 탑승자의 체형에 맞춰 시트 표면 형상이 유연하게 변형되는 맞춤형 가변 시트다. 시트 내부에 촘촘히 배치된 78개의 리니어 액추에이터가 독립적으로 상하 높낮이를 조절해 정밀한 곡면을 형성한다.
스마트폰 앱 조작만으로 신생아를 위한 뒤보기 모드부터 1세, 3세, 6세 등 성장 단계별 맞춤 카시트 형상을 그대로 구현해 낸다. 아이 성장에 따른 반복 구매 비용과 탈부착 번거로움을 완전히 없앴으며, 노약자 및 장애인의 욕창 예방과 장시간 운전 피로 완화용 목적기반 모빌리티(PBV) 시트로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줬다.
온기 어린 기술, 현대차그룹의 미래 경쟁력
2026 현대차·기아 아이디어 페스티벌 결선에 오른 6개 팀.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중국 자동차의 공세가 가장 매서운 유럽은 현대차와 기아에게 결코 내줄 수 없는 핵심 무대다. 만 달러나 싼 가격표와 화려한 디자인을 앞세운 중국의 속도전 앞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이 느낀 공포와 위기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양연구소의 젊은 연구원들이 지난 수개월간 땀 흘려 빚어낸 답안지는 명확했다. 저가 배터리와 물량 공세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 바로 '사람의 결핍을 바라보고 마음을 보듬는 온기 어린 기술'이다.
화물차 운전자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AI부터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준 안경, 아이의 성장에 맞춰 스스로 형태를 바꾸는 시트까지. 거창한 수치 경쟁 대신 인간의 존엄과 편의를 향해 치열하게 파고든 이 기술들이 하나씩 차량에 심어진다면 현대차그룹이 중국의 거센 파고에 쉽게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한 연구원들의 당당한 눈빛 속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을 지탱할 가장 단단한 방파제를 보았다. 한편 이날 결선 무대는 미래 모빌리티를 향한 5가지 평가 기준(독창성, 기술 적합성, 비전성, 고객 지향성, 제작 완성도)을 거쳐 냉정하게 심사됐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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