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한 그릇이 600원이던 시절, 컴퓨터 한대 가격은 200만원 언저리였다. 그리고, 지금 컴퓨터와는 모든 게 달랐다. 그러나 형태상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게 있었으니 바로 키보드다. 하지만 뜯어보면 그 당시 만들어진 키보드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오히려 키감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사실 PC 가격도 어마어마 했으니 부속된 입력장치의 가격 역시 신경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조금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발전하는 PC, 퇴화하는 키보드

윈도우가 등장하기 전 DOS 시절에는 키보드로 명령어를 타이핑해야만 했다. 콘텐츠의 생산자던 소비자던 키보드 칠 일이 많았다. 윈도우가 등장한 이후 생산자와 소비자는 각자 다른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생산자에게는 여전히 키보드가 중요했지만, 소비자에게 키보드의 중요성과 효용성은 크게 감소했다. 이제 (조금 극단적이지만) 로그인을 하는 경우나 댓글을 달거나, 키보드 배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키보드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극단적으로는 하이퍼 링크만 클릭할 수 있으면 되고, 이 작업은 마우스의 영역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PC 성능은 급격히 향상되었지만, 키보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인 만듦새와 키감 등은 상대적으로 퇴화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키보드가 다 거기서 거기? 그렇지 않다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키보드란 입력장치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줄어들게 되었다. 관심이 줄어드니 제조사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제 키보드는 PC를 구매하면 끼워주는 액세서리가 되어 버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키보드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한 마디가 이런 상황과 암울한 현실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PC에 1만원 혹은 그 가격도 안되는 키보드라니. 어색함을 넘어 부당함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1980년대, PC 태동기에 등장했던 키보드의 퀄리티는 현재 (대다수의) 키보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당시 키보드를 만드는 수 많은 회사들이 있었지만 그 정점에는 IBM M시리즈 키보드가 있다. 이 키보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84년. 이 모델에는 IBM의 절치부심이 진득하게 녹아있다. 1981년 출시된 IBM의 Model 5150PC는 PC 혁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컴퓨터 중 하나지만, 키보드만큼은 평이 좋지 못했다. 엉성하고 표준과 동떨어진 키 레이아웃 때문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캡스락은 이쪽에 있는 것일까? 또한 전자계산기에나 적용될 법한 거대한 키의 위용이라니. 또한 키를 전체적으로 키운 게 아니라 일부분만 키웠다. 키 공간이 남는다면 나머지 공간을 줄일 수도 있었을텐데… 정말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당연히 사용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IBM은 키보드만 연구하는 10명의 프로젝트 팀을 만든다. 몇 년 간의 개발과정을 통해 이들이 내놓은 제품이 바로 101개의 키가 달린 M 키보드다.
중요한 키의 크기를 키우고, Ctrl이나 Alt와 같이 자주 사용되는 키는 왼쪽과 오른쪽 양쪽에 두었다. 키 캡은 낡으면 새로 구매해 교체할 수 있게 만들었다(물론 이것은 다양한 언어가 인쇄된 키보드를 만드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이 M 키보드부터 시작된 레이아웃은 지금까지 표준처럼 사용되고 있다. 또한 요즘 어느 정도 가격대를 가진 키보드들은 마치 염료승화방식으로 인쇄한 것이 대단한 듯 광고를 하지만 이들은 31년 전부터 그래 왔었다. 이 키보드의 개발은 IBM이지만 실제 생산은 렉스마크(Lexmark), 유니콤프(Unicomp), MaxiSwitch가 함께 했다.
잘 만든 제품의 기본은 내구성
이 M 키보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생산되었다. 또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모델과 변종 모델이 존재한다. 커서 이동키 위쪽에 트랙볼과 마우스 스위치가 붙은 제품(M5-1)도 있고, 내부에 스피커가 들어 있는 모델(51G8572)도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제품은 역시 모델명 1391401이다. 이 모델은 IBM PS/2의 자판이며 탈착 가능한 케이블이 포함되어 있다. 케이블은 약 1.5m 길이와 약 3m 사양이 있는데 1994년 이후에는 제조원가 절감을 위해 탈부착이 불가능한 케이블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1990년대 생산제품보다 1980년대 생산제품의 중고 가격이 더 비싸다. 또한 윈도우가 나오기 전에 출시된 모델이니 윈도우키는 없다.
잘 만든 제품의 기본은 내구성이다. 1984년에 만들어진 키보드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 없이 잘 작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 정도 내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재 키보드를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인 멤브레인-실리콘 돔 구조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리콘이 그렇게 오랜 시간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힘들뿐더러, 강도 또한 그리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M 키보드의 모델들은 버클링 스프링(buckling spring) 방식을 사용한다.

(윈도우 키가 보이는 것은 이 제품이 유니콤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
이 방식은 키캡을 누르면 안쪽의 실린더 안에 들어있는 스프링이 눌리고, 어느 순간 스프링이 꺾이면서 실린더 안쪽에 부딪히면서 딸깍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스프링은 더 압축되어 회전로커가 하부에 있는 키를 누르게 된다. 이 스프링은 거의 고장 날 일이 없다는 것이 이 무시무시한 내구성의 핵심. 또한 딸깍 거리는 소리를 통해 사용자들은 명확한 촉각적 피드백(키가 압력을 받을 때의 저항감)과 청각적 피드백(커다란 딸깍-딸깍 소리)을 받게 된다.
또한 이 소리는 하부의 철판을 진동시켜, 소리를 더 묵직하고 크게 증폭시킨다. 기계식 키보드나 리얼포스, 해피해킹 키보드 역시 이런 피드백을 주기 위한 설계들이 들어 있다. 이 피드백 때문에 사용자는 빠르고 정확한 타이핑이 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멤브레인의 경우 바닥을 찍어야 입력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버클링 스프링 방식은 옆으로 휘어지는 순간 압력의 변화가 생기면서 스위치가 바닥을 찍게된다. 따라서 이 충격이 손가락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덜 피곤하다.

이 하부의 철판 덕분에 무게는 2kg을 상회한다. 또한 이 키보드를 휘둘러 강도를 잡았다는 이야기(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보드는 멀쩡한)나 총알이 날아오면 키보드로 막을 수 있다는 전설적 루머가 있을 정도. 어차피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휴대용 제품이 아니니 좀 무거워도 상관 없는데다가 오히려 무게 때문에 타이핑을 하는 상황이거나 게임에서 급한 조작을 할 때 키보드가 밀리는 것을 막아준다는 장점도 있다. 또한 스위치 하부까지 가는 구멍은 키캡이 막고 있기 때문에 먼지나 오염물질은 물론 액체가 키보드의 중심부까지 도달할 수 없다. 오랜동안 청소를 하지 않고 사용해도 키감이나 작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이런 꼼꼼하고 치밀한 내부 구조 덕분이다. 또한 스프링은 손으로 잡아 빼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청소를 할 때는 스프링을 신경 쓰지 않고 청소기를 사용해도 된다.

1984년 IBM에서 처음 출시된 이 키보드는 1993년 렉스마크로 팔렸다가 1995년 다시 유니콤프로 팔렸다. 여전히 유니콤프는 버클링 스프링 방식의 키보드를 만들고 있지만, 역시 1980년대의 M 모델을 최고로 쳐준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글을 잘 쓰게 해주거나, 다들 감탄할 만큼의 코드를 짤 수 있게 해주거나, 누구도 시비 걸지 못할 기획안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걸까? 그런 물건이 세상이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펜이 글씨를 쓰는 맛을 전달하는 것처럼 좋은 키보드는 타이핑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기에 일을 하는 것의 괴로움은 덜어줄 수 있다. 예술이 가난을 구원하지는 못해도 위로는 할 수 있는 것처럼.
글 : 고진우, 편집 : 김정철 - 이 글은 컬럼니스트의 의견으로 더기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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