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혈이나 장기 이식에서 혈액형의 제약이 있는 이유
ABO 혈액형은 가장 대표적인 혈액형 분류 방식으로 혈액 속 적혈구 표면에 있는 당사슬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이 당사슬을 우리는 ‘항원’(혹은 응집원)이라고 부르는데, ABO라는 명칭에서 보다시피 A, B는 A항원과 B항원을 뜻하며 O는 적혈구에 두 항원 모두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A와 B 각각의 항원에는 응집반응을 일으키는 ‘항체’(응집소)라는 짝꿍이 있다. 항체는 혈액을 구성하는 혈장에 존재하고, A항원의 경우 A항체, B항원은 B항체와 응집반응을 일으켜 혈액이 뭉쳐 덩어리가 된다.

정리하자면 A형은 A항원과 B항체, B형은 B항원과 A항체, AB형은 A항원과 B항원, O형은 A항체와 B항체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A형인 사람은 A항체를 가진 B형이나 O형에 수혈이나 장기 이식을 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가장 불리한 것은 단연 O형 환자다. O형의 경우 A항체와 B항체를 둘 다 갖고 있어 오로지 같은 O형으로부터만 장기를 이식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O형인 사람은 이식에 적합한 장기를 찾기까지 더욱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KONOS)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도 기준 혈액형별 이식자의 평균 대기시간은 AB형이 약 2년 9개월인 데 비해 O형 이식자는 그보다 1.5배 긴 4년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스티븐 위더스 교수 연구팀은 2018년 세포 표면의 당단백질 항원을 효과적으로 분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효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올해 초 이 기술을 발전시켜 체외폐관류(EVLP) 장치를 통해 A형인 공여자의 폐로부터 A항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사용된 EVLP 장치는 공여자로부터 분리한 폐를 체내에 있을 때와 유사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기계로, 장치 내 폐를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유지시키며 영양액을 공급한다. 연구진은 EVLP 장치를 이용하여 공여자의 폐에 영양액과 함께 효소를 흘려 보냈다. 그 다음 O형 혈액을 가해 면역 거부 반응 여부를 관찰했더니 면역 거부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효소 처리를 하지 않은 폐의 경우 O형 혈액에 대해 거부 반응이 나타났다.

또 지난 8월 케임브리지대 마이크 니콜슨 교수 연구팀은 B형이었던 신장의 혈액형을 O형으로 바꾸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는 체외 정상체온관류장치(NPM)이라는 기계가 이용됐는데, 연구진은 이를 통해 인체와 유사한 온도에서 산소가 들어있는 혈액을 신장에 주입했다. 이때 B형 항원을 제거할 효소를 함께 넣었다. 그 결과 연구진은 불과 몇 시간 만에 B형 혈액형이었던 신장이 모두 O형이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항원이 없는 O형은 ABO 혈액형 중 유일하게 다른 혈액형에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혈액형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혈액형 호환으로 보편적인 이식용 장기를 만드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특히 O형이나 희귀 혈액형을 가진 경우, 이 기술이 도입되면 장기 이식 대기시간이 줄어들 수 있는 만큼 환자가 이식 기회를 얻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일 또한 감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이 결과가 실제 수혈 및 장기 이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아직 불투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의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여자 장기의 가용성인데, 장기가 혈액형 변환을 거치며 손상되지 않는지, 이식 후 온전히 작동할지에 대해 아직 추가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혈액형 변환 장기 이식이 실험실 연구를 거쳐 임상 시험에 적용되기까지는 수많은 절차가 남아있다.
또한 장기 이식에 있어 혈액형 문제는 단지 첫 번째 관문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성공적인 장기 이식을 위해서는 혈액형 외에도 인간백혈구항원(HLA) 테스트를 포함한 조직적합성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때도 공여자와 수혜자 사이의 면역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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