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팅부터 추출까지 전 과정이 사람 손을 타다 보니 같은 생두를 쓰더라도 제조 과정에서의 작은 차이가 맛을 가른다. 예컨대 로스팅 단계에서 생두를 약하게 볶으면 신맛이 부각되고, 강하게 볶으면 쓴맛이 강해진다. 그라인딩할 때는 원두를 잘게 갈수록 물과 닿는 면적이 커져 맛이 진해지는데 그렇다고 너무 미세하게 분쇄하면 원두 가루 일부가 섞여 탁하고 쓴 커피가 된다.
젖은 원두가 진한 커피 만든다
‘로스 드롭렛 테크닉(Ross Droplet Technique, RDT)’은 커피 커뮤니티에서 잘 알려진 일종의 ‘꿀팁’이다. RDT는 원두를 분쇄할 때 일부 가루가 정전기로 인해 그라인더 내부 벽에 들러붙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지난 2005년 해외 커피 전문가 데이비드 로스가 한 온라인 커피 포럼에서 처음 소개했다. 기술 자체는 단순하다. 그라인딩 전 소량의 물을 원두에 뿌려 적시기만 하면 된다. 커피 커뮤니티에서는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동안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 오리건대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매터(Matter)’에 RDT가 정전기 발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커피를 진하게 만들고, 추출량도 늘린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실었다. 연구를 이끈 사람은 식품 연구자가 아닌 화학자와 화산학자다. 그들은 연구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다가 서로 RDT 현상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동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원두 1g당 20㎕(마이크로리터·1㎕는 100만분의 1L)의 물만 있으면 정전기 발생량이 크게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물 분자가 정전기로 발생한 전하를 흡수하거나 그라인더 내부 온도를 낮춰 마찰 효과를 줄이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같은 이유로 생두의 로스팅 시간을 늘리면 내부의 수분이 증발해 정전기가 더 많이 생겼다.
원두 양을 줄이고 굵게 갈면 추출량 높아져
한편 지난 2020년에는 오리건대와 영국 포츠머스대가 주축이 된 공동 연구팀이 원두를 거칠게 갈아야 추출량이 더 많아진다는 내용의 연구를 발표했다. 보통 추출량이 많아진다는 것은 물이 원두와 맞닿는 면적이 커진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커피가 진해져 맛이 좋아진다. 화학자, 수학자로 이뤄진 연구팀은 물의 온도와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한 채 원두의 분쇄 정도에 따라 커피의 추출량을 계산하는 수학 모델을 만들어 이 같은 결론을 냈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성인 1명당 405잔이다. 매일 하루 1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셈이다. 물가가 연일 치솟고 있는 상황에 값싼 장비를 마련해 커피를 직접 만들어 마시면 어떨까. 여기에 과학자들의 비법까지 활용하면 저렴하게 맛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우현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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