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플스의, 래플스에 의한, 래플스를 위한 여행.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단언할 수 있다. ‘래플스 싱가포르(Raffles Singapore)’를 여행하는 건 싱가포르의 과거와 현재(국제 교류의 거점, 문화 다양성)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호화스러운 방법이다. 이곳이 품은 역사와 이야기를 듣고, 잘 관리된 시설들을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래플스의 시작은 1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사키스(Sarkies) 4형제는 1887년 래플스 싱가포르의 문을 열었는데, 객실은 단 10개뿐. 115개의 스위트룸을 보유한 지금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으나 호텔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싱가포르의 성장에 발맞춰 호텔의 규모는 커졌고, 위상도 높아졌다. 근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스탬포드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의 이름에 걸맞은 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많은 역사가 그러하듯 래플스도 굴곡의 시간을 겪었다. 1942년 2월, 연합군이 일본에 항복하면서 싱가포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래플스는 제 이름을 잃었고, 일본군의 거처 겸 사무실이 됐다. 다행인 건 군인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호텔 자체는 안전하게 보존됐고,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하자 래플스라는 간판도 되찾았다. 싱가포르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공간이라 100주년을 맞이한 1987년에는 국가 사적(National Monument)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놀라운 건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한 시점이다. 1989년 3월 호텔의 문을 완전히 닫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다. 또 2017년부터 2년 반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2019년 8월 돌아온 래플스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과 시설을 갖춘 완벽한 호텔로 우리 앞에 섰다.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다.

호텔의 가치는 머무를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시작은 래플스 싱가포르가 건네는 상징적인 환영 인사다. 새하얀 터번과 자주색으로 포인트를 준 제복을 입은 리버리드 시크 도어맨(Liveried Sikh Doormen)이 환한 미소로 여행자를 반긴다. 그리고 화려함의 극치, 그랜드 로비에 입성한다. 알렉산드리아 샴펄리머드(Alexandra Champalimaud) 디자이너의 주도로 완성된 로비는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하다. 높은 층고를 채우는 다이아몬드 샹들리에, 벽면을 채운 현대미술 작품, 그리고 개관 당시부터 호텔을 지키고 있는 괘종시계(Grandfather Clock)와 주크박스(1885년에 제작된 제품), 대형 스탠드 오르골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흰 도화지 같은 로비에 다양한 색감이 더해져 있다.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진한 갈색으로 빈티지한 멋을 더한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하프 소리도 호텔의 품격을 높인다.


객실은 모두 스위트 객실로 거실과 침실이 분리돼 있다. 스튜디오, 스테이트, 코트야드, 팜 코트, 퍼스널리티, 프로므나드, 프레지덴셜 등 9개 타입 115개만 준비돼 있다. 객실 디자인은 고고한데, 서비스는 최첨단이다. 아이패드 하나로 조명, 온도, 전자기기 등을 모두 관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24시간 버틀러 서비스도 제공된다. 도어맨과 함께 래플스의 또 다른 마스코트인 버틀러는 투숙객을 위한 집사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여행 혹은 투숙 중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의 도움을 주고, 오며 가며 마주치면 말동무가 돼 준다.


즐겨야 할 시설도 무척 많다. 객실과 그랜드 로비(애프터눈티), 수영장, 팜 코트(정원), 갤러리는 물론 티핀 룸, 라 담 드 픽(La Dame de Pic, 미쉐린 1스타 프렌치 레스토랑), 라이터스 바(Writers Bar) 등의 다이닝 공간도 빠트릴 수 없다. 1박은 너무나 짧고, 2박3일도 부족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호텔과 접한 래플스 아케이드(Raffles Arcade)도 있다. 래플스 부티크부터 레스토랑, 카페, 럭셔리 브랜드(패션·전자기기·시계·주얼리 등)까지 40여 개의 숍을 만날 수 있다. 참, 래플스 부티크에서 판매하는 카야 잼, 새우 시리얼 쿠키(Cereal Prawn Cookies), 파인애플 타르트 등은 캐리어에 꼭 챙겨 가기를.

마지막으로 재밌는 사실 한 가지 더. 래플스 싱가포르는 ‘래플스’ 브랜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현재 파리, 런던, 이스탄불, 세이셸, 몰디브, 발리, 보스턴, 제다(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적인 여행지 20곳에서 래플스의 환대를 선사하고 있다. 다른 지점도 싱가포르와 다르지 않을 터. 분명 래플스는 그 국가, 그 도시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이 될 것이다.

●Tiffin Room
래플스 싱가포르의 아침 밥상이 차려지는 곳이다. 우아한 분위기와 그릇, 찬합, 도자기 등 다양한 소품을 사용한 아기자기한 느낌이 공존한다. 티핀 룸 조식의 특징은 각양각색의 ‘단품(A La Carte)’ 요리다. 래플스 시그니처 오믈렛과 레전더리 래플스 팬케이크 2개의 스페셜티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계란 요리, 아시안 딜라이트(나시 고렝·미고렝·락사·딤섬·카야 토스트·콘지 등)가 준비돼 있다. 1~2번으로는 다 맛을 보기 쉽지 않다. 감히 추천한다면 고수, 마살라 등으로 인도의 향이 가미된 시그니처 오믈렛, 말레이시아의 매콤함이 더해진 미고렝(직원도 강력 추천), 카야 토스트(래플스 부티크 숍에서 카야 잼 구매 가능) 3가지 메뉴를 꼽겠다. 래플스와 싱가포르의 정체성이 투영된 맛이다.

점심과 저녁에는 북부 인도 지방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1892년부터 호텔의 한편을 차지하고 인도 향신료의 진짜 풍미를 선사하고 있다. 다양한 마살라와 케밥, 티핀 룸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인도 길거리 음식 등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의 식사를 통해 인도계가 싱가포르 문화에 미친 영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藝 yì by Jereme Leung
이름을 보면 레스토랑이 지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藝(yì)는 중국어로 예술을 뜻하는데, 공간부터 음식, 식기까지 모두 특별한 경지에 오르려는 열망이 보인다. 다이닝 홀로 가는 길은 화려한 종이 공예로 채워져 있고, 다이닝 홀은 세련미가 가득하다.

이곳을 이끄는 제레미 렁 셰프는 중국 여러 지방의 요리를 현대적으로 접근한다. 특히, 제철 채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식재료 조합도 과감하다. 벚꽃새우와 해삼을 함께 튀기거나, 백합과 호박으로 만든 국물 요리, 오르조 파스타를 활용한 볶음밥 등 기존 중식과 궤를 달리하는 음식을 낸다. 요리를 돋보이게 하는 다채로운 문양과 색감의 그릇도 즐거움을 더한다. 게다가 계절별로 색다른 메뉴도 선보인다. 5월31일까지는 봄 죽순, 완두콩, 누에콩, 파 등 봄의 기운을 머금은 채소를 활용한 스페셜 메뉴들을 선보인다.
●Long Bar & Writers Bar
싱가포르에서 이보다 더 유명한 칵테일이 있을까. 롱 바의 싱가포르 슬링(The Original Singapore Sling)을 마셔야 비로소 싱가포르 여행이 완성된다. 이 한 잔을 빠트리면 마침표를 찍지 못한 것과 같다.

싱가포르 슬링은 1915년 이곳의 바텐더 나이암 통 분(Ngiam Tong Boon)이 창조한 달콤한 칵테일이다. 파인애플 주스와 라임 주스가 단맛을 담당하고, 체리 리큐어가 매혹적인 색감을 만들어 낸다. 단 음식이 럭셔리로 여겨질 때 처음 만들어진 음료라 지금보다 훨씬 달았다고 한다. 시대를 거치면서 레시피는 조금 달라졌고 당도도 낮아졌지만, 여전히 달짝지근하다. 드라이 진의 독한 기운은 거의 느낄 수 없어 계속해서 홀짝이게 된다.
롱 바의 또 다른 명물은 무제한 땅콩. 과거 말레이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땅콩 껍질을 바닥에 버리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다. 쓰레기 투기가 엄격히 금지된 싱가포르에서 합법적인 일탈을 감행할 수 있는 곳이다. 부족한 알코올 도수는 라이터스 바에서 채워 보자. 래플스 싱가포르를 거쳐 간 대문호들에게 영감을 받은 칵테일이 메뉴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늦은 밤,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근사한 분위기가 매력이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취재협조 래플스 싱가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