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조선의 역사를 지탱한 지식의 보고가 이곳, 서울 종로에 압축되어 있다.

COURSE 배움의 길
구 대한의원 본관 → 창덕궁 → 창경궁 홍화문 → 창경궁로 카페거리 → 성균관 명륜당 → 성균관 탕평비 → 장면가옥 → 서울동성고등학교 → 대학로 안창호 선생 흉상 → 구 서울대학교 본관
코스 거리 : 4.8km
소요 시간 : 1시간 30분
조선시대 성균관에서부터 시작된 배움의 날갯짓이 일제강점기 계몽 교육을 넘어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으로 이어졌다. 역사의 갖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육을 향한 열정은 꾸준히 이어졌다. 종로는 그 맥의 중심에 서 있는 교육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성균관부터 서울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까지, 종로에 녹아 있는 지식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세상의 변화를 경험하고 종로의 가치를 경험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뿌리
구 대한의원 본관
1908년, 종로에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의원이 문을 열었다. 당시 제중원이 최초의 국립의원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그 역할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고종은 1907년에 광제원, 의학교와 부속학원, 대한국적십자병원을 모두 통합해 의정부 직속의 근대식 병원인 ‘대한의원’을 설립하도록 했다.

1908년, 고종의 뜻을 이어받아 순종의 칙명으로 대한의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 아래에서 운영되었다. 역경의 시간이 흘러 100년이 지난 현재, 조국을 위한 고종의 염원이 담긴 대한의원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층층이 쌓인 붉은 벽돌들이 주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당대 국내 최고 의료기관의 품위를 느낄 수 있다.

▷Check Point 1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은 대한의원 개원 칙서 등 대한의원 관련 유물들과 각종 근대 의료 기기를 소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울대학교병원과 한국 근현대 의료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매해 근대 의학과 관련된 상설 전시와 특별전,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개최하고 있다.

▷ Check Point 2
지석영 동상
한국 근현대 의학의 선구자인 지석영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최초로 도입해 천연두를 예방하며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는 의학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근대식 의학교 설립을 제안하고 초대 교장을 맡아 18명의 의학 인재를 배출했다. 현재 대한의원 오른편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국미가 돋보이는
창덕궁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궁’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됐으며 한국 궁궐 건축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정원부터 실내 공간까지 조선 시대 국가 통치 이념이던 유교 원칙을 지켜 조성했다. 조선 시대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자 역대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른 공간이기도 하다.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수령이 300~400여 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 8그루가 관람로 양옆으로 나란히 자라고 있어서 지나온 시간을 헤아리게 한다. 경내에는 궁궐 건물 말고도 왕가의 휴식과 산책이 주목적이었던 정원인 창덕궁 후원이 있다. 후원은 입장 인원 제한으로 선착순 예매로만 관람이 가능하다. 창덕궁에 방문하면 조선시대의 자연과 전통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선 왕실과 백성의 소통의 장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홍화’는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라는 뜻이다. 2층으로 이루어진 지붕이 꼭 양팔을 활짝 펴고 있는 모양으로 보여, 왕이 열린 마음으로 백성을 끌어안아 줄 것만 같다.

실제로 홍화문은 조선 시대에 왕과 백성이 만나는 자리로서도 기능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세금 제도의 개편에 대한 평민과 양반의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홍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재건되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Check Point 1
창경궁 춘당지
조선 시대에 춘당지는 왕이 농사를 짓는 의식을 하며 풍년을 기원했던 논밭인 ‘내농포’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를 유원지로 만들었다. 현재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한 상태다.

▷Check Point 2
창경궁 대온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20세기 근대건축의 특징이 담겨 있다. 철골 구조와 유리, 그리고 목재가 혼합되어 있다. 1909년 완공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는데, 당시에도 쉽게 보기 힘든 열대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화초들을 전시해 두어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Check Point 3
창경궁로 카페거리
창경궁 대온실을 관람하고 춘당지 옆에 있는 월근문으로 나와 왼쪽으로 쭉 거닐면 곳곳에 카페가 들어선 거리가 등장한다. 개성 있는 카페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선의 청춘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은 단순히 공부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유교를 중시하는 조선의 최고학부인 만큼 공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를 모시며 선현을 본받는 것도 필수로 여겼다.

명륜당의 ‘명륜(明倫)’ 또한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라는 뜻을 지녔다. 성균관의 명륜당은 유생들이 유학을 배우고 왕이 직접 강시를 하기도 한 성균관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명륜당을 더 운치 있게 만드는 거대한 은행나무는 옛날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의 뜻을 이어받은 나무이다. 이처럼 성균관은 길을 밟는 곳마다 유학의 향기가 물씬 난다.
●올바른 정치를 위한 영조의 마음
성균관 탕평비
“두루 원만하고 편향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향되고 원만하지 못함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 문구는 성균관 탕평비에 적힌 글귀로, 1742년, 영조가 <논어> 위정편 14장의 구절을 재구성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탕평의 정치를 가르치고자 세운 비석이다. 이는 훗날 조선 정치의 미래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는 나라의 발전보다 붕당의 이익을 앞세우며 폐해가 극에 달한 조선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조가 더 나은 조선을 꿈꾸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이 탕평비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내에 보관되어 있다.
●대한민국 초기 정부의 기둥
장면가옥
한반도가 둘로 나뉘어 대혼란을 겪던 초기 정부 시절, 민주주의의 시작을 이끈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자 교육자였던 ‘장면’. 그의 열렬한 삶의 흔적을 명륜동의 한 고즈넉한 가옥에서 만날 수 있다. 장면은 맨해튼 가톨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그는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고, 유엔 총회에 참여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신속하게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아 냈다. 이후 6·25 전쟁 발발 당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내어 전쟁의 방향을 바꾼 큰 업적을 남겼다. 장면은 2대 국무총리를 거쳐 4대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었으며,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수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비록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은 9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지만, 찬란했던 그의 삶은 여전히 장면가옥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4·19의 횃불이 휘날린 곳
서울 동성고등학교
1960년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 고등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 시신의 오른쪽 눈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끔찍하게 박혀 있었고, 이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민주화 운동인 4·19 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19일 11시,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도 3·15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분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3·15 부정선거의 폐단을 비판하며 부통령직에서 사퇴한 장면이 오랫동안 동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었기에 학생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동성고 교사들도 학생들 옆을 걸으며 그들을 보호하고 그 뜻을 지지했다. 동성고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학생과 시민의 뜨거운 투쟁 끝에 이승만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대한민국에는 두 번째 해방이 찾아왔다. 오늘날 동성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큰 자랑으로 남아 있다.

▷Check Point
동성고 옆 일념비
혜화역 1번 출구에서 큰길을 따라 동성고등학교에 도착하면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문구가 적힌 비석을 볼 수 있다. 이 일념비는 1960년 4월19일,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던 바로 그 정문에 세워져 있다. 동성고등학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로, 우리 민족의 얼과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교육으로 국력을 키우다
대학로 안창호 선생 흉상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외친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그는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학교를 세우고 청년 단체를 조직했다. 민족 독립을 위한 청년 교육에 힘쓰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특히 민족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창립해 독립운동 지도자가 될 인물을 양성하고, 부강한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는 비전을 세웠다. 2013년, 흥사단은 창설 100주년을 맞이해 흥사단 본부 앞에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선명한 등불이 되어 준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Check Point
대학로 연극
대한민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 혜화역 출구 밖으로 나오면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인 붉은 벽돌 건물과 웅장한 가로수가 반긴다. 골목으로 들어가 길을 거닐면 구석구석 다양한 소극장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20년이 넘는 장수 연극부터 유명한 고전을 주제로 한 연극까지, 취향 따라 선택해 볼 수 있는 건 기본.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열연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가 지은
구 서울대학교 본관
밝은 갈색 타일로 이루어진 평지붕 건물을 반원형 아치가 층층이 쌓여 지탱하고 있다. 별도의 장식이 없는 외관임에도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건축을 전문적으로 배운 박길룡이 설계했고, 일본인 ‘미야가와 구미’가 시공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성행하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다. 본래 경성제국대학 건물로 지어져 사용하다가,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동숭동에 자리했던 서울대학교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예술인들이 마음껏 창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예술가의 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Check Point 1
김상옥 열사의 상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김상옥. 그는 반듯하게 다린 정장을 갖춰 입은 채 뒷짐을 지고 서 있다. 다른 동상과 다르게 뒷짐을 지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실제 거사 직전 김상옥 열사의 사진을 본떠 만들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손이 부끄러워 뒷짐을 지고 촬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결연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항일 투쟁에 대한 굳건한 그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듯하다.

▷Check Point 2
마로니에 공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운치 있는 거리는 마로니에 공원으로도 이어진다. 마로니에 공원은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마로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 이름을 따서 공원 이름을 지었다. 마로니에 나무 한 그루는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심은 것인데, 수령이 90살이 넘는다고 한다. 이 나무는 아르코 미술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공원 안에는 다양한 조각품,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어 관람하기도 좋다.
글 남현솔 기자, 김예린 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종로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