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다닐 것 같던 여행도 싫증이 날 때가 있다.
권태의 와중에 북마리아나제도 로타를 만났다.
이곳은 지친 여행자를 온종일 달래고, 끝내 다시 일으켰다.
낮과 밤, 로타는 무엇을 보게 한 걸까?

‘로타‘라는 섬
사이판에서 남쪽으로 약 136km, 경비행기에서 30분 동안의 바깥 구경을 마치고 새로운 섬 ‘로타’에 발을 들인다. 북마리아나제도(CNMI, Commonwealth of the Northern Mariana Islands) 3개의 섬 중 가장 작고,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다. 아담한 규모와 달리 마더 섬(Mother Island)이라는 애칭이 있다. 원주민인 차모로족(Chamorro) 문화의 발상지 중 하나이고, 전통 방식의 삶과 문화가 여전히 강해서 그렇다. 북마리아나제도의 원형을 간직한 목적지인 셈이다.
2박 3일 꼬박 머물러 보니 작고, 적은 것도 단점은 아니었다. 사람의 손발이 덜 닿은 덕분에 자연은 더욱 순수하고, 투명하다. 더없이 깨끗한 테테토 해변과 새들의 요새인 르체촌 공원, 자연의 보고 웨딩 케이크 산, 광활한 바다가 펼쳐지는 포나 포인트, 미국 감성이 물씬 풍기는 송송 빌리지 등이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했다. 라떼 스톤 채석장과 통가 동굴, 일본군 대포, 설탕 공장 등 전설과 역사적 명소도 흥미롭다. 심지어 이름 없는 해변마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무심결에 만나는 풍경들도 가슴에 사무친다. 로타는 그런 곳이다.

권태를 이긴 순수의 바다,
테테토 해변
Teteto Beach
내륙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바다에 대한 동경이 컸고, 여행지를 정할 때도 바다를 품은 도시가 우선이 됐다. 일상에 한강이 있지만, 강이 아무리 크고 넓다고 한들 바다가 주는 감각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적어도 격월에 한 번, 자주 갈 땐 달에 한 번 서울을 떠나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 좋아하는데도 15년 넘게 보니 심드렁해진다. 예전만큼의 희열과 시원함이 없다. 다른 건 주기가 더 짧지만, 바다와의 관계마저 권태기를 겪는 게 조금은 서글픈 요즘이다.


이런 마음을 알았을까? 로타는 몇 곳의 해변이 담긴 처방전을 건넸다. 그중에서 맨 처음 만난 테테토 해변(Teteto Beach)부터 짙은 인상을 남겼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다양한 색감의 바다를 만났는데, 이 해변은 가장 순수했다. 깨끗하고, 섬세한 질감의 모래로 채워진 백사장, 파란색과 민트색으로 구분된 바다, 영롱한 빛을 내어준 햇살,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키 큰 야자수들이 해변을 채웠다. 머릿속에서나 그려 본 이상적인 해변을 만난 것이다. 현지인들이 로타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다라는 설명도 쉽게 수긍이 가고, 당분간 아름다운 바다를 떠올리면 이곳이 먼저 생각날 것 같다. 황홀한 바다를 만났으니 무언가를 더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오랫동안 바라보고, 모래를 밟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외부인의 자세로,
르체촌공원 조류보호구역
l’Chenchon Park Bird Sanctuary
타고난 그대로를 지키는 게 로타의 방식이다. ‘아, 저기에 카페 하나 있으면’, ‘여기 개발하면 좋겠는데’ 등 한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답답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자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러 생물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을 것이다. 웨딩 케이크로 불리는 타이핑고트산(Mount Taipingot), 르체촌공원 조류보호구역
(l’Chenchon Park Bird Sanctuary) 등이 대표적인 공간이다.

새들을 위한 성역 ‘르체촌공원 조류보호구역’에서는 두 번 감탄했다. 때 묻지 않은 바다와 산림의 규모에 한 번, 이 무대에서 힘차게 날고 있는 수많은 새에 또 놀랐다. 강렬한 몸짓에서 나오는 기세는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심지어 새가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날갯짓은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 여행자는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즐기다 가면 된다. 참고로 조류보호구역에는 붉은발얼가니새(Red-footed Booby), 로타 화이트 아이(Rota White-eye), 흰제비갈매기(White Tern), 참새(Eurasian Tree Sparrow) 등 90~100여 종의 새들이 찾아온다.

이곳은 탐조의 즐거움뿐 아니라 완전한 단절도 선물한다. 통신 기기가 먹통이 되는 원시의 공간이라 그렇다. 현지인들은 작은 전망대 공간을 활용해 저마다의 낙원을 만든다. 화창한 날에는 이곳에서 소풍을 즐기는데, 의자에 앉아 새를 관찰하고, 평화로운 바다와 하늘을 감상한다. 우렁찬 파도 소리는 덤이다.
로타의 일상에 스며든 순간,
송송 빌리지
Songsong Village
로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송송(차모로어로 마을) 빌리지다. 그렇다고 해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네온사인의 현란함은 찾아볼 수 없다. 드문드문 집이나 가게가 있는 다른 동네와 달리 편의시설(호텔·식당·다이빙 숍 등)이 많고, 각종 행정시설과 학교, 항구 등도 있어 사람 사는 냄새가 좀 더 난다. 미국 어촌 마을과도 닮아 북마리아나제도에서 가장 이국적인 곳으로 다가온다.

송송 빌리지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전망대(Songsong Village Lookout)로 향했다. 긴 세월 섬을 지키고 있는 반얀트리와 마을을 보살피는 십자가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전망대답게 멋진 경치를 선사한다. 웨딩 케이크 산과 마을, 바다가 주요 피사체인데, 배경은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오전 시간에는 파란 하늘이, 오후에는 일몰이 더해진다.

해질녘, 닭 울음과 농구공 튕기는 소리로 지루함을 달래며 광량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해는 은은한 주황빛을 뿜어냈고, 여행자의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야자수, 은은한 파도와 함께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해가 안녕을 고한 뒤 전망대에서 봐둔 농구 코트로 향했다. 로타에서 가장 큰 활기를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다. 예상대로 아이들과 청년들은 이방인을 반겨 줬고, 카메라 앞에서 마음껏 농구 실력을 뽐냈다. 이렇게 로타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바비큐와 코코넛 밀크의 포만감
북마리아나제도의 주말은 바비큐로 채워진다. 로타도 예외는 아니다. 해변이 있는 곳엔 어김없이 바비큐가 가능한 화덕이 있고, 음식을 펼칠 수 있는 식탁이 있다. 그릴에 올릴 다양한 재료와 시원한 맥주를 준비하고, 불을 피울 해변만 정하면 된다.

다시 테테토 해변으로 향한다. 코코넛에 불을 붙여 천연 모기향을 만들고, 숯과 나뭇가지, 야자수잎을 태워 바비큐 파티를 준비한다. 가장 먼저 로타의 자색 고구마를 포일에 싸 불구덩이에 던져 놓고,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차모로 소시지, 필리핀식 소시지 롱가니사(Longanisa) 등도 굽기 시작한다. 잘 익은 고기에는 새콤 달콤 매콤 짭조름한 피나데니 소스(간장+로타 핫페퍼+양파+레몬즙+설탕 등)를 곁들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시작한 식사는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해지고, 불이 꺼지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또 로타에서 맛본 해산물+코코넛 밀크 조합도 잊을 수 없다. 한국에 매콤한 생선조림이 있다면 이곳엔 코코넛 밀크를 활용한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스튜가 있다. 새우, 코코넛 크랩 등 감칠맛이 좋은 해산물과 양파, 가지, 양배추, 파프리카 등 기호에 맞는 채소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특별한 조리법 없이도 충분한 시간만 들이면 근사한 요리가 탄생한다. 적당히 익어 단맛이 강해진 채소와 코코넛 밀크 소스, 밥의 조화는 마치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크림 리소토 같다.
*이성균 기자의 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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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성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