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혁신'을 상징했던 브랜드 닛산이 전동화 투자 및 개발 소홀과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고 역대 최악의 판매로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다. (닛산)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도요타, 혼다와 함께 일본 자동차 산업의 삼두마차로 불렸던 닛산이 깊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 지난 2017년 글로벌 판매 577만 대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던 닛산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지난해에는 330만 대로 최근 10년간 최악의 성적을 냈다.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닛산은 작년 혼다와의 합병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동등한 파트너십’을 고집한 끝에 협상은 결렬됐다. 이 과정에서 경영 불안은 더욱 심화됐고, 최근 취임한 신임 CEO 이반 에스피노사(Ivan Espinosa)는 ‘Re:Nissan’이라는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았다.
그는 2만 명 규모의 인력 감축, 생산 공장 수를 17개에서 10개로 축소, 부품 복잡성 70% 감축 등 강도 높은 개편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업계는 단순한 구조조정만으로는 닛산이 직면한 본질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닛산의 경영 위기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무엇보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전략의 부재를 꼽는 분석이 많다. 닛산 테슬라 모델 S보다 앞선 2010년, 세계 최초의 대량 생산 전기차 '리프(LEAF)'를 선보이며 전기차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한때 선두였던 닛산은 이후 전동화 흐름에서 뒤처졌다.
현대차, 폭스바겐 등 후발주자들이 빠르게 라인업을 확대하는 사이, 닛산의 전기차는 리프와 아리야(ARIYA), 그리고 일본 전용 경형 전기차 사쿠라(Sakura)에 머물렀다. 전기차 시장의 선두에 있던 닛산의 순수 전기차가 글로벌 시장에 단 두대 뿐이다.
그 사이 중국, 미국, 유럽에서 BYD, 테슬라, 도요타, 현대차, 폭스바겐 등이 전기차 전용 플랫폼 개발을 완성해 공격적으로 라인업을 늘리고 점유율을 확대했다. 그러면서 닛산은 전동화 투자 시점을 놓쳤고 결국 시장 주도권을 잃었다.
내연기관 차량 경쟁력에서도 닛산은 강점을 보이지 못했다. 닛산은 주요 완성차 브랜드 중에서도 제품 개발 주기가 가장 긴 브랜드로 꼽힌다. 평균적으로 신차 개발에 37개월 이상이 소요되며, 도요타(24~30개월), 현대차(약 30개월)보다 현저히 느린 제품 사이클을 갖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플랫폼 전환 속도에 따라 생존이 갈리는 현실에서, 닛산은 기존 모델의 부분 변경에 의존하며 내연기관 차량 경쟁에서도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하나 더 지적을 하자면 테슬라, BYD, 현대차가 OTA(Over-the-Air) 업데이트, 커넥티비티 강화 등 디지털 측면에서 혁신을 이루는 사이 전통적인 자동차 하드웨어 개발 사이클에만 집중해 소프트웨어 중심 시대에 뒤처진 것도 있다.
닛산의 브랜드 슬로건인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혁신(Innovation that excites)’을 기업과 상품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됐고 브랜드 정체성마저 흐려지며 위기가 전방위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전 회장 카를로스 곤의 극적인 퇴진 이후에도 경영진 내부의 혼란은 지속된 것도 경영 위기가 심화하는 원인이 됐다. 후임 마코토 우치다(Makoto Uchida) 전 CEO는 불확실한 전략과 내부 갈등을 조율하지 못했고, 이는 리더십 신뢰 하락으로 이어졌다.
닛산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과 함께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라인업의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르노(Renault), 동풍자동차(Dongfeng)와의 파트너십 재정비, 기술 협력 강화, 생산 효율화와 비용 절감 등 다방면의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에스피노사 신임 CEO는 특히 플랫폼 수를 13개에서 7개로 줄이고, 차량 개발 주기를 30개월 이내로 단축하는 등 제조 효율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도요타나 현대차처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방향과 궤를 같이하지만, 아직은 변화의 속도와 실행력이 불확실하다.
닛산은 지금, 과거의 영광을 붙들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결단의 시점에 서 있다. 현대 자동차 산업의 생존 조건이 혁신의 속도라는 점에서 그에 걸맞은 속도와 방향, 그리고 끈질긴 실행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닛산이 알려 주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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