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 남겨진 문학가의 흔적을 따라서.
COURSE 문학의 길
방정환 선생 나신 곳 →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 → 염상섭 동상 - 박인환 집터 → 피맛골 → 김수영 생가 터 → 귀천 → 조선어학회 터
코스 거리: 2.9km
소요 시간: 2시간

대한민국의 근대와 현대는 명확히 ‘각각 어떤 특징이 있다’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근대에는 일제의 침탈 속에서 수용과 극복의 대상이 혼돈 속에 있었으며, 현대의 시작 역시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가치와 생존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 급급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의 미묘한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문학가들이다.

어린이 문학가
방정환 선생 나신 곳
종로의 복잡한 빌딩 숲 사이, 아주 좁은 녹지공간에 방정환 선생이 태어난 곳임을 알려 주는 표석이 하나 자리한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과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당시 외국의 동화를 번역해 동화책 <사랑의 선물>
을 간행했는데, 그 안에는 <안데르센 동화, 그림동화> 등에서 골라 낸 명작동화 10편이 실려 있었다. 이외에도 직접 동화를 짓기도 했고,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방정환 선생을 어린이 문학가라 칭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방정환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을 꼽자면 역시 ‘어린이’란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겠다. 1923년 3월, ‘개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 잡지가 인기를 끌며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익숙해진 것이다. 방정환 선생의 자취는 종로 곳곳에 숨어 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에 가면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를 알리는 기념탑도 만나 볼 수 있다.

▷Check Point 1
양정창학 터
방정환 선생 나신 곳 맞은편으로 ‘창학 터’ 표석이 자리한다. 창학 터는 1905년 5월12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립사학인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창학한 자리다. 당시 군부협판(현 국방차관)으로 있던 ‘엄주익’이 근대적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로 현재 양정고등학교, 양정중학교의 전신이다. '

▷Check Point 2
사역원 터
사역원 터 표석은 조선시대 당시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여진어 등 통역과 번역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역원’의 자리를 기념한다. 조선말, 이 자리에는 ‘한성전보총국’이 들어섰다. 창학 터에서 도보 5분 거리에 표석이 자리한다.
한글가온길을 따라서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
한글가온길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만든 테마 산책길이다. 코스는 세종대왕 동상부터 시작해 광화문광장, 경복궁 등을 거쳐 주시경집터까지 이어진다. 그중 세종예술의 정원은 ‘한글가온길 이야기 도보 여행’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세종예술의 정원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서울의 미소’. 웃는 입 모양과 웃음을 묘사하는 의성어, ‘하하하’를 소재로 한글의 우수한 조형미를 부각한 작품이다. 길게 이어진 ‘ㅎ’의 행렬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종로, 더 나아가 서울 공동체를 표상하기도 한다. ‘ㅎ’의 원통 내부에는 단청에서 보이는 다양한 색채를 부여했다. 이외에도 책을 읽고 있는 소녀상 등 재미있는 작품이 다양하다.

▷Check Point
사헌부 문 터 및 육조거리 배수로
사헌부 문 터 및 육조거리 배수로는 광화문광장 재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새롭게 확인된 유적이다. 현대의 지표면으로부터 약 3m 깊이에서 확인되었고, 육조거리 경계에 설치된 배수로, 사헌부 문터, 담장, 우물 등이 발굴되었다. 이와 함께 출토된 유물의 연대로 짐작해 볼 때, 조선 건국 초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헌부는 고려와 조선시대 감찰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기관인데, 그곳의 문 터는 정면 1칸, 측면 3칸 규모이며 양측으로 담장이 연결되어 있다. 담장은 장대석으로 조성했는데, 담장 석재의 일부는 전시를 위해 재현한 것이다. 사헌부 문 터 전면에서 확인된 우물 1기는 사헌부 영역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발견이다. 배수로는 조선 건국 초기 육조거리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 폭 120cm, 깊이 110cm 내외의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예리한 통찰력
염상섭 동상
광화문 교보문고로 들어가는 입구, 벤치에 걸터앉아 있는 어느 동상을 마주한다. 횡보 염상섭 작가의 동상이다. 염상섭 선생은 근대와 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자신이 살아간 시대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독립선언, 만주 이주, 해방 후 귀국 등이 소설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만세전>, 그리고 광복 이후 복잡한 양상을 보여 주는 <삼팔선> 등이 있다. 그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풀어낸 당시의 시대상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 보자.

▷Check Point
시전행랑
염상섭 동상 옆쪽으로 자리하는 종로 청진 2, 3 지구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수도의 중심에 자리했던 지역이다. 중심에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공간에는 거래가 생기기 마련. 대림 D타워 지상에 조선시대 당시 종로에 조성되어 있던 ‘시전행랑’을 이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시전은 국가에서 상인들에게 자리를 임대해 운영하던 관설시장이고 행랑은 거리에 줄지어 세운 상점을 뜻한다.
허무함이 담긴 시
박인환 집터
KT 광화문 빌딩 뒤편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놓여 있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거리>, <지하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의 집터 표석이다. 박인환 시인은 ‘전후(戰後, 전쟁 후)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 1946년이고,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 것이 1956년 3월20일이어서, 그가 겪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시의 주요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의 시는 일종의 허무함을 담고 있다. 이런 점이 전쟁 경험 후 불안 의식을 보여 준다고 해석되어 모더니스트 작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종로 최고의 맛 골목
피맛골
과거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까워 말이나 가마를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하급 관료나 서민들이 큰길을 가다가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했는데,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번거로웠던 서민들이 아예 큰길 양쪽 뒤편의 좁은 골목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민들이 연일 몰리게 되자 주점, 국밥집 등 먹거리 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골목을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 하여 피마(避馬)길, 혹은 피맛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는 대규모 건물이 이곳에 들어서며 피맛골의 이름과 명맥만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맛은 여전하다. 메밀국수, 보쌈, 낙지볶음 등 종로만의 특색 있는 먹거리가 사방 곳곳 펼쳐져 있다. 트렌디한 카페와 아기자기한 소품숍, 꽃집 투어도 놓칠 수 없다. 피맛골 중간 지점 길을 살펴보면 복원된 우물의 원래 위치 표시도 찾아볼 수 있다.

▷Check Point
서울지구 병사구사령부 터
과거 6·25 전쟁 당시 징병 업무를 담당했던 서울지구 병사구사령부가 자리했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병역제도는 1949년 8월6일, 최초로 병역법이 공포되어 병력모집이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바뀌었다. 이후 원활한 징병 업무 수행을 위해 1949년 9월1일, 서울을 비롯해 각 지구별로 ’병사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병사구사령부에서는 현역 징병 및 제2국민병 등록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징집된 청년을 모아 시청 광장 등지에서 입대식을 진행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쓴 시인
김수영 생가 터
김수영 시인 생가 터는 종로 탑골공원 맞은편에 위치한다. 1921년 11월, 이곳에서 태어난 김수영 시인은 청소년기 내내 약한 체질로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성인시절, 대학 진학을 간절히 소망했던 김수영 시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일본에서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당시 유학 비용도 문제였지만, 1943년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일제의 징병을 피하려고 귀국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미군 통역사, 언론사를 거쳐 1968년, 안타깝게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수영 시인의 삶을 관통하는 험난한 우리나라의 역사는 그의 작품에 모두 녹아 있다. 4·19 혁명에 대해 쓴 시, <푸른 하늘을>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투쟁. 김수영 시인의 문학에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Check Point
종로3가 보쌈골목
종로3가역 15번 출구에서 종로2가 방향으로 가는 뒷골목,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좁은 골목에 오랜 내공을 다져 온 보쌈 노포들이 여럿 자리한다. 긴 기다림을 감수하고라도 단골들시이 이곳 보쌈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에 있다. 20~30년 전통을 가진 보쌈집들의 주메뉴는 ‘굴보쌈’. 그날그날 푹 삶아 낸 야들야들한 돼지고기를 통영에서 공수해 온 탱탱한 생굴, 그리고 새콤한 무김치를 곁들여 제공한다. 박하지 않은 인심 역시 보쌈골목의 매력이다. 보쌈을 시키면 감자탕이나 닭볶음탕, 동태전과 두부전 등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서비스 음식을 푸짐하게 내준다.
천상병 시인의 공간
귀천
인사동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카페, 귀천. 이곳은 천상병 시인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과거 카페는 천상병 시인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했는데, 천상병 시인이 살아생전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자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을 이야기할 때 ‘동백림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동백림사건, 혹은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과 국내의 지식인 200여 명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면서 간첩 교육을 받으며 대남 적화활동을 했다며 발표를 했는데, 이미 7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상황이었다. 이때 중심에 있던 인물이 평양을 다녀왔던 유학생인 ‘이응노’와 ‘윤이상’이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 상과대학 동문이었던 ‘강빈구’의 죄를 알고도 알리지 않은, 이른바 ‘불고지죄’에 대한 혐의로 잡혀갔다. 이외에도 강빈구를 협박해 5만원을 갈취한 혐의도 적용됐다. 이후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적용받은 피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제는 천상병 시인이 중앙정보부 심문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받으며 3번의 전기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신체와 정신이 모두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후 그 후유증으로 거리에서 오해를 받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이 되는 사건도 펼쳐진다.
이때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동료 시인들은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유고 시집’을 내게 된다. 유고 시집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상병 시인은 친구의 동생, 목순옥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의 노력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고, 1993년에 그의 생을 마감한다.
이토록 다사다난한 그의 삶은 1979년 발표했던 <귀천>이란 시로 정리할 수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사동 골목길 작은 동네 카페, 귀천의 이야기다.

▷Check Point 1
탈방
우리나라 탈에는 2가지 계보가 있다. 놀이용 탈인 ‘산대탈’과 의식용 탈인 ‘하회탈’이 그것이다. 산대탈은 강렬한 색감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초기, 광화문 앞에서 금강산 모형으로 무대를 꾸며 산대탈 놀이마당을 꾸몄다고 한다. 하회탈의 경우 의식용 탈로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졌다. 덕분에 방 어느 곳에 고이 모셔 두어 무려 800년 동안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 탈이 보전되다 보니 정작 하회탈 제작 기법은 전승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현재 탈을 만드는 사람들은 옛 조상의 기억을 통해 탈 제작을 재현 중이다. 인사동 문화의 거리에 그의 ‘탈방’이 자리한다. 작은 매장 벽면에는 탈이 가득하다. 1984년 이곳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는 지금의 반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매일 탈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Check Point 2
구하산방
구하산방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방이다.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붓과 벼루를 판매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좌판을 펴 문방사우를 팔았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본이 매장을 만들고 상권을 형성했는데, 그 첫 매장이 바로 ‘구하산방’이다. 붓의 품질이 좋기로 워낙 유명세를 떨쳐서 과거 이런 농담도 있었다고 한다. ‘구하산방을 모르는 사람 중에 크게 된 사람 하나 없다. 특히 글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모두 구하산방을 거쳐 갔다.’ 구하산방은 과거 붓을 궁에도 납품했다. 그 증거로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이곳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액자가 가게 내부에 걸려 있다. 당대 최고의 한국 서화가인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고암 이응노 등이 모두 구하산방에서 재료를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구하산’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산 이름으로 9명의 신선들이 교유한다는 의미다.
우리말을 지킨 이들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는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정리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한 곳이다. 조선어학회 터 표석 앞 좁은 골목 안쪽 2층 건물에 그 사무실이 자리했었다. 1층은 이극로 선생이 머물렀고, 2층은 학회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1942년, 일제는 함흥의 여학생 일기장에서 시작된 조그마한 꼬투리로 한글 연구자들을 일제히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잡아들인 연구자들을 고문해 내란죄로 몰았고, 이 과정에서 이윤재와 한징, 2명의 연구자가 돌아가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후 일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명의 학자에게 2~6년의 실행을 선고한다. 당시 우리말을 지키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글·사진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종로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