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내구성, 혹한·혹서, 주행 성능과 충돌안전성, 공기역학 및 풍동, 방수·방진, 정숙성 및 NVH, 전자·전장 시스템, ADAS 등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제 사진과 같이 혹한지를 직접 찾아가는 신차 개발 과정이 사라질 수도 있다. (BMW)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혹한의 설원, 숨이 턱 막히는 사막의 열기, 급커브가 이어지는 산악도로와 시속 200km의 고속 질주까지, 신차 한 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완성차는 수백만 km를 달리며 수년간 가혹한 주행 테스트를 반복한다.
서스펜션의 반응 하나, 스티어링의 섬세한 조향 감성, 극한 상황에서의 제동력, 승차감에 영향을 미치는 미세한 진동, 각종 첨단 기능의 완벽한 작동 여부까지 신차는 일상의 도로뿐 아니라 극한의 환경에서도 성능과 내구성, 안정성, 정밀함을 모두 입증받은 후에야 소비자 앞에 선다. 그러나 이제 지구상의 험로를 오가던 자동차 개발 풍경은 과거의 장면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이런 오랜 개발 여정은 이제 북극도, 고산지대도, 고속 트랙도 아닌, 단 하나의 시뮬레이터 안에서 이뤄진다. 현대차그룹을 비롯해 유수의 완성차 업체들이 앞다퉈 도입을 검토 중인 가상현실(VR) 기반 주행 시뮬레이터는 실제 도로에서 수백만 km를 달릴 필요 없이 알고리즘 위에서 자동차를 설계하고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앤서블모션 '델타 시리즈’ 시뮬레이터는 실차 없이 극한 노면·기후와 고속 주행 · 급제동 상황을 재현해 서스펜션·조향·제동 성능을 실시간으로 검증한다.(Ansible Motion)
현실 그 이상으로 생생한 정밀 시뮬레이션 기술
현대차그룹이 도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진 장비는 영국의 시뮬레이터 전문 기업 앤서블모션(Ansible Motion)이 개발한 ‘델타 시리즈(Delta Series)’다. 이 시스템은 정교한 수학적 모델링(Multi-body vehicle dynamics)을 기반으로 실제와 거의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밀한 주행 환경을 가상 공간에서 구현해낸다.
실제 도로처럼 차량의 제원과 세부 설정값을 반영할 수 있으며 단순한 직진·곡선 주행뿐 아니라 급가속, 급제동, 비상 회피, 다양한 노면과 기후, 야간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여기에 사고 충돌 상황, 타이어 마모, 센서 오류, 통신 장애 등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테스트 시나리오로 구성할 수 있어 물리적 재현이 어려운 상황까지도 안전하고 정밀하게 검증할 수 있다.
시간, 비용 획기적 절감... 환경까지 아우르는 이점
가상 주행 시뮬레이터를 도입하면 차량 개발 초기 단계부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프로토타입 제작과 실차 평가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실차 시험에 소요되던 연료, 타이어, 장비, 인력 소모를 줄여 친환경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보통 신차를 개발하면서 고속·고하중 테스트가 누적될수록 전문가 투입 비용, 장비 마모, 유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VR 시뮬레이터는 이 문제들을 선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앤서블모션의 기술은 이미 BMW그룹, 포드, GM, 혼다 등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는 물론, 콘티넨탈, 넥센타이어와 같은 부품사에서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동일한 시뮬레이터 플랫폼을 이용하면 OEM과 부품사 간의 데이터 공유와 공동 검증도 가능해져 제품 개발 및 품질 보증의 효율성도 높아질 수 있다.
차종이 다양해지고 친환경 파워트레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완성차업체들은 적기에 적재 적소에 신차를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신차 개발 주기를 얼마나 빨리 줄일 수 있는지, 이에 따른 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곧 경쟁력이 된다. 지구상 극한지를 오가고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충돌 테스트, 시험로 주행 등의 험난한 과정을 대체할 수 있는 VR 시뮬레이터는 따라서 구세주나 다름이 없다.
가상의 VR 시뮬레이터는 실차 없이 실험실 안에서 모션 기반의 정밀한 운동 재현과 고속 주행·급제동·충돌 상황까지 완벽하게 구현한다. 이 장비는 4×4 m의 넓은 움직임 공간과 교환 가능 캐빈 시스템을 통해 실제 환경과 흡사한 테스트를 가능하게 한다.(Ansible Motion)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자동차 개발의 전환점
현대차그룹만 해도 2030년까지 전기차 21종, 기아는 2027년까지 PBV를 포함한 전기차 15종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들 모델은 빠르고 정밀한 검증이 필수다. VR 시뮬레이터는 고속 주행능력, 제동력, 전자장비 안정성 등 전기차 특유의 특성과 한계를 미리 파악하고 조율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자동차 산업은 지금, 하드웨어 중심의 전통적인 개발 방식에서 소프트웨어 기반의 디지털 전환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가상환경에서 차량을 설계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다.
앤서블모션과 같은 고정밀 시뮬레이터는 단순한 실험 장비를 넘어 차량 개발의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으로 기능하며, 완성차 제조사의 경쟁력과 속도를 결정짓는 핵심 인프라로 급부상하고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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