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vs 바다. 여행계의 영원한 난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또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 난제의 정답을, 여름이 머무는 해남에서 찾았다.

땅끝에서 비로소 시작된 여행
땅끝송호해수욕장
나의 외갓집은 해남이다. 그 옛날, 명절마다 반복했던 해남까지의 여정은 어린아이에게 천리길처럼 느껴졌다. 명절 교통대란이 겹쳤으니 말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1리가 약 0.4km, 서울에서 해남까지는 약 400km니 말 그대로 천리길인 셈이다. 그럼에도 해남까지의 여정은 늘 설레었다. 해남으로 향하는 모든 시간에는 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휴게소에 잠시 내려, 한가득 사 온 음식을 먹으며. 그 차창 밖으로 스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 아마도 해남은 나도 모르게 시작한 내 인생 최초의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쉼을 즐기는 것. 그게 결국 모든 여행의 본질이니까.

세월이 흘러 도로 사정이 좋아지며 그 시절의 길고도 길었던 향수는 짧아진 거리만큼 아쉬워졌다. 물론 해남을 찾는 여행자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다. 뻥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오랜만에 해남으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바다. 해남은 남쪽의 바다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땅끝마을 송호리에 있는 땅끝송호해수욕장이 먼저 떠오른다. 송호(松湖)라는 이름은 맑고 잔잔한 물결이 호수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해변은 모래가 비단처럼 곱다. 이 모래사장 주위로 무성한 해송림이 펼쳐진다. 무려 600그루가량의 소나무 숲 뒤로 잔잔한 해남의 바다가 보인다. 이 담백한 풍경은 관광객보다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해수욕보다는 산책이 잘 어울린다. 참고로 대략 200년이란 시간 동안 송호해수욕장 곁을 지켜 온 해송림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해남의 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니, 나무를 새싹 다루듯 아껴 줘야 한다.

해변 초입에는 송호해수욕장을 필두로 한 자전거길 안내도가 부착되어 있있다. 부제목은 ‘여행의 시작’. 이제야 땅끝으로 왔는데 또 다른 시작이란. 깜빡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땅끝 해남에서 비로소 여행을 시작해 본다.
예술을 품은 미래 정원
산이정원
산이 정원이 된다. 해남군 산이면에 있는 ‘산이정원’의 뜻풀이다. 계곡면의 흑석산이 해남의 수문장이라면 이곳 산이정원은 영암군에서 삼포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해남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산이정원은 해남군 산이면에 조성 중인 미래도시 ‘솔라시도’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미래와 함께하는 정원’이라는 슬로건 아래 2024년 5월에 탄생했다.

1단계에 해당하는 16만5,000m2(약 5만평)를 정식 오픈한 지도 어느새 1년이 흘렀지만, 첫인상은 여전히 갓 생긴 정원처럼 깔끔하다. 메인 코스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맞이정원’을 시작으로 자연 호수를 배경으로 한 ‘물이정원’, 덩굴식물로 가득한 채플이 있는 ‘서약의 정원’ 등 다양한 종류의 테마 정원이 이어진다. 정원을 지나며 마주하는 조형물들은 동심을 부르는 동시에, 없던 예술적 감성마저 일깨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역시 ‘유영호 작가’의 그리팅맨이다. 하늘마루에 있는 이 거대한 조형물은 몸을 숙여 스스로 다리 역할을 하는 거인을 형상화했다. 재밌는 건 그 다리 위를 오가는 수많은 인종이다. 총 42명의 사람들이 어깨 위에 올라타 있다. 지구와 환경,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여기에 듣는 즐거움은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맑고 차분한 음악소리도 좋지만, 소리의 정원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과 그 바람을 타고 울리는 청아한 종소리가 매력적이다. 귀로 듣는 산이정원의 황홀경. 노리정원에 홀로 선 동백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다가올 산이정원의 2단계 그랜드 오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쉼과 치유 사이
흑석산 자연휴양림
내륙에서 해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크게 두 줄기다. 한 곳은 산 너머로 이어지는 계곡면, 다른 한 곳은 바다 건너로 이어지는 산이면. 그중 해남의 주요 관광지를 목적으로 한 여행자라면 대부분 계곡면을 거치게 된다. 계곡면의 중심에는 북풍을 막아 주어 ‘해남의 수문장’이라는 불리는 ‘흑석산’이 있다. 해남엔 정말 많은 명산이 있지만, 유독 흑석산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해남의 유일한 자연휴양림이 이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흑석산 자연휴양림은 흑석산 자락에 있는 울창한 숲과 계곡 사이에 있다. 5월이면 철쭉이 흐드러지고 수백 년 된 참나무류 군락지는 사시사철 휴양림을 지키고 있다. 종합안내도를 보면 이 싱그러운 산자락을 얼마만큼 깔끔히 정돈했는지 알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애정 넘치는 하트 모양의 ‘사랑의 산책로’를 따라 숲속의 집 A, B, C, D동과 신선동, 선녀동, 나무꾼동 등의 숙박시설이 가득 들어섰다. 하트 모양 안에는 야영장과 장미정원,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한 숲속 체험활동을 위한 유아 숲 체험관도 있다.

주목해야 할 곳은 참나무 숲으로 연결되는 ‘흑돌길’과 무장애 데크로드 초입에 있는 치유센터, 프로그램실이다. 이곳에선 사전에 신청한 방문객을 대상으로 치유 명상, 오감 트레킹, 목공예, 아로마 테라피 등의 다채로운 치유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흑석산이 간직한 온도와 습도, 피톤치드를 오롯이 느끼며 치유받는 시간. 당신의 일상에 쉼이 필요하다면, 흑석산 자연휴양림을 방문할 때다.
100년을 지켜 온 길라잡이
목포구등대
일몰 무렵, 해남군 화원면 해안도로는 다도해의 파랑이 빨갛게 물들어 간다. 그 절묘한 빛의 조화를 잠시 감상하고 가야 한다며, 내 발길을 이끈 곳이 있다. 해남 화원면의 랜드마크, ‘목포구등대’다. 해남에 있는 목포 옛(구) 등대라니? 알고 보니 옛 구(舊)가 아니라 입 구(口)다. 그렇다. 목포구등대는 목포항으로 연결되는 해남군 화원면과 목포 달리도 사이의 입구를 안내하는 길라잡이 등대다.

이 순백의 등대는 폭이 약 600m, 수심 30m 내외, 평균 유속 8노트의 까다로운 협수로를 통행하는 선박들을 돕기 위해 100년 전부터 이곳을 지켜 왔다. 범선을 형상화한 36m의 높이, 꼿꼿한 자태를 보면 그 외형에 상처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건립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하지만 현재 큰 등대는 사실 2003년에 설치되었다. 진짜 ‘목포구등대’는 현 등대 뒤편 언덕에 있는 작은 등대다. 이번엔 옛 구(舊)가 맞다. 1908년에 설치된 옛 등대는 역사적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100년 만인 2008년에 등록문화재 379호로 지정되며 제 자릴 지키고 있다, 여전히.
석양을 푼 다도해는 어느덧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이렇게 보니 등대가 마치 다도해를 비상하는 한 마리의 두루미 같기도 하다.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오가는 두루미처럼 혹은 등대 너머로 해남과 목포를 오가는 선박처럼 땅끝 해남의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다시 있을 해남 여행을 그려 본다. 언제나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해남 여행, 이번에도 역시 옳았다.
수국 피는 여름이 오면
4est수목원
별(Star), 암석(Stone), 이야기(Story), 배울 거리(Study)를 한데 담은 해남의 보물이 있다. 4est수목원 이야기다. 4est수목원이라는 이름에 새겨진 다양한 의미처럼 연중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무려 20만 평방미터(약 6만평)의 대지에 1,600여 종의 식물을 빼곡히 심었다. 그중에서도 봄에는 장미, 여름에는 수국, 가을에는 팜파스, 겨울에는 얼음을 테마로 사계절 축제를 꾸렸다. 그 덕에 4est수목원은 ‘2025년 꼭 가 봐야 할 10대 수목원’에 선정됐다.


현재는 수국이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2만1,000m2(약 6,353평) 규모의 수국정원에 5가지 계열의 수국 400여 종, 3만여 본이 만발했다. 그 틈엔 국내 최초 한국 자생 수국도 꽃을 피웠다. 국내 수국정원 중 최대 크기로 알려진 만큼 수국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걸어도 걸어도 눈에서 형형색색 수국이 가득 피어난다.

수국의 색감이 정점에 달하는 6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는 수국축제도 펼쳐진다. 4est수목원의 수국 축제는 매년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 사이에 열리는데 올해는 6월14일부터 7월14일까지 진행된다. 우리나라 여름, 땅끝에는 형형색색의 수국이 피어난다.

국내 최대 수국정원에서 열리는
2025 땅끝해남 수국축제
4est수목원의 여름은 6월 초여름부터 꽃망울을 터트리는 수국을 보러 오는 이들로 가득하다. 특히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는 수국축제가 펼쳐진다. 400여 품종의 수국은 약 한 달간 온 힘을 다해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하얀색 등 갖가지 색감을 마음껏 뽐낸다. 그 뒤를 가득 메운 초록색 나무가 도화지가 되어 마치 알록달록한 낙원의 모습을 자아낸다.
글·사진 최재원 에디터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해남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