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사이로 호수가 숨을 쉰다. 잔잔하거나 거세거나, 언제나 제 뜻대로다. 영원을 닮은 유구한 들판 위. 바이슨의 눈빛은 바람보다 먼저 계절을 알아챈다. 그 고요한 눈동자 속에, 어제의 여름과 내일의 가을이 함께 머문다. 이 땅의 자연은 무엇 하나 익히지 않고 그대로 내어 준다. 있는 그대로의 뜨거움과 있는 그대로의 차가움. 너무나 더디고 진솔해 잊히지 않는 온도다. 그 땅에서 풀잎은 솔직하고 이슬은 말이 없다. 들녘의 그림자는 해가 기우니 기울 뿐이다. 사람들 모여 앉아 굽는 빵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부푼다. 느긋한 불과 욕심 없는 손길. 기다림마저 풍경처럼 숨 고르듯 머문다. 모든 것이 조용히 제 속도로 흘러가던, 캐나다 매니토바의 어느 오후.

●대초원과 바이슨,
레이크 오디 바이슨 방목지
LAKE AUDY BISON ENCLOSURE
사실 착륙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이번 여정은 수평선의 연속일 거라는 걸. 비행기 창문 너머, 발아래 하염없던 평원을 기억한다. 아직 플레이하지 않은 게임 맵처럼 ‘무의 상태’ 같은 땅. 빌딩이든 롤러코스터든, 게임 머니로 뭐든 세우고 봐야 할 것 같은 그런 땅. 두 가지 의문이 내내 머릿속을 울렸던 것 같다. 첫째, 땅이 어떻게 이렇게 넓지? 둘째, 땅이 어떻게 이렇게 평평하지?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캐나다 매니토바주에 대한 스케치를 시작한다. 수천 년 전, 매니토바는 아가시즈호(Lake Agassiz)라는 거대한 빙하호 아래 잠겨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담수호 중 하나였던 아가시즈호는 8,200년 전쯤 빙하가 녹으면서 대부분 말라 버렸다. 호수가 사라진 자리엔 오랜 시간 퇴적물이 천천히, 고르게 쌓였다. 빙하에서 흘러든 미세한 흙과 점토, 유기 물질들이 바닥에 가라앉았고, 덕분에 농작물 재배에 알맞은 비옥한 토양이 형성됐다. 그렇게 드러난 넓고 평평한 호수 바닥. 지금의 매니토바 평원이 바로 그 땅 위에 펼쳐진 거다.

매니토바는 서스캐처원과 앨버타와 함께 캐나다 3대 대평원주로 분류된다. 이 세 곳을 아우르는 캐나다 중서부의 대초원 지대를 ‘프레리 지역(Prairie Region)’이라 부른다. 깨끗한 땅에 맑은 물, 농업이 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 대표 곡창지대답게 밀과 카놀라(유채) 생산량이 압도적이다. 캐나다 전체 밀 생산량의 무려 95%, 카놀라의 98%가 여기, 프레리 지역에서 나온다. 프레리 지역이 없다면 캐나다인들의 식탁에선 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평야를 따라 황금빛 곡물 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이 지역의 얼굴 같은 장면이다.

매니토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매니토바의 상징, ‘바이슨(Bison)’이다. 우리말로는 들소라고 불리는 대형 초식 동물로, 소처럼 생겼지만 훨씬 크고, 힘세고, 생존력도 강하다. 매니토바는 풀을 뜯으며 무리 지어 이동하는 바이슨의 광활한 생활 반경에 딱 맞는 지형이다.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기후 역시 바이슨이 살아가기엔 최적의 환경.
그런데 매니토바인들에게 바이슨은 단순한 야생 동물이 아니다. 생태와 역사, 문화를 관통하며 오랜 세월 대지와 인간을 이어 온 존재다. 수천 년간 크리(Cree), 다코타(Dakota), 아시니보인(Assiniboine) 등 평원 원주민들에게 바이슨은 생존이자 곧 삶의 기반이었다. 고기는 식량이 되고, 가죽은 옷과 텐트로 재탄생했으며, 뼈는 무기와 도구가 돼 줬다. 바이슨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희생’으로 여겨졌고, 많은 부족들이 사냥 전후로 감사 기도를 바쳤다. 꿈에 나타난 바이슨은 신의 계시나 조언으로 해석됐고, 주술사들은 그 형상을 빌려 병을 치유하거나 자연의 질서를 읽어 냈다. 원주민들의 물질적 삶뿐 아니라 정신적 세계의 중심에도 언제나, 바이슨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미국 서부를 향한 이주 열풍은 바이슨의 멸종을 불러왔다. 유럽계 사냥꾼들은 값비싼 가죽을 노리고 방아쇠를 당겼고, 미국 정부는 그 절멸을 조용히, 그러나 전략적으로 환영했다. 당시 서부 개척을 추진하던 미 정부는 평원 원주민과 지속적인 충돌을 겪고 있었는데, 바이슨을 제거하는 것이 곧 원주민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효과적인 수단이라 판단했던 것. 그 결과, 1800년대 초만 해도 북미 평원을 뒤덮고 있던 3,000만 마리 이상의 바이슨은 1880년대 중반, 고작 1,000마리 미만만이 남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원주민 공동체는 이 갑작스런 붕괴 앞에 생계는 물론 전통과 정체성에까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1894년, 미 의회는 옐로스톤 국립 공원 내 밀렵 행위를 금지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며 바이슨 보호 운동의 시발점을 마련한다. 이를 계기로 연방·주 정부와 민간 보존 단체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북미 야생 바이슨 개체 수는 약 50만 마리 규모로 회복 중이다. 매니토바의 라이딩 마운틴 국립 공원(Riding Mountain National Park) 내 레이크 오디 바이슨 방목지는 대표적인 바이슨 복원 현장 중 하나다. 1931년 앨버타에서 들여온 20마리의 바이슨을 시작으로, 현재 약 50마리의 바이슨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비행기로 인천에서 밴쿠버를 경유해 매니토바의 주도 위니펙(Winnipeg)까지. 그리고 다시 위니펙에서 북서쪽으로 4시간가량 차를 몰아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레이크 오디 바이슨 방목지. 쉼 없이 달려온 그 길 끝에, ‘살아 있는 북미 역사’가 지금 눈앞에서 풀을 뜯고 있다. 방목지의 대표 체험인 바이슨 관찰 드라이브 덕에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 역사가 너무도 묵직하고 고요해, 눈앞의 장면이 마치 해묵은 꿈처럼 느껴진다.
바퀴 끝에 이는 부드러운 흙먼지, 그 사이로 광활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갈색의 그림자들. 바이슨은 이제 화해와 재생의 상징이다. 매니토바의 평원을 여행하다 그들 떼를 마주친다면 단지 멋진 풍경을 본 것이 아니다. 이 땅이 품고 있는 기억, 공동체가 지켜 낸 지혜, 그리고 다시금 살아나고 있는 생명의 서사를 마주한 것이다. 이 땅의 리듬은 바람도, 사람도 아닌, 바이슨이 만든다.

Think You Know Bison?
바이슨에 관한 재밌는 사실 10가지
1. 바이슨은 북미 최강의 체급을 자랑한다. 북미에서 가장 무거운 육상 포유류로, 수컷은 최대 1톤까지 나간다. 두터운 목과 어깨부의 거대한 머리는 성인 여성만 하다.
2. 덩치에 속지 말 것. 느릿해 보여도 시속 60km까지 뛴다. 웬만한 자동차 속도다. 은퇴한 공원 매니저 팻(Pat) 왈, 실제로 예전에 방목지에서 일할 때 바이슨이 전력 질주로 돌진해 와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울타리에 널브러져 죽은 척하니 그제서야 잠자코 돌아갔더랬다. 그러니 갑자기 풀밭에서 달려오는 바이슨을 마주친다면…, 뭐, 두 눈 감고 조용히 기도하면 된다.
3. 바이슨의 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으면 그건 경계심이 높아졌거나, 흥분했거나, 공격 태세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당장 5초 안에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도망쳐야 한다는 뜻.
4. 점프력이 수준급이다. 무려 1.5m 높이의 울타리도 거뜬히 넘는다. 그래서 국립 공원의 바이슨 울타리는 1.5~2m 이상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많다. 우직한 이미지에 숨겨진 반전.
5. 타고난 수영꾼이다. 앞다리와 뒷다리를 유연하게 저어 안정적으로 물 위에 뜬다. 큰 폐활량과 튼튼한 근육 덕에 꽤 먼 거리도 무리 없이 건넌다. 캐나다 국립 공원에서는 강을 헤엄쳐 이동하는 바이슨 무리가 자주 포착되는데, 일부 관광객들은 ‘물소 아니야?’ 하고 착각하곤 한다고.
6. 흔히 ‘버팔로(Buffalo)’라 불리지만, 진짜 버팔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산다. 북미 바이슨은 생물학적으로 이들과 다른 종이고, 학명도 다르게 분류된다.
7. 털갈이 시즌인 봄이면 머리부터 털이 벗겨지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계절의 신호가 된다. 머리는 북슬북슬, 엉덩이는 민둥민둥. ‘동물계의 요상한 패션쇼’ 같은 모습.
8. 바이슨의 나이는 뿔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어린 바이슨의 뿔은 짧고 곧으며, 뾰족한 편. 나이가 들수록 길이가 길어지고 곡선이 더 휘어지며, 끝이 무뎌진다.
9. 밥 먹을 때 뿔을 쓴다. 눈 덮인 들판에서 뿔로 눈을 밀어내고 그 아래 숨겨진 풀을 찾는다. 무심한 듯 ‘이 밑에 뭔가 있을 텐데’ 하고서. 뿔은 그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도구다.
10. 바이슨 투어를 마친 뒤 할 말은 아니지만…, 고기가 꽤 맛있다. 소고기와 비슷하지만, 더 진하고 고소하다. 풍미는 깊은데 누린내는 없고, 지방은 적고 단백질은 많다. 북미에선 ‘가장 건강한 붉은 고기’라 불린다고.
●고유 명사로 기억될 이름
클리어 호수
CLEAR LAKE
구글 맵에 ‘클리어 호수(Clear Lake)’를 검색하면 미국 몬태나주의 호수, 캘리포니아의 한 마을, 심지어 뉴질랜드의 작은 호수까지 등장한다. 그만큼 ‘맑은 호수’는 전 세계 어딘가에 수없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니토바의 클리어 호수에는, 그 흔한 이름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지도로 보면 수많은 ‘클리어 호수’ 중 하나지만, 한 번 다녀온 이에겐 다시는 대체될 수 없는 이름. 흔한 명사에서, 단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될 그 이름.



클리어 호수는 라이딩 마운틴 국립 공원 내에 있다. 이름답게 수질이 맑다. 정말 강물이 이 정도로 ‘씨스루’일 수 있나 싶게 맑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호수가 위치한 국립 공원 전체가 보호 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경계 안에서는 상업적 농업이나 대규모 도시 개발이 금지돼 있다. 게다가 내륙형 호수라 유입되는 물도 주로 빗물과 지하수 같은 자연 순환에서 온다. 여기에 캐나다 국립 공원청의 철저한 수질 관리까지 더해져, 클리어 호수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휴양지답게 주말이면 카약, 카누, 패들보드를 타러 놀러 온 현지 여행객들이 호수 위를 유영한다. 속이 비치는 편지지 같은 물 아래, 물고기의 투명한 잔상이 한 줄의 문장처럼 흐른다.


클리어 호수를 품은 마을의 이름은 와사가밍(Wasagaming). 호수의 관문이자, 작디작은 휴양 마을이다. 과장 좀 보태서, 커피 한 잔 내리면 마을 절반이 그 향을 맡을 정도다. 고로 시끌벅적한 리조트 타운과는 거리가 멀다. 하루만 머물러도 숙소 주인장이 내 이름을 부르고, 아이스크림 가게 종업원이 내 주문을 눈치챈다. 옷가게 사장은 ‘어제 사간 그 티셔츠, 역시 좀 커 보이더라’며 스몰 사이즈를 주섬주섬 꺼내 온다. 마을 모두가 나의 존재를 안다. 아니, 알아 준다. 어떠한 여행객도 여기선 ‘소비자’가 아니라 ‘동행자’가 된다. 짙은 마음의 농도가 스침도 인연으로 만드는 곳. 물만큼이나 맑은 사람들의 숨결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고유 명사가 되는 곳이다.
●평야 위에 피어난 우크라이나,
셀로 우크라이나
SELO UKRAINA
클리어 호수에서 북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나타나는 다우핀(Dauphin). 클리어 호수가 선글라스 낀 여름 휴양지라면, 다우핀은 자수 놓인 앞치마를 두른 전통 마을 같다. 한쪽엔 느긋한 휴식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선 오래된 이야기가 숨 쉰다. 이 조용한 시골 마을 한편에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품은 ‘작은 우크라이나’, 셀로 우크라이나가 자리한다.


‘셀로(Selo)’는 우크라이나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 마을’인 셀로 우크라이나가 왜 매니토바에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캐나다 정부는 광활한 프레리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해외 이민을 적극 유치했다. 땅은 넓고 비옥했지만,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던 매니토바에 새로운 인구가 필요했던 것. 같은 시기, 우크라이나는 아직 독립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종교 탄압과 경제적 궁핍, 정치적 불안 속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삶의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메마른 땅에서 생계를 이어 가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 캐나다는 ‘약속의 땅’이었다.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신앙, 아이들이 굶지 않아도 되는 밥상, 내 손으로 일군 땅에서 피워 낼 미래. 그 모든 가능성을 짊어진 채, 우크라이나인들은 먼 북미 대륙으로 이주했다.

1891년 첫 대규모 이주를 시작으로, 20세기 초까지 약 17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다. 그들은 벌판을 갈고, 벽돌 대신 통나무로 집을 짓고, 자신들만의 언어와 음식, 신앙, 전통을 이 땅에 심었다. 그렇게 캐나다 프레리에는 작은 우크라이나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오늘날 매니토바는 캐나다 내에서 가장 큰 우크라이나계 커뮤니티 중 하나를 자랑한다.

셀로 우크라이나는 그런 역사적 흐름의 집약체다. 캐나다 속 우크라이나인의 뿌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답게, 이민자들의 농업 중심 생활상과 이민사를 담고 있다. 30여 채의 전통 건물들은 당시의 삶을 되살리는 무대다. 전통 의상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은 당대의 인물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실제처럼 삶을 연기한다. 1902년에 건축된 통나무집, 1927년에 세워진 교회, 1924년에 문을 연 구두 수선소, 1920년에 지어진 시골 학교까지. 하나하나의 공간은 고단한 정착기 속에서도 공동체를 일구고, 종교를 지키며, 자녀를 가르치고, 문화를 잊지 않으려 했던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준다.

이곳을 단순한 민속촌 따위로 소개하기엔 애정과 수고를 다해 이곳을 살아내는 자원봉사자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셀로 우크라이나는 옛 건물의 복원을 넘어 ‘기억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곳이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나도, 그들의 이야기와 정체성은 여전히 바람 따라 대초원을 누빈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캐나다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