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사찰과 숲길, 가장 순수한 바다, 백색의 미학, 계절의 색감, 한강의 노을, 에디터가 수집한 가장 한국적인 여행의 순간들.

평창
Woljeongsa Temple & Needle Fir Forest
월정사 & 전나무숲
평창 여행은 지역의 랜드마크인 월정사와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서 시작된다. 월정사로 가는 길부터 이미 자연의 품속이다. 나무가 만든 자연 터널을 지나 월정사의 입구 격인 금강교에 닿는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오랜 역사의 사찰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목조문수동자좌상, 상원사중창권선문, 상원사동종 등 많은 문화재도 있다. 특히, 국보 팔각구층석탑의 보수공사가 지난해 하반기에 끝나면서 사찰이 다시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또 산의 기운이 모인 곳에 자리한 적광전도 있다.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어서 조사당, 삼성각, 수광전, 범종루 등 사찰을 둘러보고, 불교수행관을 지나 오대천까지 보면 이 공간을 충분히 누린 것이다. 월정사에서 열반에 닿았다면, 그 평안을 숲길에서 이어가면 된다. 1.9km의 전나무 숲길(입구-숲속쉼터-할아버지 전나무-일주문해탈교-금강교)에서 나무의 기운으로 일상의 긴장감을 다시 누그러뜨린다. 자연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여행자는 맨발로 걷기도 하는데, 그 감촉이 남다르다. 수분을 살짝 머금고 있을 땐 브라우니처럼 쫀득한 느낌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그저 하늘 위로 높게 솟아오른 전나무를 보며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이천
Ye's Park
이천 도자예술마을
이천에는 고귀한 손놀림으로 빚어낸 걸작들이 모여 있다. 도자기를 테마로 한 박물관과 미술관, 갤러리가 도심 곳곳에 있다. 먼저 설봉산 자락에 자리한 이천시립박물관, 경기도자미술관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이천시립박물관에서 1,000년 이천 도자 문화의 역사를 마주한다. 특히 31명(6명 타계)의 도자기 명장을 비롯해 수많은 작가가 꽃을 피운 도자 문화와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현대 도자기에 특화된 미술관도 있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한국 도자예술을 기록하고 있는 경기도자미술관이다. 1만 7,000점에 달하는 현대 도예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즐겼던 도예 문화를 시대순, 작가별로 구분해 감상할 수 있어 이해도가 높아진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관람하는 재미를 느꼈다면 이천의 아름다움을 집으로 데려갈 차례다. 반려 도자기를 찾을 목적으로 이천 예스파크 도자예술마을로 향한다. 이곳은 250여 개 공방이 모여 대규모 도예촌을 형성하고 있다. 40만6,978m2(약 12만 3,000평)라는 엄청난 대지에 가마마을과 사부작1마을, 사부작2마을, 회랑마을, 별마을, 카페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다. 전통적인 것도, 현대적인 것도 있는, 즉 사방에 매력적인 도자기가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경이다. 관상용은 물론이고 실용적인 도자기도 많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들 것이다. 마치 도자기들이 ‘정말 예쁘지 않아? 나 한번 이용해 볼래?’라며 말을 거는 것처럼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취향 따라 고르면 되는데, 마음이 가는 건 깔끔한 흰색 도자기나 부드러운 색감과 원목 소재를 활용한 것들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간결하고, 외유내강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렇다. 감상용으로는 순백의 달항아리에 꽂혔다. 콕 짚어 말할 순 없지만, 응시하고 있으면 속 깊은 곳에서 감동이 차오르고,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또 보고만 있어도 풍요로운 기분이 든다.
게다가 공방에서 직접 도자기를 빚을 수도 있다. 공방별로 각자의 개성을 살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향구 명장의 남양도예에서는 명장과 함께 조선백자를 만들 수 있다. 손끝에 감각을 모아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느껴 보자. 이 밖에도 마을의 공방에서는 가죽, 목공, 옻칠, 유리, 금속, 회화, 조각 등의 분야에서 활약 중인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고성
Unification Observatory & Cheongganjeong
통일전망대 & 청간정
사람의 손을 덜 탄 듯한 고성에서 순수한 동해를 만났고, 차마 닿지 못하는 바다를 눈으로 담았다. 전자는 고성 8경 중 하나인 청간정이고, 후자는 통일전망대에서 본 북녘땅이다. 청간정은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아담한 중층 누정으로, 동해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해가 저무는 시간에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아침에는 붉은 태양을 선물한다. 여행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좋은 셈이다. 이곳에서 고성에서의 여정을 곱씹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통일전망대에 가려면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안보교육 영상을 시청해야 한다. 그 후 민통선 검문소까지 지나야 전망대에 다다른다. 입구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풍산개 ‘금강’과 ‘해랑’이가 여행자를 반기면서도 마치 수문장처럼 보인다. 두 친구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으로부터 선물 받은 ‘곰이’의 새끼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본 무대로 입장한다. 고민할 것 없이 바로 테라스로 나가면 된다.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금강산 구선봉, 위장마을, 해금강, 금강산 육로, 고성 최동북단 감시초소 GP 등을 맨눈으로 보게 된다. 바로 앞에 있는 땅이지만, 닿지 못하는 세계라고 생각하니 묘한 감정이 든다. 참고로 전망대 4층에서는 디지털 망원경을 통해 각 장소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경주
Gyeongju National Museum
Silla Millennium Archive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가을이면 괜스레 문학, 예술과 가까워지고 싶어진다. 그럴 땐 1945년 문을 연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하면 된다. 신라와 경주의 우아한 감각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첫걸음은 신라천년서고에서 시작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간한 도서는 물론 국내외 전시 도록과 신라 및 경주학 관련 도서 등 방대한 양의 서적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5성 호텔 라운지처럼 우아하게 꾸며져 있고,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편안한 좌석을 갖춘 것도 특징. 문화유산을 사유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공간 자체가 여행지인 셈이다. 활용하는 법은 단순하다. 상설 및 특별 전시관을 관람하기 전, 이곳에서 선행 학습하고 이동하면 된다.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들을 더 깊고, 폭넓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Cheomseongdae Observatory
첨성대 일대
경주는 도보여행에 적합한 목적지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가 중심이 되며, 대릉원, 계림, 내물왕릉, 동굴과 월지 등이 지척에 있다. 첨성대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에 포함될 정도로 가치가 크고,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구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가을이 되면 이 주변이 다양한 색감으로 물든다. 넓은 유휴지에는 각종 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10월의 주인공은 핑크뮬리다. 9월 중순 이후부터 색감이 진해져 10월에는 만개한다. 길가에 있는 수많은 단풍나무도 노란색,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여행자를 유혹한다. 또 교촌한옥마을, 황리단길, 월정교, 숭문대 같은 사진 스폿도 가까이에 있다.
서울
Nodeul Island
노들섬
한강은 애틋한 공간이다. 종종 버거운 출근길에는 멋진 풍경으로 마음을 달래 주고, 화창한 날에는 서울살이의 행복감에 취할 수 있도록, 너른 공간을 내어준다. 노들섬도 그중 하나다. 섬의 이름은 ‘백로가 놀던 돌’이라는 뜻의 노돌에서 유래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중지도로 불리며 한강 중심에서 백사장과 스케이트장으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는데, 1960~70년대 들어 개발 계획이 무산되며 다가가기 어려운 섬이 됐다. 고운 땅을 내버려 둘 순 없던 터라 서울과 시민들은 다시 힘을 냈고, 2019년 9월 마침내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기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강과 숲 자연이 있고, 갤러리와 스튜디오 등 예술도 있다. 또 식당과 카페, 휴게공간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도 갖췄다. 하이라이트는 잔디마당에서 즐기는 피크닉, 강바람을 맞으며 한껏 여유로움을 누린다. 참, 10월에는 특히 하루라도 더 찾아가면 좋겠다. 2025년 11월부터 노들 글로벌 예술섬으로 새롭게 거듭날 준비에 들어가서 그렇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