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고향 피렌체, 영원의 도시 로마를 묵묵히 걸었다. 여행은 서서히 낭만으로 물들었고, 끝내 웅장한 결말에 닿았다.
●Firenze
피렌체가 키운 문화적 상상력
피렌체는 인문주의 도시의 표상이다. 종교, 예술, 건축, 미식 등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을 골고루 갖춰서 그렇다. 이러한 것들은 여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우피치 미술관 등에서 만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예술 걸작들이 있고,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피렌체>, <한니발> 등은 이 도시를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표현했다. 그렇게 피렌체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가 된다. 베키오 다리와 조토의 종탑, 메디치 예배당 같은 건축물은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기에 토스카나 풍미가 스민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 와인 같은 풍부한 미식 문화까지 어우러지면, 여행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거름이 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들이 있다. 먼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녀 주인공의 재회 장면의 무대가 됐던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Piazza Santissima Annunziata)이다. 누그러진 햇살이 성당의 외벽에 부드럽게 스며들 때 광장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이 된다. 다음으로는 메디치 예배당의 카펠라 데이 프린치피(Cappella dei Principi)다. 메디치 가문의 권위를 예술적으로 드러낸 곳인데, 구약과 신약의 장면들이 장엄하게 펼쳐진 천장화가 압권이다.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에서는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1345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다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피렌체의 다른 다리들이 파괴됐을 때도 살아남았다. 먼 과거에는 정육점 등이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에는 금세공업자와 보석상들로 채워졌다. 여전히 보석과 귀금속 관련 상점이 있어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다.
미식은 배를 채우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공간, 음식, 환대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경험이다. 피렌체에는 르네상스 시대를 닮은 것처럼 장식된 레스토랑들이 도처에 있는데, 그중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아토 디 비토 몰리카(Atto di Vito Mollica)가 운영하는 비스트로(Salotto Portinari Bar & Bistrot)를 눈여겨볼 만하다. 식당 내부는 고전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고 해산물, 토스카나 전통 식재료를 활용한 세련된 메뉴 구성으로 만족감을 높인다.
여행자의 이상적인 밤
피렌체의 밤은 유독 길다. 먼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도시의 지붕을 천천히 물들이는 석양을 감상하고, 새로운 저녁을 축하하는 버스킹으로 흥을 돋운다. 도시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천천히 도심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붉은 테라코타 지붕을 나침반 삼아 걷고, 불빛이 흔들리는 아르노강 위를 하염없이 걷는다.
폰테 알레 그라치에(Ponte alle Grazie) 다리를 건너면 비아 데 네리(Via de Neri) 거리가 시작된다.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이 새어 나오고, 그 사이로 향긋한 포카치아 냄새가 퍼진다. 거리의 명물, 알 안티코 비나이오(All’Antico Vinaio) 앞에는 저녁까지 긴 줄이 이어진다. 햄과 치즈로 가득 찬 포카치아 샌드위치와 시원한 맥주로 허기도 달랜다. 그렇게 걷다 보면 문득 골목 사이로 베키오궁(Palazzo Vecchio)의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지인의 ‘곧 멋진 풍경이 나올 거야’ 라는 말이 골목 끝에서 현실이 됐다.
지금은 여행자의 거리로 평화롭지만, 이곳에는 피렌체의 격동이 숨 쉬고 있다. 거리 이름 ‘비아 데 네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노리(Nori) 가문에서 비롯됐다. 그중 프란체스코 노리는 1478년, 메디치 가문을 전복하려던 파치 음모(Pazzi Conspiracy) 속에서 로렌초 데 메디치를 구해낸 인물이다. 살벌했던 권력의 역사 위를 오늘의 여행자가 걷는 셈이다.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에 이르면, 거리의 악사들이 피렌체의 밤에 배경음악을 더한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회전목마가 돌아가며 여행자를 동화 속으로 초대하고, 18세기부터 자리를 지켜 온 카페 길리(Caffè Gilli)에서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다.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예술과 종교, 과학, 기술, 철학 등이 한데 엮이며 만들어 낸 화려한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건축물 중에서는 성당에 마음이 간다. 그 정점에는 도시의 상징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이 있다.
처음에는 붉은빛의 돔이나 우뚝 솟은 탑에 시선이 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색과 청록색 대리석도 피렌체의 미학을 이루는 큰 축이라는 걸 알게 된다. ‘폴리크로미(Polychromy)’라 불리는 양식으로, 대리석의 색을 이용해 회화처럼 장식하는 토스카나 특유의 건축법이다. 피렌체 대성당 외에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수도원(Abbazia di San Miniato al Monte) 등도 이와 같은 양식으로 지어진 곳이다. 피렌체의 성당들은 돌과 색이 빚어낸 걸작들인 셈이다.
가장 성스러운 곳은 로마에 둘러싸인 바티칸 시국에 있다. 바티칸 시국은 독립 국가지만, 여행의 범주에서는 로마와 한몸이다. 2025년 교황의 나라는 희년(Jubilee)을 맞아서 더욱 성스러웠다. 특히, 희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맨 오른쪽 출입구인 성문(Holy Door, Porta Santa)이 열린다. 거룩한 문턱을 넘어서면 지은 죄에 대한 벌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성스럽고 위대한 문은 2026년 1월6일까지 열려 있으니, 아직 늦지 않았다.
참고로 희년은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때를 뜻하며,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첫 희년을 선포했다. 25년 주기로 희년이 돌아오며, 특별 희년이 없다면 2050년에 다시 성문이 열린다.
●Roma
로마에서는 멈출 수 없어요
화창한 날의 로마는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듯 도시 전체가 빛난다. 파란 하늘 아래 놓인 수많은 유적은 어떤 각도로 봐도 선명하고, 해가 저물면 따스한 빛이 한껏 스며들어 분위기를 더한다. 2,700년의 역사를 단 며칠 만에 쫓을 순 없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여정의 시작점은 언제나 광장이다. 고대 로마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는 곳 말이다.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에서 출발해 비아 델 코르소 거리를 따라 걸었다. 중간중간 길을 벗어나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에도 발도장을 찍는다.
로마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내어준다. 평범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기원전 27년에 지어진 판테온의 웅장한 모습을 불쑥 내놓고, 고개를 돌리면 콜론나 궁전(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지) 같은 화려한 미술관도 보여 준다. 그렇게 걷다 보면 청동 기마상이 지키고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에 닿는다. 계단을 올라 정면을 응시하면 로마의 과거가 펼쳐지는데, 마치 다음 행선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로마 제국 시대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Foro Romano)와 도시의 랜드마크 콜로세움이 지척에 버티고 있다. 그렇게 로마는 여행자를 다시 걷게 한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약 5km 직선거리 내, 로마의 아주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두 가지 감각으로 기억한 저녁
로마는 오후 5시30분부터 근사한 저녁을 향해 달려간다. 식사 전에는 적당한 자리에 서서 일몰부터 기다려야 한다. 해가 낮게 눕기 시작하면 로마의 유산들은 황금빛으로 물드는데, 보고 있어도 어느 틈에 벌써 그리운 기분이 드는 묘한 순간이다. 특히, 테베레강과 바티칸 시국,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가 한 프레임에 담긴 모습은 로마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또 핀초 언덕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루프톱 바 등 조금 높은 위치에서도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시각적 쾌감 이후에는 미각 차례다. 로마의 밥상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둠이 짙게 깔리는 시간이 돼서야 식당도 인파로 북적인다. 로컬 맛집은 이르면 오후 7시30분, 대개 오후 8시부터 현지인들이 자리를 채운다. 본격적인 겨울 날씨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루프톱 레스토랑과 바에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고층 건물이 많지 않은 도시라 루프톱에서 탁 트인 하늘과 근사한 경치를 만끽할 수 있어서 그렇다.
로마를 대표하는 4가지 파스타도 음미해야 한다. 까르보나라(Carbonara),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 아마트리치아나(Amatriciana), 그리치아(Gricia)이며, 모두 양젖으로 만든 치즈인 페코리노 로마노를 활용하는 게 특징이다. 또 돼지고기의 볼살이나 턱살을 소금과 후추로 염장하고, 숙성한 관찰레도 맛의 포인트다. 심플하지만 선명한 맛을 원한다면 카치오 에 페페가 좋겠다. 페코리노 로마노 특유의 향과 후추의 톡 쏘는 알싸함, 파스타의 씹는 맛,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뤄 물리지 않는 맛을 완성한다.
우리나라의 김치찌개처럼 웬만한 식당에서 위 음식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스파게티와 리가토니, 피치, 페투치네 등 면에 따라 식감이 달라지고, 사용하는 관찰레와 치즈 브랜드에 따라 풍미도 미묘하게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로마 파스타 순례를 하면서 송아지 고기를 활용한 살팀보카 알라 로마나(Saltimbocca alla romana), 아티초크를 활용한 카르초피 알라 로마나(Carciofi alla romana), 주먹밥을 튀긴 아란치니와 비슷한 수플리(Suppli) 등도 경험하는 걸 추천한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