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가을비, 젖은 낙엽, 빛바랜 단풍. 늦가을이 은은히 번지는 캐나다 밴쿠버를 산책했다.
*올해 4월, 캐나다관광청은 ‘캐나다 가을 추천 여행 코스’를 공개했다. ‘단풍국’다운 캐나다의 매력을 진득하게 느낄 수 있도록 10가지 주제로 80개 코스를 한데 모은 가이드다. 밴쿠버 역시 액티비티, 미식, 도심 속 산책 등 다양한 테마로 소개돼 있다. 밴쿠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반드시 참고해 볼 것!
호수 위에 내려앉은 가을
존 헨드리 파크
John Hendry Park
아무리 길 하나만 건너도 순식간에 자연이 펼쳐지는 곳이 밴쿠버라지만, 여긴 그 풍경의 전환이 특히 드라마틱하다. 도심에서 살짝만 벗어났는데도 공기의 밀도부터 달라진다. 밴쿠버의 동쪽, ‘트라우트 호수(Trout Lake)’라는 자연 호수에 자리한 공원. 아침이면 산책하는 주민들과 물가를 거니는 거위들이 어울려 ‘평화’라는 그림을 완성한다. 가을이 되면 호수 주변의 단풍나무가 붉고 노랗게 물들고, 잔잔한 수면 위로 낙엽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비까지 촉촉이 내리면 마치 북유럽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적막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앞뒤 일정은 여유롭게 잡고 가길 추천. 생각보다 훨씬 오래 머물고 싶어질 확률, 거의 200%다.
밴쿠버 대표 가을 명소
스탠리 파크
Stanley Park
밴쿠버의 가을 명소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 1888년에 조성된 공원답게 세월이 깃든 고목들과 길 위에 깔린 낙엽까지, 모든 풍경이 고즈넉하다. 가을이면 단풍나무와 전나무, 삼나무가 어우러져 숲 전체가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말밤나무가 물드는 로스트 라군 주변 산책로에는 가을 분위기가 깊게 감돌고, 9km 길이의 씨월(Seawall)에서는 붉은 단풍과 태평양의 잔빛이 풍경의 대비를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콜하버 방향으로 이어지는 씨월 끝자락에 닿으면 물 위에 정박해 있는 요트들이 반겨 준다. 잔잔한 수면은 요트의 흰 선체와 가을 하늘빛의 잔상을 그대로 비춘다. 영화감독이라면 한 번쯤 카메라에 담고 싶어질, 욕심나는 풍경이다. 참, 스탠리 파크를 무모하게 걸어 다닐 생각은 애초에 접는 게 좋다. 면적이 여의도의 1.4배다. 인근의 자전거 대여 숍을 이용하는 게 훨씬 현명하다.
셔터가 멈추지 않는 정원
퀸 엘리자베스 파크
Queen Elizabeth Park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음이 울려 퍼진다. 가을이면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모이는 장소, 퀸 엘리자베스 파크. 밴쿠버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해, 공원 정상에서는 도시와 바다, 노스쇼어 산맥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125m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계절마다 색을 바꾸지만, 가을의 정원은 특히 깊고 선명하다. 가장 인기 있는 포인트는 쿼리 가든(Quarry Garden). 한때 채석장이었던 곳을 정원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계단식 언덕과 곡선형 다리, 단풍으로 물든 수목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원 전체가 빈티지한 풍경화 같고, 아래로 내려가면 마치 숲속 분지에 들어온 듯 아늑하다. 3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아담한 규모지만, 포토 스폿이 곳곳에 있어 걸음이 자꾸만 느려진다. ‘작지만 알차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원.
밴쿠버 로컬들의 바다
해든 파크
Hadden Park
관광객들의 말소리에 귀가 어지러울 때, 훌륭한 피신처가 되어 줄 공원이 있다. 밴쿠버에서 가장 ‘현지인다운’ 바다 산책길, 해든 파크다. 키칠라노(Kitsilano) 지역의 바닷가를 따라 펼쳐진 이곳엔 관광객보다 강아지 산책을 나온 현지 주민들이 훨씬 많다. 담요를 깔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자전거를 세워 두고 낙엽이 흩날리는 산책로를 걷는 이들이 풍경의 여백을 채운다. 공원 앞쪽엔 잔잔한 파도가 부딪히는 자갈 해변이 있고, 맞은편에는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가 자리한다. 해든 파크 선착장에서는 작은 페리들이 오가며 두 곳을 연결한다. 파란색과 하얀색의 폴스 크릭 페리와 아쿠아버스가 대표적이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항해지만,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새삼 아름다워 또 놀랍다.
바다와 도시가 맞닿은 자리
잉글리시 베이 비치
English Bay Beach
바다와 도시가 가장 가까이 맞닿은 해변. 밴쿠버 도심 한가운데, 웨스트엔드 끝자락에 자리한 잉글리시 베이 비치는 스탠리 파크 씨월의 남쪽 시작점이자, 도시에서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해변이다.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 주는 게 매력인 곳이기도. 여름의 뜨거운 활기가 물러난 자리, 수영하던 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가을이 오면 잉글리시 베이 비치는 잠시 숨을 고른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줄어든 해변엔 파도 소리만 남고, 단풍으로 물든 나무 곁으로 커피를 든 이들이 바다를 바라본다. 큰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 놓은 원목 형태의 벤치는 해변의 상징적 요소다. 바다를 향해 길게 놓인 벤치들은 투박하지만, 그 단순함이 바다 풍경과 희한하리만치 잘 어울린다. 잔잔한 파도와 서늘한 가을빛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귀한 곳.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캐나다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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