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가 뻐근하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절벽이라니.
발밑은 가파르고, 숨은 차오른다. 내가 알던 서울은 사라졌다.
드러난 도시의 윤곽이 새삼 낯설다.
종로구 창신동에 대하여
낙산 자락에 자리한 창신동은 한때 화강암 채석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이곳의 돌들은 도시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가 되어 떠났다. 잘려 나간 화강암은 옛 서울역과 서울시청 같은 건축물로 옮겨져 서울을 떠받쳤다.
그렇게 산은 비워졌고, 도시는 단단해졌다. 남겨진 절벽엔 사람들이 들어왔다. 채석장이 문을 닫은 뒤, 1960년대부터 절벽 위와 아래로 차곡차곡 집이 붙기 시작했고, 골목이 이어지며 오늘의 창신동이 만들어졌다. 돌이 빠져나간 자리에 사람이 들어온 셈이다.
도시가 스스로를 세우기 위해 가져간 것을, 삶이 다시 끌어안아 메운 풍경. 그래서인지 창신동은 새로 지은 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오래 버텨 온 거석처럼 단단하다.
경사가 심한 동네는 대체로 사정이 많다. 창신동도 오랫동안 달동네로 불렸다. 쉼 없이 위아래를 오르내려야 하는 삶. 주거지로는 선뜻 선택받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그렇게 이곳에 모여 살았다. 집과 집 사이 간격은 좁았고, 생활과 노동의 경계는 희미했다.
골목 한편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활과 노동은 여기서 서로의 문을 자주 두드렸고, 때론 같은 방에 앉아 있었다. 그 흐릿한 경계 뒤에 이 동네가 품게 된 역할이 있다.
1962년 동대문 평화시장이 문을 연 이후 봉제 노동자들이 하나둘 이 일대로 스며들었고, 1970~80년대에 이르러서는 약 3,000여 개의 봉제 공장이 촘촘히 들어선 하나의 산업 현장이 되었다. 옷을 만들고, 다리고, 수선하고, 배달하는 일들이 일상을 채웠다.
‘사는 곳’이자 동시에 ‘만드는 곳’. 대한민국 패션 산업의 빠른 리듬은 멀리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골목에서, 사람들의 손끝에서 자라난 역사다.
핫플이 된 채석장이 남긴 절벽
창신동 절벽 골목에 오르면, 갑자기 서울이 푸근해진다. 고층 빌딩의 반짝이는 스카이라인 대신 겹겹이 포개진 지붕과 창문과 간판은 낡고도 정겹다. 전망대처럼 보라고 만든 자리가 아니라, 살다 보니 생긴 자리에서 보는 풍경이어서 눈은 더 오래 머문다.
생활의 높이에서 마주한 서울은 화려하기보다 담백하다. 사람은 결국 화려함에 지쳐서 솔직한 곳으로 돌아온다. 요즘 창신동이 뜨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곳에서의 ‘힙함’은 꾸며서 얻은 표정이 아니라, 오래 버티며 생긴 표정이다. 낮은 난간, 가파른 계단, 닳아 버린 벽 모서리….
세련된 연출과는 거리가 먼 이 불균형한 풍경이 오히려 창신동의 균형을 만드는 존재들. 그 위로 젊은 감각의 공간들이 소리를 낮춘 채 스며드는 중이다.
홍콩 콘셉트의 중식당 ‘창창’은 쫀득한 꿔바로우 만큼이나 낙산공원과 서울 전경이 인상적이고, 수제 도넛 가게 ‘도넛정수 창신’과 루프톱을 품은 ‘테르트르’는 이미 뷰 맛집으로 유명해진 지 오래다. ‘채석장 전망대 카페 낙타’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 낸다. 넓은 창 너머 절벽과 도시가 겹쳐진 풍경은 이곳만의 독자적인 시선을 만든다.
창신동은 오래된 동네가 젊어진 곳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오래된 시간의 촉감을 알아보기 시작한 곳이다. 그 촉감은 애매한 유행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고, 암벽의 단면처럼 단단히 마음에 남는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