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 generated image @ChatGPT 5.2
PC를 스스로 조립해본 지도 참 오래되었다. 8086 이전부터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소프트웨어는 익숙했으나 내 손으로 직접 PC를 조립한 것은 AMD 486DX/100부터였다. 그 시절 두꺼운 매뉴얼과 점퍼 설정, 펜티엄의 등장에 환호하던 순간, 애슬론과 코어2 시절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오늘날 라이젠과 하이엔드 GPU의 괴물 같은 성능까지. 수많은 부품이 손을 거쳐 갔고, 그 안에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라져간 것들도 적지 않다.

예전에는 케이스를 열면 복잡한 케이블과 각종 카드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케이스를 열어보면 생각보다 허전하다. 보드 위에 밀착된 SSD, 커다란 그래픽카드 하나,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된 전원 케이블.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규격과 커넥터가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밀려났다. 때마침 틀어놓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이 흘러나온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묘한 애잔함이 스며든다. 한 시대를 함께했던 규격과 장비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기사에서만큼은 그 기억들을 차분히 꺼내보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 SATA 케이블은 볼펜으로 돌돌 말아 정리하는 게 고수의 시그니쳐였다!
가장 먼저 체감되는 변화는 저장장치다. 한때 PC 저장장치는 3.5인치 하드디스크가 절대적인 표준이었다. 이후 2.5인치 SSD가 등장하며 속도의 혁명을 가져왔고, SATA3 인터페이스는 사실상 모든 메인스트림 시스템의 기반이 되었다. 케이스 전면이나 측면에 드라이브 베이를 마련하고, SATA 데이터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는 작업은 조립 과정의 기본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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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M.2 NVMe SSD가 주류로 자리 잡았다. 메인보드에 직접 꽂는 작은 기판 하나가 수천 메가바이트의 전송 속도를 뿜어낸다. 케이블도 필요 없고, 별도의 장착 공간도 거의 차지하지 않는다. SATA SSD는 이제 속도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메인보드 설계 역시 M.2 중심으로 이동했다. 고급형 보드는 M.2 슬롯이 네 개 이상 제공되는 반면, SATA 포트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 으레 PC 전면 하단에 존재하던 SATA 스토리지 브라켓들도 완전히 사라지는 추세다
이 변화는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PC 내부 공간 활용도가 높아졌고, 선정리 난이도도 낮아졌다. 케이스 제조사들도 더 이상 대량의 드라이브 베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수랭 라디에이터 공간이나 그래픽카드 장착 길이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대용량 백업용 HDD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주력 저장장치의 자리는 이미 M.2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 항상 VGA 위쪽에 1배속 PCIe 슬롯이 존재하는 것이 국룰이었다
확장 슬롯의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의 PC는 확장 카드의 집합체였다. 사운드카드, 랜카드, TV 수신카드, 캡처카드, 심지어 IDE 확장 카드까지 각종 카드들이 메인보드에 꽂혀 있었다. PCI에서 PCIe로 넘어오며 x1, x4, x8, x16 등 다양한 슬롯이 공존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실상 x16 슬롯 하나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픽카드 때문이다.

▲ VGA 장착용을 제외한 모든 PCIe 슬롯을 생략한 MSI MAG B850M 박격포 WIFI<265,660원>
나머지 슬롯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운드는 온보드가 충분히 좋아졌고, 네트워크 역시 기본 2.5GbE 이상이 탑재된다. Wi-Fi와 블루투스도 기본 옵션이 되어가고 있다. 캡처카드는 USB 외장형이 더 간편하다. 기능의 통합과 외장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저배속 PCIe 슬롯은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이 흐름은 메인보드의 소형화와도 연결된다. m-ATX와 ITX 보드가 점점 많이 팔리고 있고, SFF 빌드가 유행하면서 물리적 확장 공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PC는 더 작아지고, 더 정제된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전원공급장치 역시 변화의 흐름을 피해 가지 못했다. 과거에는 3핀, 4핀 주변기기 전원 커넥터가 당연한 존재였다. IDE 드라이브에 연결하던 굵은 전원 케이블은 케이스 내부를 복잡하게 만들던 주범이었다. 게다가 4핀 MALE 커넥터의 핀은 왜그리 뒤로 빠지는지, 소위 '삐꾸'나서 접촉 불량이 자주 났었다. 이후 SATA 전원 커넥터가 등장하며 정리되었지만, 이제는 이조차 연결할 일이 줄어들고 있다.

▲ VGA에 들어가는 12VHPWR 케이블
<이미지 출처 : silverstonetek.com>
구형 전원 커넥터는 저가형 케이스 팬이나 일부 LED 장치에서만 간간히 쓰인다. 메인스트림 이상의 시스템에서는 사실상 설 자리가 없다. 대신 ATX 3.0, 고출력 12VHPWR 커넥터 등 새로운 전력 규격이 등장했다. 전원 체계는 더 단순해지는 동시에 고출력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선정리 난이도는 낮아지고, 튜닝 자유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 DVI, HDMI, DP가 모두 제공되던 ZOTAC의 GTX460 그래픽카드
영상 출력 포트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한때 메인보드 후면을 차지하던 D-Sub, 그리고 디지털 전환기의 상징이었던 DVI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보급형 모니터조차 HDMI를 기본 제공하고, 그래픽카드는 DisplayPort와 HDMI 중심으로 구성된다. 구형 모니터를 사용하려면 변환 젠더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 DP, HDMI만 각각 2개씩 제공하는 SAPPHIRE 라데온 RX 9070 XT NITRO+ OC D6 16GB<1,422,170원>
이 변화는 단순히 커넥터 모양이 바뀐 것이 아니다. HDMI와 DisplayPort는 영상과 오디오를 동시에 전송하며, 고해상도와 고주사율을 지원한다. 기술은 사용자 경험을 단순화했고, 그 대가로 구형 장비는 교체를 요구받고 있다. 실제로 구형 DVI 모니터 사용자들은 업그레이드 시점에 자연스럽게 신형 디스플레이로 넘어가게 된다.

▲ 아직도 판매되고 있는 ASUS H110M-K 아이보라<119,030원>의 I/O 패널
입력장치 분야에서도 레거시 포트는 사라졌다. 메인보드 가장 구석을 차지하던 PS/2 포트는 이제 거의 볼 수 없다. 한때는 키보드와 마우스의 안정성을 위해 선호되기도 했지만, USB의 발전과 무선 기술의 확산으로 의미를 잃었다. 기계식 키보드가 대중화된 시대지만, 연결은 대부분 USB다.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는 배터리 효율과 응답속도가 크게 개선되며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왔다.

▲ 2016년 9월 29일 기준, 영상 편집 PC로 몸값을 자랑하던 필자의 시스템
이처럼 사라져가는 규격들은 공통점을 가진다. 기능이 통합되었거나, 더 빠르고 단순한 대안이 등장했거나, 물리적 공간과 효율을 위해 정리된 결과라는 점이다. PC는 분명 복잡함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내부는 한결 깔끔해졌고, 외부 연결은 통합되었으며, 사용자는 예전보다 훨씬 적은 설정과 고민으로 더 높은 성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반을 넘어선 과거지향적 아저씨의 마음 한켠에는 묘한 아쉬움이 남는다. 한때는 진리처럼 여겼던 규격들, 슬롯 하나를 더 확보하기 위해 고민하던 시간들, 점퍼 설정을 맞추며 씨름하던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진다. 체력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처럼, 익숙했던 존재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변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고 PC를 구매하거나 업그레이드를 고민할 때, 이런 경험은 의외로 큰 힘이 된다. 겉으로는 저렴해 보이는 시스템이 실제로는 확장성의 한계에 막혀 있을 수 있고, 이미 단종 수순에 접어든 규격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지금 무엇이 주류이고, 무엇이 과거로 향하고 있는지 구분하는 눈은 결국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다.
기술은 멈추지 않는다. IDE 케이블과 플로피 디스크, CD-ROM 드라이브가 그랬듯이, 지금 당연하게 쓰는 SATA 케이블과 DVI 포트, PS/2 단자 역시 언젠가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넘어갈 것이다. 사라짐은 아쉽지만, 그것은 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변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추억하되, 다가오는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오랜 시간 PC와 함께해온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마무리가 아닐까?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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