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판매사들의 가격 인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전기차 가격표를 들여다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5년 전과 비교해 숫자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다. 현대차그룹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한 아이오닉 5는 2021년 4695만 원부터 시작했다. 현재 시작 가격은 4740만 원으로 액면상 거의 제자리다.
같은 기간 내연기관 SUV 투싼은 2020년 2255만 원에서 지금 2805만 원대로 올랐다. 세대 변경과 상품성 개선을 이유로 오름폭이 상당했다.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가격 변동에 대한 소비자 인식은 다르다. 특히 전기차는 “비싸졌다”는 인상보다 “더 싸질 것 같다”는 기대가 더 강하다. 실제로 각종 프로모션과 지역별 보조금을 더하면 아이오닉 5를 3000만 원대에 구매할 수도 있다. 숫자는 비슷한데 시장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올해 초 전기차 시장의 가격 경쟁은 본격화했다. 테슬라는 모델 3·모델 Y 가격을 최대 940만 원 인하하며 포문을 열었다. 볼보는 EX30 가격을 700만 원 낮춰 3991만 원으로 재책정했고 인하 발표 후 1주일 만에 1000대 계약을 끌어냈다.
국산 브랜드는 프로모션으로 가격 부담을 낮추고 있다. 르노코리아는 세닉에 최대 800만 원 자체 보조금을 내걸었고 현대차는 아이오닉 5 최대 590만 원, 아이오닉 6 최대 550만 원 할인, 기아는 EV 9에 최대 600만 원 구매 혜택을 제시했다.
과거 ‘찔끔’ 수준이던 프로모션은 이제 수백만 원 단위로 커졌다. 일부는 일회성이 아니라 아예 공식 가격표를 조정했다. 여기에 중국 브랜드의 저가 공세까지 더해졌다. BYD는 2450만 원부터 시작하는 ‘돌핀’을 내놓았고 중국 생산 모델 Y 가격도 추가 인하됐다. 판매사마다 가격표를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볼보코리아가 EX30 가격을 최대 700만 원 인하했다. (오토헤럴드 DB)
문제는 가격이 출렁이면서 소비자의 셈법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경기도 부천에 거주하는 40대 직장인 이 모 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네 차례나 구매를 미뤘다. “연말이면 더 싸질 것 같고 연초엔 재고 할인 얘기가 나오고 보조금이 확정되면 또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1월 볼보 EX30을 구매한 송 모 씨(경기도 의정부)는 불과 며칠 뒤 700만 원 가격 인하 소식을 접했다. “배신감이 든다”는 반응이다. 그는 “가격을 내려 1000대를 계약했다는 뉴스는 염장을 지르는 것 같았다”며 주변에 전기차 구매를 말리고 있다고 했다.
전기차 가격이 노량진 수산물처럼 ‘시가(時價)’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소비자는 품질보다 손해를 덜 볼 수 있는 타이밍을 계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전기차 가격 경쟁의 배경은 비교적 단순하다. 환경 규제 강화로 수요 급증을 기대하며 생산을 늘렸지만 판매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공급이 수요를 웃도는 구간이 생겼고 재고 부담은 가격 인하라는 가장 빠른 처방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할인은 단기적으로 판매를 끌어올리지만 “기다리면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키운다. 그 기대는 다시 구매 지연으로 이어지고, 판매사는 또 다른 할인을 고민한다. 선(先) 구매자의 박탈감, 잠재 고객의 관망 심리, 반복되는 가격 조정. 악순환의 구조다.
한 수입차 브랜드 관계자는 “가격은 한 번 손대면 올리든 내리든 모두 부담이 크다”며 “전기차 성능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은 ‘좋은 차냐’보다 ‘언제 사도 손해 보지 않는 차냐’가 더 중요해졌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가격 자체가 아니라 가격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급작스러운 가격 인하에 소비자가 느끼는 허탈함도 훨씬 커졌다. "지금 이 차를 사면 손해를 보지 않을까"라는 의심으로 새 차를 사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확고한 믿음 없이 가격을 내리는 것만으로 전기차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 오토헤럴드(http://www.autoherald.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