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차를 고쳐야 할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엔지니어도 모르고, 팀 동료들도 모른다.”
2024년 포럼8 랠리 재팬(FORUM8 Rally Japan)에서 드라이버 챔피언에 오른 티에리 누빌과 현대 WRC 팀이 포디엄에서 환호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모습도 보인다. (김흥식 기자)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현대 월드랠리팀(WRC)의 현재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2024년 드라이버 챔피언을 배출하며 정점에 올랐던 팀이 불과 한 시즌 만에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한 채 심각한 성적 부진에 빠졌다.
2026 월드랠리챔피언십(WRC) 시즌 초반 포디엄은 토요타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시즌 5라운드까지 진행된 현재 드라이버 부문 상위권은 토요타가 독식하고 있으며, 제조사 부문에서도 양 팀 간 격차는 98점까지 벌어졌다. 경쟁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흐름에 가깝다.
최근 열린 5라운드 ‘랠리 이슬라스 카나리아스(Rally Islas Canarias)’는 이러한 격차가 단순한 수준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토요타는 전 스테이지를 석권하며 1위부터 4위까지를 휩쓸었다. 반면 현대 WRC 팀은 최고 순위 5위에 그치며 3분 이상의 큰 격차를 드러냈다. 사실상 경쟁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다.
문제는 결과보다 더 근본적인 데 있다. 팀의 중심이자 2024년 시즌 챔피언 티에리 누빌은 최근 인터뷰에서 차량 성능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리 시도해도 차에서 좋은 느낌을 얻지 못하고 있다”라며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나도, 엔지니어도, 팀 동료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레이싱 승부 가르는 피드백, 토요타에 숫적 열세
시즌 5라운드 ‘랠리 이슬라스 카나리아스(Rally Islas Canarias)’에서 우승을 차지한 세바스티앙 오지에(토요타 가주 레이싱)가 포디엄에서 팀 동료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WRC)
레이싱에서 드라이버의 ‘피드백(feeling)’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다. 차량의 한계와 거동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이다. 이 감각이 무너졌다는 것은 차량이 일관된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드라이버가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신호다.
현대 WRC 팀 내부에서도 문제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 i20 N Rally1은 특정 조건에서는 경쟁력을 보이지만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성능이 급격히 저하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노면과 기후 조건을 오가는 WRC 특성상 치명적인 약점이다.
WRC는 스노우(snow)와 아이스(ice)가 혼재된 몬테카를로 랠리를 시작으로 순수 스노우 이벤트인 스웨덴 랠리, 극한의 거친 그래블(gravel) 노면이 이어지는 사파리 랠리 케냐, 변화무쌍한 기후의 타막(tarmac) 중심 크로아티아 랠리 등 서로 다른 조건의 10여 개 이상의 이벤트로 구성된다.
각 라운드는 노면과 기후, 그립 수준이 완전히 달라 차량의 기본 성능은 물론 드라이버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지가 승패를 좌우한다. 팀 관계자 역시 차량이 “좁은 조건에서는 매우 빠르지만 다양한 환경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계적 성능의 한계를 인정했다.
문제는 있는데 원인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
2024년 드라이버 챔피언 티에리 누빌은 최근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문제는 있지만 그 원인을 아무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현대자동차그룹)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단기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WRC 팀은 부진이 시작된 2025년부터 1년 가까이 문제 해결을 시도해왔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세팅이나 부품 문제가 아니라 차량 개발 방향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WRC 다수 우승 경력을 보유한 토요타와의 격차는 단순한 성능 차이를 넘어선다. 토요타는 다수의 Rally1 차량을 운영하며 다양한 조건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팅을 빠르게 최적화하면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반면 현대 WRC 팀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운영 규모로 데이터 축적과 대응 능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누빌 역시 “그들은 5대, 우리는 3대”라며 구조적 차이를 지적했다. WRC에서 제조사 포인트가 반영되는 Rally1 엔트리 차량 수를 언급한 것으로 바로 이 차이가 개발 데이터와 전략 운용 범위의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WRC 팀은 WRC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팀 중 하나다. 2014년 복귀 이후 꾸준히 경쟁력을 끌어올리며 2019년과 2020년 제조사 챔피언을 차지했고 2024년에는 티에리 누빌이 드라이버 챔피언에 오르며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기록했다.
개발 방향과 전략 전반 재검토 필요
WRC와 같은 가혹한 레이싱 환경에서 드라이버의 ‘피드백(feeling)’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 WRC 팀은 성능 개선을 넘어 개발 방향과 전략 전반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자동차그룹)
그러나 정점 직후 찾아온 이번 부진은 단순한 경기력 하락이 아니라 개발 방향성의 문제라는 점에서 장기화가 우려되고 있다. 반면 토요타는 오랜 랠리 경험과 기술 축적을 바탕으로 어떤 노면에서도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유지하며 올 시즌 압도적인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 WRC 팀은 시즌 첫 풀 그래블 이벤트인 ‘보더폰 랠리 드 포르투갈(Vodafone Rally de Portugal)’에서 반전을 기대하고 있다. 실제 테스트에서도 일부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드러난 문제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는 조건부 성과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현대 WRC 팀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분명하다.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기술 기반 모터스포츠에서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다. 빠른 성장으로 정상에 올랐던 현대차가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성능 개선을 넘어 개발 방향과 전략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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