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매력은 오래된 골목 안에도 숨어 있다. 차이나타운의 생생한 삶이 깃든 야오와랏 올드 마켓에서 출발해 힙한 뉴트로 감성이 깃든 송왓로드를 거쳐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딸랏너이까지 걷는 여정이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묘하게 뒤섞인 다채로운 도보 코스는 방콕의 짙은 일상과 낭만 속으로 여행자를 깊숙이 안내한다.
날것 그대로의 방콕, 야오와랏 올드 마켓
방콕의 정취를 걷는 여정의 출발점은 '야오와랏 올드 마켓(Yaowarat Old Market)'이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차이나타운 메인 거리 이면에 자리한 이곳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방콕 사람들의 생생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좁고 기다란 골목을 따라 허름한 상가와 노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시장 안에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 중국식 향신료, 각종 건어물 등 온갖 식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현지인들의 발길을 이끈다.
상인들의 활기찬 흥정 소리와 코끝을 스치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여행자들의 감각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세련된 도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로컬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흡수한다. 게다가 관우와 말을 모시는 흥미로운 사당(San Chao Pho Ma Lae)도 있는데, 말을 모시는 곳이라 초록색 채소를 올리는 게 재미 포인트다.
태국 스페셜티 커피의 진수, SCR
야오와랏 올드마켓의 활기를 뒤로하고 송왓로드로 접어드는 낡은 골목에 세련된 공간이 있다. 태국 스페셜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 'SCR(송왓 커피 로스터스)'이 여행자를 반긴다. 빈티지한 골목 정취와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가 어우러진 곳이라, 사진을 찍어도 감각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한 수준급의 스페셜티 커피에 있다. 특히, 태국 현지 농장에서 재배한 태국산 원두를 핸드드립(필터 커피)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정성스레 브루잉된 커피 한 잔에서 태국 원두 고유의 향미를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차갑고 달콤한 우유 위로 진한 에스프레소가 스며드는 시그니처 메뉴 '더티 커피'와 베이커리를 곁들이는 것도 추천한다. 송왓로드 특유의 뉴트로 감성을 엿보기에도, 여행의 쉼표를 찍기에도 제격인 휴식처다.
옛 방콕의 정취, 딸랏너이
송왓로드를 지나 닿게 되는 딸랏너이(Talat Noi)는 방콕이라는 도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차오프라야 강변을 따라 교역을 하던 화교들이 정착해 만든 오래된 동네다. 마치 미로처럼 얽힌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방콕의 깊고 다층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곳의 가장 큰 묘미는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뒤섞인 풍경이다. 중국식 전통 건축 양식을 간직한 낡은 상가 건물들이 카페나 갤러리로 부드럽게 변신해 여행객을 맞이한다. 특히 19세기 초 부유한 중국 상인 가문이 지은 쏘 헹 타이(So Heng Tai)는 중앙에 수영장이 있는 중국식 저택으로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자전거 수리점으로 시작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고 자동차 부품 시장으로 발전한 특유의 쇠내음 나는 골목 풍경도 딸랏너이만의 상징이다. 낡은 벽돌담에 녹슬어 방치된 빈티지 자동차, 오래된 부품들로 만든 로봇 조각상, 그리고 길모퉁이마다 그려진 개성 넘치는 벽화들이 야외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저택에서 즐기는 강변의 낭만, 홍시엥콩
딸랏너이의 빈티지한 벽화와 낡은 골목의 감성을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분위기 있는 식사로 쉬어갈 차례다. 목적지는 오래된 골목에서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카페 겸 레스토랑 ‘홍시엥콩(Hong Sieng Kong)’이다.
오랜 세월을 견딘 고건물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목조 기둥과 앤틱 가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과거 딸랏너이를 주름잡던 부유한 중국 상인의 비밀스러운 대저택에 초대받은 듯한 웅장하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가볍게 땀을 식혀줄 시원한 음료와 커피는 물론,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식사 메뉴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공간의 쓰임새가 무척 다양하다. 무엇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차오프라야강을 바짝 마주하고 있는 널찍한 야외 좌석이다.
해가 질 무렵 강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를 한잔 곁들여 보자. 붉게 물드는 강변의 낭만적인 야경이 방콕에서의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극적인 전환, 홀리 로사리오 성당
딸랏너이의 비좁고 빈티지한 골목을 빠져나오면 방콕의 얼굴은 또 한 번 극적으로 전환된다. 아름다운 노란색 외관을 자랑하는 시암상업은행(SCB)을 비롯해 우아한 유럽풍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강변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홀리 로사리오 성당(Holy Rosary Church)'이다.
현지인들에게 칼라와 성당(Kalawar Church)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18세기 후반 포르투갈 가톨릭 공동체가 세운 가톨릭 성당이다. 웅장한 고딕 양식을 자랑하며,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유럽에서 공수해 온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영롱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방금 전까지 지나온 낡고 북적이는 중국풍 시장과는 전혀 다른 평화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방콕이라는 도시가 품은 다채로운 층위의 역사를 실감하게 만드는 여정의 종착지로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활기가 넘치는 옛 시장부터 고요하고 성스러운 유럽풍 성당에 이르기까지, 골목을 따라 방콕의 여러 시대를 걸었다. 낡은 벽돌과 빈티지한 풍경마다 스며든 현지인들의 삶은 화려한 방콕과는 전혀 다른 깊은 매력을 선사한다. 차오프라야강의 노을과 함께 마무리한 이 여정은 방콕의 맨얼굴을 발견한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