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사 최초로 르망 24시 최상위 클래스에 도전해 완주에 성공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팀 크루.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르망 24시(WEC)는 3명의 드라이버가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머신을 몰아 극한의 내구성을 겨루는 세계 최고 권위의 레이스다. 자본과 기술은 물론, 24시간 동안 고장을 버텨낼 차량과 이를 뒷받침하는 운영 능력까지 모두 갖춰야만 비로소 '완주'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르망 24시는 완주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올해 FIA 월드 내구 선수권(WEC) 하이퍼카 클래스에 처음 도전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지난 6월 라 사르트 서킷(Circuit de la Sarthe)에서 열린 르망 24시에서 GMR-001 하이퍼카 19번 차량을 완주시켰다.
카타르 1812km와 스파 프랑코샹 6시간 레이스를 거쳐 르망까지 이어진 신생팀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도전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글로벌 모터스포츠 관계자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내구 레이스에서 드라이버의 역할은 절대적이지만 세 명의 드라이버가 24시간 동안 쉼 없이 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크루(Crew)의 헌신이 있었다. 레이스 엔지니어와 전략가, 물류 및 운영팀은 물론, 타이어를 교체하고 연료를 보충하며 차량을 정비하는 피트 크루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긴장감 속에서 레이스를 떠받친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첫 르망 완주 뒤에도 이들의 노력을 지원한 현대자동차그룹의 기술이 함께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대회에서 크루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운영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로보틱스와 수소 모빌리티 기술을 현장에 투입했다.
정비 크루의 '강철 어깨'가 된 웨어러블 로봇 '엑스블 숄더'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피트 크루. 24시간 질주가 이어지는 동안 13kg 무게의 타이어를 56회 이상 다뤄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현대자동차그룹)
가장 눈길을 끈 기술은 1분 1초가 승부를 좌우하는 피트 스톱(Pit Stop)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도까지 달아오른 브레이크와 타이어 열기, 연료 냄새가 뒤섞인 피트로드에서 메카닉들은 경기 내내 고강도 작업을 반복한다.
시속 300km 안팎으로 평균 5000km를 달린 하이퍼카에 장착되는 타이어는 한 개 무게만 약 13kg에 달한다. 차량 한 대가 경기 동안 사용하는 타이어는 최대 56개에 달하고 메카닉들은 이를 교체하고 운반하는 작업을 수십 차례 반복해야 한다. 여기에 각종 정비 장비를 싣고 내리는 작업까지 더해져 어깨와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은 상당하다.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이 개발한 산업용 착용 로봇 '엑스블 숄더(X-ble Shoulder)'는 이러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장에 투입됐다. 조끼처럼 착용하는 이 웨어러블 로봇은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보조해 무거운 타이어와 장비를 다루는 과정에서 인체 관절의 부담을 덜어준다.
효과는 수치로도 확인됐다. 엑스블 숄더는 어깨 관절에 가해지는 하중을 최대 60% 줄이고 전·측방 삼각근 활성도를 약 30% 낮춰 작업 피로를 감소시켜 줬다. 장시간 이어지는 르망 레이스에서 메카닉들이 경기 후반까지 안정적인 정비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탄소 배출 없는 레이스 뒤편,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
현대자동차 수소전기트럭 엑시언트. 레이싱 장비와 부품을 운송하며 모터스포츠 현장에서도 친환경 물류 운영 가능성을 보여줬다. (현대자동차그룹)
모터스포츠는 트랙 위를 달리는 레이스카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서킷 뒤편에서는 수많은 예비 부품과 정밀 계측 장비, 각종 정비 설비를 정확한 시간에 이동시키는 물류 시스템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물류 지원은 현대차의 세계 최초 양산형 대형 수소전기트럭 '엑시언트(XCIENT Fuel Cell)'가 맡았다. 디젤 트럭 대신 수소연료전지 시스템을 적용한 엑시언트는 레이싱 장비와 부품을 운송하며 모터스포츠 현장에서도 친환경 물류 운영 가능성을 보여줬다.
주행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엑시언트는 르망 현장에서 방대한 장비를 안정적으로 운송하며 수소 상용 모빌리티의 실용성을 입증했다. 현재 이 차량은 스위스와 독일,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에서 175대 이상이 운행되며 다양한 상용 물류 환경에서 실증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르망에서의 수소 물류 운영은 현대차그룹이 추진하는 수소 브랜드 'HTWO'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개발을 넘어 수소의 생산과 저장, 운송, 활용까지 아우르는 수소 밸류체인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번 르망을 통해 극한의 모터스포츠 환경에서도 수소 모빌리티가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서킷 밖 존재감… 미래형 모빌리티 '박스 버기'
제네시스 X 그란 이퀘이터 콘셉트를 기반으로 개발한 '박스 버기(Box Buggy)'. 르망 24시에서 VIP 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팬 빌리지와 경기장 곳곳을 오가며 운영 차량으로 활용됐다. (현대자동차그룹)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지는 패독과 팬 빌리지에서는 독특한 외형의 모빌리티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번 르망에서 처음 공개된 제네시스의 의전용 콘셉트 모빌리티 '박스 버기(Box-Buggy)'다.
제네시스 특유의 두 줄 램프 디자인을 적용한 박스 버기는 네 개의 바퀴를 각각 독립적으로 제어해 제자리 회전이나 측면 이동 등 일반 차량에서는 보기 어려운 움직임이 가능하다. 르망 현장에서는 VIP 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팬 빌리지와 경기장 곳곳을 오가며 운영 차량으로 활용됐으며, 향후 물류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 현장으로 확장 가능한 미래 모빌리티 플랫폼의 가능성도 함께 제시했다.
르망 24시는 더 이상 빠른 자동차만으로 완주할 수 있는 레이스가 아니다. 머신의 성능은 물론 물류와 정비, 로보틱스, 친환경 에너지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비로소 24시간을 버틸 수 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첫 르망 완주는 세 명의 드라이버와 레이스카만이 만든 결과가 아니었다. 트랙 위에서는 드라이버가, 트랙 밖에서는 크루와 첨단 기술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완주라는 하나의 목표를 함께 완성했다. 현대차그룹이 이번 르망에서 선보인 수소 물류와 로보틱스 기술은 극한의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도 실질적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로 남게 됐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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