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플래그십 세단 'K9'의 단종 가능성을 둘러싸고 국내 자동차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기아)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최근 기아 플래그십 세단 'K9'의 단종 가능성을 둘러싸고 국내 자동차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한 매체의 단독 보도와 이를 반박하는 후속 보도가 잇따르면서 진위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이번 논란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K9의 존속 여부가 아니다.
한때 브랜드의 기술력과 자존심을 상징하던 플래그십 세단이 전동화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K9을 둘러싼 논란은 판매량 감소를 넘어 자동차 산업의 투자 우선순위가 대형 세단에서 전기차와 PBV, 그리고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읽힌다.
과거 자동차 산업에서 플래그십 세단은 오랫동안 브랜드의 기술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가장 앞선 기술과 최고급 사양을 우선 적용하고 이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자동차 제조사들이 플래그십 모델을 바라보는 시선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최근 기아가 K9 생산 종료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 배경 역시 단순한 판매 부진이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K9을 둘러싼 논란은 판매량 감소를 넘어 자동차 산업의 투자 우선순위가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읽힌다(기아)
2012년 첫선을 보인 K9은 기아 브랜드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세단 가운데 하나였다. 앞선 '오피러스' 후속으로 등장하며 당시 국산 브랜드가 구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술과 상품성을 집약한 모델로 평가받았다.
한때 연간 1만 대 안팎 판매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보였지만 최근 시장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제네시스 'G80'과 'G90'이 프리미엄 시장을 장악했고, 현대차 '그랜저' 역시 고급화에 성공하면서 K9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판매량은 2022년 6585대에서 지난해 1581대로 감소했고 올해 역시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단종 결정의 핵심은 판매량 감소보다 생산 효율성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동차 산업은 현재 수십조 원 규모의 전동화 전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배터리 개발과 소프트웨어 플랫폼 구축, 차세대 전기차 전용 플랫폼 개발, 자율주행 기술 확보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간 수천 대 규모에 머무는 대형 세단을 유지하기 위해 별도 생산 설비와 개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제조사 입장에서 점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기아는 'EV2'와 'EV3', 'EV4', 'EV5' 등 대중형 전기차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기아)
실제로 기아는 'EV2'와 'EV3', 'EV4', 'EV5' 등 대중형 전기차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오는 2030년까지 14종 전기차 라인업 구축 계획을 밝힌 데 이어 PBV 사업 역시 핵심 성장 동력으로 육성 중이다. 과거 승용차 중심이었던 사업 구조가 상용 전기차와 목적기반차량(PBV)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기아는 2027년 차세대 SDV를 선보일 계획을 밝히고 향후 고도화된 자율주행 기술과 OTA, 차량 내 서비스 플랫폼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이 엔진과 변속기에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투자 우선순위 역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번 K9 단종 논란은 사실 관계를 떠나 특정 모델의 실패라기보다 자동차 산업이 선택한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보는 것이 맞다.
오늘날 자동차 제조사가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형 세단 한 대가 아니라 수십만 대 규모로 판매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전기차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생태계다. 소비자들 역시 브랜드 위상보다 충전 편의성과 주행거리, 소프트웨어 경험, 가격 경쟁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자동차 제조사가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형 세단 한 대가 아니라 수십만 대 규모로 판매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전기차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생태계다(기아)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플래그십의 개념 자체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연기관 시대 플래그십이 K9이나 '에쿠스', '체어맨' 같은 대형 세단이었다면 전동화 시대 플래그십은 EV9이나 향후 등장할 차세대 전기 SUV, 혹은 SDV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자동차 회사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기술이 더 이상 대배기량 엔진이 아니라 전기 아키텍처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이번 K9 단종 논란은 사실관계를 떠나 특정 모델의 실패라기보다 자동차 산업 구조 변화의 단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이제 가장 큰 차보다 가장 많은 소비자가 선택할 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K9의 마지막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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