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의 고성능 플래그십 전기 세단 '에어 사파이어(Air Sapphire)'. 최고 1200마력 이상의 성능으로 테슬라 모델 S 플래드의 경쟁 모델로 평가받았지만, 뛰어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판매 확대와 수익성 확보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루시드)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테슬라 못지 않게 주목을 받았던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루시드'가 14일(현지시간) 파산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현지 매체들을 종합하면 루시드 주가는 장중 40% 넘게 폭락하면서 여러 차례 거래가 중단될 정도였다. 전기차 전문 매체가 "루시드가 챕터11 파산보호와 비상장 전환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한 직후 부터다.
루시드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루머"라며 즉각 대응했다. 내년까지 운영할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구조조정 자문사인 앨릭스파트너스 역시 운영 효율화 외에 파산을 권고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시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루시드 주가는 큰 폭 하락으로 거래를 마쳤다.
업계에서는 루머에 흔들린 루시드의 주가 폭락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전기차 산업 전체를 바라보는 위기 의식의 한 단면으로 보고 있다.
'제2의 테슬라' 꿈꿨지만... '생산 지옥'의 문턱
피스커는 자체 공장 대신 오스트리아 마그나 슈타이어 공장에서 전기 SUV '오션(Ocean)'을 위탁 생산했다. 초기에는 생산 효율화 전략으로 주목받았지만, 품질 문제와 판매 부진, 자금난이 겹치며 결국 2024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피스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십 개의 전기차 스타트업이 '제2의 테슬라'를 꿈꾸며 등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테슬라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던 피스커는 파산했고 로즈타운 모터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라이벌은 양산의 벽을 넘지 못했다. 중국의 바이톤과 위마자동차도 시장에서 퇴장했고 유럽 배터리 산업의 희망으로 불리던 노스볼트 역시 무너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산'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동차 산업은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다. 멋진 콘셉트카를 만드는 것과 연간 수십만 대를 일정한 품질로 생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동차 한 차종을 개발하고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데는 수조 원이 필요하다.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원가는 떨어져야 하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오히려 생산이 늘수록 손실이 커졌다. 테슬라도 일론 머스크가 "생산 지옥(Production Hell)"이라고 표현했던 시기를 가까스로 버텨내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힘들게 양산을 시작했다고 해도 시장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 이들을 다시 옥죄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폭스바겐, GM, BMW 같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본격적으로 전기차를 내놓고 있고 중국에서는 BYD를 중심으로 한 가격 경쟁이 시장 질서를 다시 쓰고 있어서다.
겉치레뿐인 국내 스타트업, 보조금 연명의 한계
2026 베이징모터쇼에 전시된 IM모터(즈지자동차)의 전기 SUV 'LS6'. 중국 전기차 시장은 BYD를 중심으로 한 가격 경쟁이 심화되면서 중소 전기차 업체들의 생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오토헤럴드 DB)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루시드와 비슷한 시기 출범한 수 많은 전기차 관련 스타트업이 존재하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시장 지배력이 워낙 큰 탓에 틈새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초소형 전기차, 전기버스, 특장차 분야에 20개 안팎의 업체가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무적으로 안정적인 기업은 5곳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들마저 대부분 독자적인 기술과 제품 경쟁력으로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부 보조금과 공공기관 납품, 특정 지역의 제한된 수요에 기대 간신히 생산을 이어가는 곳이 적지 않다.
국내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면 승부보다 기존 완성차 업체가 쉽게 진입하지 않는 시장을 찾아야 한다. 승용 전기차를 독자 개발해 현대차·기아나 중국 업체와 가격과 생산 규모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초소형 화물차, 농업·산업용 차량, 특장차, 공공교통, 라스트마일 배송차처럼 고객과 용도가 분명한 틈새시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정면 승부 대신 '틈새'와 '공유'로 생존로(路) 뚫어야
2026 부산모빌리티쇼에 전시된 기아 PV5 기반 아이스크림 트럭. 국내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생존을 위해 승용차 대신 PBV와 특장차, 라스트마일 배송 등 틈새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오토헤럴드 DB)
차량 전체를 독자 개발하려는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검증된 배터리와 구동계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차체와 소프트웨어, 특장 설비처럼 자신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여러 업체가 각자 플랫폼과 생산시설을 구축하기보다 부품 공동구매와 위탁생산, 플랫폼 공유를 통해 초기 투자와 고정비를 낮추는 방식도 필요하다.
내수시장만 바라봐서도 어렵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중남미 등에서는 대형·고급 전기차보다 가격이 낮고 구조가 단순하며 정비가 쉬운 소형 상용 전기차 수요가 존재한다. 국내 스타트업이 가진 소량 다품종 생산과 특장 기술은 이런 시장에서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보조금에 의존해 차량을 판매하는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보조금이 줄면 판매가 멈추고 공공 입찰을 따내지 못하면 공장이 서는 사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차량 판매뿐 아니라 정비, 배터리 관리, 차량 관제, 충전 서비스와 같은 반복 수익을 만들어야 한다.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면 모든 기업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중국과 미국, 유럽에서 틀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제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기차를 만든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가 사고 왜 사야 하는지가 분명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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